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역사(趣歷史)
곽거병, 곽광형제는 중국역사상 보기 드물게 나란히 언급되는 형제들이다. 곽거병은 비록 2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여섯번 흉노를 친 영웅적인 사적은 그를 중국의 '전신(戰神)'으로 불러도 아깝지 않게 만들었다. 곽광은 한무제의 탁고대신으로 조정을 20년간 혼자서 쥐고 흔들었으며, 황제를 세우고 페위시키는 것도 가볍해 해냈다. 그래도 사서에서는 그를 존경하고 한왕조의 '주공(周公)'으로 본다. 관직은 대사마대장군, 선성후(宣城侯)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영웅적인 형제들은 아마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가족이 마지막에는 한 여인의 손에 망가질 줄은. 그 여인은 바로 곽광의 처이다. 기괴한 것은 <한서.곽광전>에 그저 그녀의 이름만 "현(顯)"이라고 언급하고 그녀의 성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녀를 곽현이라고 부르는데 그대로 안될 것은 없다. 동방이건 서방이건 처의 이름 앞에 남편의 성을 붙이는 전통이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에서도 편의를 위하여 그녀를 곽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소제가 너무 일찍 붕어한 것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한소제는 한무제의 작은아들이다. 한무제는 임종전에 곽광과 김일제에게 자식을 부탁한다. 이 두 사람은 확실히 한무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한왕조를 잘 다스렸고, 국태민안했다. 아쉽게도 영명한 한소제는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그리고 아들을 남기지 않았다. 곽광은 한무제이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모셔와서 황제로 앉힌다. 그러나 이 유하는 철이 없었다. 황위가 안정되기도 전에 곽광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곽광이 이를 어찌 용납하겠는가. 그래서 '행음란(行淫亂)'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태후(곽광의 외손녀)와 연합하여 겨우 27일간 황제로 있던 유하를 황제의 옥좌에서 끌어내린다.
이번에는 누구를 찾아서 황제로 앉힐 것인가? 곽광은 그와 친척관계에 있는 유병이(劉病已)를 생각한다. 유병이는 한무제와 위자부(衛子夫)의 아들 유거(劉據)의 손자이다. 위자부는 곽거병의 작은이모이다. 곽거병은 곽광의 동부이모 형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유병이는 곽광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유병이의 할아버지인 유거는 무고사건(巫蠱事件)으로 거병했다가 실패하였고, 그의 모친인 위자부, 그의 부인인 사양제(史良娣), 손자 유진(劉進)등이 모두 피살된다. 단지 이 몇달밖에 되지 않은 증손자 유병이만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민간에서 살았다. 곽광은 이런 아이를 찾아내서 황제에 앉힌다. 신황제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하여, 그가 대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의 이런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다. 모든 일은 반드시 곽광에게 먼저 말하고, 그 후에 다시 황제에게 말했다.
다만, 곽광의 처는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의 외손녀는 한소제의 황후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시 그의 작은 딸 곽성군(霍成君)을 신황제의 황후로 삼게 하고자 했다. 원래 유병이에게는 민간에 있을 때 처를 구하기 아주 어려웠는데, 겨우겨우 궁형을 받은 허광한(許廣漢)이 딸 허평군(許平君)을 그에게 시집보내주었다. 그래서 총각신세를 면했다. 황제가 된 후에, 대신들은 모두 허평군의 부친이 너무 비천하여 황후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그에게 다른 명문의 규수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라고 했다. 실제로는 곽광에게 잘보이려는 것이고, 그 뜻은 유병이로 하여금 곽광의 딸 곽성군을 황후로 삼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병이는 의리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곽광의 딸을 황후로 취할 수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조서를 하나 내려서 그가 민간에 있을 때 쓴 적이 있는 보검을 찾는다. 그의 뜻은 분명했다. 그는 비천할 때의 처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곽광은 총명한 사람이다. 유병이의 생각을 알고 난 후에 그에게 강요하지 않고, 허평군이 황후에 오르는 것을 동의한다.
다만 곽광의 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실의 의녀 순우연(淳于衍)을 매수하여 허평군에게 독을 먹이게 한다. 황후가 약을 먹을 때는 누가 먼저 맛을 본다. 목적은 누군가 독을 넣지 않았는지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곽현은 이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순우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걸 뭐 걱정할 게 있느냐. 너는 독만 넣어라. 내 남편의 권세가 있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한단 말이냐. 걱정되는 건 네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하는 것뿐이다. 허황후는 독약을 마신 후에,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약에 독이 있는 건 아니냐?"라고 묻는다. 순우연은 대답한다: "없습니다." 이렇게 고진감래의 황후는 겨우 3년간 황후로 있다가 음모로 목숨을 잃고 만다.
허황후가 죽자, 곽광의 딸 곽성군은 자연스럽게 황후에 오른다. 그러나 천하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한선제는 금방 소문을 듣는다. 그래서 태의를 체포하여 허황후의 사인을 추궁한다. 그렇게 되자 순우연이 어쩔 줄을 모른다. 곽광의 처도 당황했다. 급히 곽광에게 이실직고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곽광이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의 처를 신고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곽광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이 일을 눌러버린다.
