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중국의 닭고기 역사

중은우시 2018. 1. 30. 17:51

글: 유주돌기(幽州突騎)


최근 들어 "대길대리(大吉大利), 만상흘계(晩上吃鷄, 저녁에 닭고기를 먹다)"는 말이 인터넷 유행어가 되었다. 이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영화 <결승21시>였다. 그 후에 게임 <절지구생:대도살>이 인기를 끌었다. 게이머가 게임에서 랭킹1위를 차지하면 이런 말이 나온다: "대길대리, 만상흘계" 그래서, "흘계(닭고기를 먹다)"는 말은 게이머들이 <절지구생: 대도살>에서 랭킹1위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흘계"는 절지구생의 게이머들이 갈망하는 것이지만 실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중국역사상 닭고기를 먹는 것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닭고기를 먹으려면 첫번째 조건은 닭이 있어야 한다. 집닭은 언제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세계각지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전통적인 주장에 따ㅡ면, 집닭은 약4000년전의 인도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고고학 전문가는 하북성 무안시 자산고유적지내에서 발견된 닭뼈를 감정한 후에, 세계의 집닭의 양계역사를 8000년전으로 끌어올렸다. 아마도 이곳이야말로 집닭의 기원지가 아닐까 생각된다(그러므로 소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는 기실 문제가 이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달걀이 먼저 있고나서 나중에 닭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계가 있다면 닭고기를 먹는 일도 있다. <주례.춘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장공계생(掌共鷄牲), 변기물(辨其物). 대제사(大祭祀), 야호단이사(夜嘑旦以賜); 범국지대빈객(凡國之大賓客), 회동군여상기(會同軍旅喪紀), 역여지(亦如之); 범국사위기(凡國事爲期) 즉고이시(則告以時)" 원시시대에 시간을 재는 방법이 없을 때는 닭이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였다. 그러나 주나라초기에는 닭이 진귀한 제사물품이기도 했다.


춘추시대에 접어들어, 평민들 중에 노인들만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맹자.진심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오모계(五母鷄), 이모체(二母彘), 무실기시(無失其時), 노자족이무실육의(老者足以無失肉矣)", 논어에도 이런 말이 있다: "살계위서이식지(殺鷄爲黍而食之)" 그리고 <월절서(越絶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문외계파허(婁門外鷄坡墟), 고오왕소축계(故吳王所蓄鷄), 사이보양지(使李保養之), 거현이십리(去縣二十里)" 이러한 기록들은 춘추시대에 이미 대규모 양계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규모 양계장의 출현은 사람들이 모두 닭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진한시기의 평민에 있어서, 닭을 먹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진한상품경제와 농민생활소비의 변화>라는 글에 따르면, 진한의 5명이 있는 집안의 1년 총수입은 11,200전이었다. 여기에 양식, 의복, 세금, 의약등의 각종 지출을 제하고 나면 1,025전이 남는다. 진한 4백여년간 서로 다른 시기의 서로 다른 집안자산을 기준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한나라 중등 농가의 집안자산은 4만에서 10만 정도이다. 부농이라면 집안자산이 10만이상이다. 그러나 빈농의 집안자산은 만전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대서북변지물가술략>이라는 글에 따르면, 한나라때 닭 한 마리는 36전이었다. 진한의 5명식구의 집안에 있어서 1년동안 벌어서 남기는 돈이 겨우 28마리의 닭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한나라때 서좌(書佐)는 매월 겨우 360전의 수입이었다. 한달의 급여로 닭을 산다면 겨우 10마리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진한의 보통 사람에 있어서 닭고기를 먹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겨우 중요한 명절때나 먹을 수 있다. 설사 자기가 닭을 기르거나 양식을 가지고 닭과 교환한다고 치더라도, 닭을 먹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한대물가신탐>이라는 연구에 따르면, 한나라때 고기(돼지,소,양,개)의 가격은 6-10전 혹은 1.5-2말의 양식으로 1근의 고기와 교환했다. 그래서 한나라때 다른 고기를 자주 먹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닭고기를 자주먹는 것은 부호나 가능했다.


