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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여후(呂后)는 광견병으로 죽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1. 7.

글: 장계합(張繼合)


고대 중국에 3명의 국가통치권을 장악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들은 각각 여치(呂稚, 즉 여후), 무조(武曌, 즉 무측천)과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이다.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여인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욕마이 있고, 일단 정점에 도달하면 전체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꿇릴 수 있다. 이 세 명의 특수한 여인들 중에서 공개적으로 황제를 칭한 경우는 무측천 뿐이다. 서태후는 봉건왕조 최후의 여성 최고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 여후는 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조정을 통할한 '여성최고권력자'이다. 그녀는 남편 유방을 도와서 한왕조를 열었다.


그녀는 확실히 남다른 권력자이다. 그녀는 기원전241년에 태어나서 기원전180년에 죽었다. 조적은 현재이 산동성 단현(單縣)이다. 가장 기이한 것은 그녀의 특이한 혼인이다. 그녀가 시집간 남편은 한나라의 개국황제 유방이다. 한나라의 최초 황후로서 그녀는 '황태후'까지 오른다. 진시황이 황제제도를 실시한 이래로 여후는 조정을 통할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할 수 있다. 황후, 태후의 신분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녀가 사망한 진실한 원인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여후는 모략이 뛰어났다. 한왕조 초기에 여후는 유방을 도와 한신, 팽월등 '이성왕(異姓王)'을 주살하고, 분열세력을 소멸시켜, 한왕조의 천하통일국면을 공고히 한다. 기원전195년, 유방이 사망하고, 한혜제가 등극한다. 한혜제는 여후를 '황태후'로 모신다. 아쉽게도 이 한혜제는 성격이 나약하여, 뒤에서 권력을 실제 휘두르는 건 여후였다. 기원전188년, 한혜제도 죽고, 이어서 황위에 오른 것은 한소제(漢少帝)이다. 여후는 8년간 임조칭제하고, 한소제는 생모가 여후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속으로 상당히 큰 불만을 키워오고 있었다. 여후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인물이 아니다. 즉시 기회를 잡아 한소제를 죽인다. 이어서 상산왕 유의(劉義)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까지 여후는 전후로 16년간 권력을 장악한다. 이는 이미 죽은 유방을 대신하여 숨을 이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후의 사망에 대하여 사료에는 이런 기록만 남아 있다: 기원전180년, 여후의 병이 위중해진다. 병이 위중할 때, 그녀는 명을 내려 조카인 '조왕(趙王)' 여록(呂祿)을 '상장군(上將軍)'에 앉혀,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여산(呂産)으로 하여금 '남군'을 통솔하게 한다. 그 외에 그녀는 유언을 남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황제가 어리니, 대신들이 병변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조정에서 군대를 확실히 장악해야 하고, 궁전을 수비해야 한다. 절대로 황궁을 떠나서 나를 매장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말라. 팔월 일일이 되어 여후는 병사하니 향년 62세이다. 그후 유방과 "장릉(長陵)'에 합장된다.


질병으로 죽었다는 설 이외에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여치가 '광견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삼월중, 여후불(呂后祓), 환과지도(還過軹道), 견물여창견(見物如蒼犬), 거고후액(據高后掖), 홀불부견(忽弗復見), 복지(卜之), 운조왕여의위숭(云趙王如意爲崇), 고후수병액상(高后遂病掖傷)"(삼월에 여후가 굿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도를 지나면서 푸른개처럼 생긴 물건을 보았고, 고후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점을 쳐보니, 죽은 조왕 유여의가 귀신이 되어 벌인 짓이라고 말했다. 여후는 겨드랑이에 상처를 입어 병을 앓게 된다). 이 기록에서 '견물여창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여후를 포함한 좌우에 따르던 사람들중 누구도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물건이 이 존귀한 여인을 공격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정말 사나운 개가 습격했을 수도 있고, 다른 가능성도 있다. 사나운 개는 그저 여후의 환상일 뿐일 수도 있다.


환상이라면 설마 여후에게 생리적인 질병이 있었단 말인가? <사기>권9 여태후본기 제9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기축(己丑), 일식(日食), 주회(晝晦). 태후악지(太后惡之), 심불락(心不樂), 내위좌우왈(乃謂左右曰), '차위아야(此爲我也)'"(기축일에 일식이 있었고, 낮이 어두워졌다. 태후는 이를 싫어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나 때분이다'" 여후가 '이것은 나 때문이다'라고 두려워한 원인은 확실히 그녀가 잔혹하게 '척부인'을 죽이고, '유여의'를 독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신에 시달린다. 이로 인하여 여치는 신에게 보우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후의 심리적인 질명은 계속 그녀 자신을 괴롭혔고, 죽을 때까지 거의 1년여동안 지속된 것같다. 아쉽게도 이런 괴이한 일을 <한서>에는 기록해놓지 않았다. 여후의 사망을 기록할 때 그저 한 줄만 남긴다: "추칠월신사(秋七月辛巳), 황태후붕어미앙궁(皇太后崩於未央宮)"(가을 칠월 신사일에 황태후가 미앙궁에서 붕어하다). '창견'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를 보면 여후의 사망에 대하여, 반고는 그저 <사기>의 기록을 그저 자연재해로 본 것이다. 여후의 사망에 대한 확실한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