그러나 곽광이 죽은 후, 형세는 역전된다.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한선제가 분명히 손을 볼 것이라는 것을 처를 죽인 원수를 갚을 것이라는 것을
이때 곽가의 권세는 그래도 아주 컸다. 그들은 많은 핵심위치를 장악하고 있었다. 곽광의 아들 곽우(霍禹), 곽거병의 손자 곽운(霍雲)은 모두 중랑장이었다. 곽운의 동생 곽산(霍山)은 봉거도위시중으로 호월병(胡越兵)을 장악하고 있었다. 곽광의 두 사위는 각각 동서궁의 위위(衛尉)로 황궁의 안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곽씨자제도 모두 제조대부(諸曹大夫), 기도위(騎都尉), 급사중(給事中)등의 요직에 있었다. 이때, 만일 한선제가 경거망동한다면, 곽씨집안은 다시 한번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었다.
한선제는 당연히 손을 즉시 쓰지 않는다. 그는 곽씨집안의 터럭하나 건드리지 않을 뿐아니라, 반대로 곽씨자제들의 관직을 올려준다. 곽우는 우장군이 되어, 곽광의 박륙후 작위를 계승한다; 곽산은 악평후에 봉해지고, 봉거도위영상서사가 된다; 곽운은 관양후에 봉해진다.
곽씨들은 철저히 마비된다. 곽광의 처는 건물을 대거 지을 뿐아니라, 미남자 풍자도(馮子都)와 밀회를 즐긴다. 곽우, 곽산, 곽운도 하고싶은대로 사냥을 하고 다녔다. 곽운은 심지어 출근도 하지 않는다. 자주 종을 보내서 황제에게 병가를 신청한다. 실제로는 사냥하러 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한선제는 속으로 기뻐한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곽씨집안을 제거할 준비를 한다. 그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황궁의 병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보직순환의 방법을 쓴다. 곽광의 사위로 미앙궁(未央宮)의 부대를 장악하고 있던 범명우(范明友)를 광록훈(光祿勳)으로 전보하고, 둘째사위 임승(任勝)은 안정태수(安定太守)로 전보한다. 몇달 후, 다시 곽광 누나의 사위인 장삭(張朔)을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전보하고, 손녀사위인 왕한(王漢)은 무위태수(武威太守)로 내보낸다.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장락궁(長樂宮)의 병권을 쥐고 있던 곽광의 큰사위 등광한(鄧廣漢)을 소부(少府)로 전보하여 곽씨집안의 황궁에 대한 위협을 철저히 제거한다.
한선제가 취한 두번째 조치는 곽씨의 병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곽우에 대하여는 명예직인 대사마 직위를 주면서 그의 우장군 병권을 회수한다. 범명우에 대하여는 광록훈의 직위만 갖도록 하고 도료장군의 인신을 회수한다. 곽광의 가운데사위인 조평(趙平)의 기도위 병권도 회수한다. 결론적으로 이전에 곽씨들이 장악하고 있던 호월기병, 우림군 및 미앙궁, 장락궁의 병권은 모조리 그의 허황후집안 혹은 외할머니 사(史)씨집안 사람들로 바꿔버린다.
가련하게도, 이런 상황에 처했음에도, 곽우는 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병이 났다는 이유를 대며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인 임선(任宣)이 그를 보러 가서 무슨 병인지 물어보니, 곽우는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내가 무슨 병이 들었겠는가. 황제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이제 우리 아버지의 무덤의 흙도 아직 마르지 않지 않았느냐. 그가 우리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경성에서 쫓아내고 있다. 권력도 모조리 허씨와 사씨에게 넘겨주었다. 나의 병권마저도 빼앗았다. 이걸 어떻게 참아 넘기느냐."
임선이 말한다: "과거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무를 알아야 준걸입니다. 허씨와 사씨는 모두 황상의 친척입니다. 그가 그들을 안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당신이 이렇게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내 생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곽우는 그제서야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만일 곽씨들이 정말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한선제의 보복행위는 이 정도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의 사실이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한선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내심으로 곽광에 대하여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곽현이 참지 못한다. 그녀는 이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허황후를 독살한 것을 곽우, 곽산, 곽거화(霍去和)에게 털어놓는다. 곽씨집안 사람들은 그제서야 황제가 왜 그들의 병권을 하나하나 빼앗아 갔는지 알게 된다. 그들은 빈번하게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고, 최종 결론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밖에 없다고 내린다. 그들이 마련한 계획은 태후(곽광의 외손녀)로 하여금 박평군(博平君, 한선제의 외할머니)을 초청하여 술을 마시도록 하고, 그 후에 승상(丞相)등 대신을 유인해내서, 범명우, 등광한등이 태후의 명의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 후에 한선제를 폐위시키고, 곽우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병권을 잃은 곽씨집안이 이 게획을 실현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실제로 그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계획은 누설되어 버린다. 곽운, 곽산, 범명우는 자살하고, 곽현, 곽우, 등광한은 체포된 후에, 곽우는 요참(腰斬)형을 당하고, 곽현, 딸 사위 및 곽씨와 각양각색의 관계가 있는 총 수천호의 사람들이 모조리 멸문된다. 곽성군만은 한선제가 반란음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서 황후의 직위만 폐위시키고, 차마 죽이지는 않는다.
곽현을 생각해보면 정말 가치가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작은 딸을 황후에 앉히기 위하여, 무고한 허황후를 죽인 것은 물론이고, 곽시 수천호의 사람들의 목까지 날렸다. 자신의 딸도 겨우 3년간 황후로 있다가 냉궁으로 쫓겨났고, 마지막에는 자살로 끝맺는다.
더욱 아쉬운 것은 곽거병, 곽광이 일세의 영명을 떨쳤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한 여인의 손에 망가진 것이다.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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