만일 한나라로 간다면, 닭을 정말 먹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이 되는 것이 좋은 선택이다. 한나라때는 군대의 음식은 아주 중시했다. 한나라군대는 무상으로 사병들에게 각종 음식거리를 제공했다. 그중에는 닭고기도 포함되어 있다. 한나라때 사병은 매달 충붛ㄴ한 주식과 부식을 제공받았다. 여기에는 식염, 야채, 육식과 술이 포함된다. 거연한간(居延漢簡)에는 한나라때 식용닭고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최범계구십매(最凡鷄九十枚)


그후 생산력과 양계기술이 발달하면서, 닭은 갈수록 농가에서 반드시 기르는 가금(家禽)이 된다. 집집마다 닭이 있다는 것은 농민들의 양식이 풍족해졌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맹호연은 "고인구계서(古人具鷄黍), 요아지전가(邀我至田家)"라고 썼고, 송나라때의 육유는 "막소농가납주혼(莫笑農家臘酒渾), 풍년유객족계돈(豊年留客足鷄豚)"이라고 하여 모두 시가에서 농가의 풍족함을 읊었다. 그리고 닭고기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교제수단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닭고기를 먹는 것은 표준적인 중국농민의 손님접대방식이다.


그리고 송나라에 이르러 닭고기를 먹는 것은 이미 보편적이고 가벼운 일이 되어 버린다. <송인생활수준및화폐가치고찰>이라는 글을 보면, 송나라때 평민의 일일수입은 약 100문이다. 송나라때 1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저생활비용은 20문 내지 30문이다. <송대생축가격고>를 보면 닭 한마리에 70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송초기 아침에 시간을 알려주는 수탉 한 마리의 가격은 300문이다. 송나라인들은 한나라사람들보다 닭고기를 훨씬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송나라 평민의 하루 수입은 닭 한 마리를 충분히 살 수 있었다. 3일의 수입이면 아침에 시간을 알려주는 수탉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사람들과 비교하면, 송나라사람들은 닭고기를 훨씬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평민들이 매일 닭고기를 먹는 것도 꿈만은 아니게 되었다.


명나라에 이르러, 닭을 먹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린다. <명만력년간 북경의 물가와 급여>라는 글을 보면 명나라때 닭 한 마리의 가격은 0.03냥에서 0.07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0.05냥의 닭을 "대계(大鷄)"로 표기했다. 만력년간 북경의 보통 노동자가 비기술적 일에 종사하는 경우에 0.04냥을 벌었다. 노동강도가 비교적 높은 업종인 경우에는 0.05냥까지 벌었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장인이라면 하루 급여가 0.07냥에 이른다. 명나라 만력년간의 북경인의 일일수입은 닭 1마리는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명나라사람들은 하루에 한 마리의 닭은 살 수 있지만, 다른 음식거리를 더 살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명나라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일 닭고기를 먹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 오리고기를 먹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만력5년

만력20년

만력39년

돼지고기 1근

0.018

0.02

0.025

소고기 1근

0.013

0.015


양고기 1근


0.015

0.017

닭 1마리


0.07/0.05/0.04/0.034/0.03

0.0535/0.335/0.235

오리 1마리

0.03

0.03


거위 1마리

0.18

0,2

0.368/0.363/0.343/0.303


종합적으로 보면, 춘추시대에 평민은 노인들이나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진한시기에 이르러, 군인을 제외하고는 닭을 먹는 것이 평민에게는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달한 당,송에 이르러, 약간 부유하고 돈을 잘 쓰는 평민은 매일 닭고기를 먹는 것도 가능했다. 명나라의 평민에게도 닭고기를 먹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매일 먹기는 좀 어려웠다. 이와 비교하면 매일 오리고기를 먹는 것은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보면, 고대에 닭고기를 먹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아마도 매일 닭고기를 먹는게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않겠지만, 매주 닭고기를 먹는 것은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게임에서, 어떤 기술이 떨어지는 게이머는 수십시간을 하고도 '닭고기를 먹지' 못한다. 오늘날 '닭고기를 먹는' 것이 아마도 고대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