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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항우가 죽은 후 항씨일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7.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한5년(기원전202년) 십이월, 서초패왕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하다. 유방은 곡성(谷城, 지금의 산동 평음 서남쪽)에 항우의 묘시로 선정하고 노공(魯公, 초회왕은 항우를 노공에 봉한 바 있다)의 규격으로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친히 장례식에 참석하여 곡을 하며 애도한다.


그렇다면, 항우가 죽은 후, 항씨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고조 유방은 항씨집안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지 않았고, 모두 사면했으며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1. 사양후(射陽侯) 항백(項伯)


항백은 항우의 숙부이다. 초군의 2인자인데, 여러번 유방을 도와주었다:

첫째, 항우가 조무상의 밀보를 받고, 다음 날 '패공군을 격파하려고 준비하자 장량에게 서신을 보내고, 항우에게 출병하여 유방을 치지 말도록 권한다;

둘째, 홍문연때, 항장(項莊)이 검무를 출 때, '계속 자기의 몸으로 패공을 가려주어, 항장이 공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유방의 목숨을 구해준다.

셋째, 항우가 19로제후를 분봉할 때, 유방은 겨우 파,촉 이군을 얻는다. 그대 항백이 권하여 한중군도 유방에게 준다. 나중에 한신은 바로 한중군을 발판으로 삼아, '명수잔도, 암도진창'을 이룰 수 있었다.

넷째, 항우가 유태공을 팽살하는 것을 저지한다.


유방은 항백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황제를 칭한 후에 그에게 유(劉)씨성을 하사하고 사양후에 봉한다. 봉지는 지금의 강소성 보응현 사양호진의 동쪽이다. 항백은 이렇게 하여 유빅(劉伯)이 된다.


유백은 사양후국에서 수리공사를 하여 농업을 발전시켜 지역을 윤택하게 만든다.


한혜제3년(기원전192년), 유백은 사망한다. 그의 아들 유휴(劉)는 범죄를 저질러 작위를 승계할 자격을 잃는다. 그리하여 사양후국의 봉지는 조정의 직할토지로 바뀐다.


2. 도후(桃侯) 항양(項襄)


항양은 항연(項燕)의 아들이고, 항백의 형제이다. 역시 항우의 숙부이다.


항양은 한2년(기원전205년), 한나라장수 관영(灌嬰)에게 패배한 후, 유방에 귀순한다. 항씨가족중 유방에 가장 먼저 투항한 인물이다.


유방이 황제를 칭한 후, 유씨성을 사성으로 내린다. 항양은 이때부터 유양(劉襄)이 된다. 그의 이름은 제왕 유비(劉肥)의 장남과 이름이 같다. 유양은 공을 세우지 못하다가 고제11년 유방을 따라 회남왕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비로소 회남태수에 봉해진다.


다음 해에는 도후에 봉해진다. 봉지는 지금의 하북성 심주로 식읍1천호였다.


전원10년(기원전170년), 유양이 사망하고, 아들 유사(劉舍)가 작위를 승계한다.


유사는 관운이 형통했다. 한경제때 삼공의 하나인 어사대부를 지낸다. 중원3년(기원전147년)에 주아부(周亞夫)가 재상에서 파면된 후, 유사가 그 직위를 차지한다.


유사는 무슨 치국의 재능은 없었지만, 글자를 가지고 문자유희는 할 줄 알았다. 그는 관직을 개명한다. 한경제의 동의를 받아 개명한 관명은 다음과 같다:


승상(丞相)은 상(相)으로

군수(郡守)는 태수(太守)로

군위(郡尉)는 도위(都尉)로

정위(廷尉)는 대리(大理)로

봉상(奉常)은 태상(太常)으로

전객(典客)은 대행(大行)으로

치속내사(治粟內史)는 대농(大農)으로


4년후, 유사는 재상에서 파면된다. 후원3년, 사망하고 아들 유유(劉由)가 작위를 승계받는다.


3. 평고후(平皋侯) 항타(項它)


항타는 항타(項他), 항타(項佗)라고도 적는다. 그는 항우의 조카이다. 일찌기 초군을 이끌고 진군에 포위되어 있던 위나라수도 임제(臨濟)를 구원하러 갔다가 진나라장수 장한(章邯)에게 패배당한다. 초한전쟁시기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 위나라로 들어가서 위왕표(魏王豹)를 도와 한군을 막는다. 그러나 다시 한신에게 패배당한다. 그리고 팽성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유방에 투항한다.


한나라가 건립된 후, 유씨성을 사성으로 받고, 평고후에 봉해진다. 작위는 4대를 내려가서 한무제시기에 주금(酎金)으로 봉국이 폐지된다.


항씨집안 사람들 중에서 위의 3명이 후에 봉해진 것을 제외하고, 항우의 당제인 항장도 있다. 바로 홍문연에서 범증이 불러와서 무검을 춘 인물이다. 그는 후세에 '항장무검, 의재패공'의 성어를 남겼다. 그러나 그후의 경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항한(項悍), 항성(項聲), 항관(項冠)등도 사서에 더 이상 기록이 남아 있지않다. 아마도 전쟁중에 죽었거나, 도망가서 이름을 숨기고 살았꺼나, 아니면 한나라에 투항한 후 공을 세우지 못해서 후에 봏재지지 못하고 그저 유씨성만 사성으로 받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