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노자(老子)는 언제부터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칭해졌는가?

중은우시 2018. 6. 29. 16:20

글: 자주군(煮酒君)





<사기>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자의 이미지는 한나라때까지는 아직 신격화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단지 그를 장수한 노인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사마천이전의 적지 않은 전적에서도 노자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모두 노자가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은 없다. <장자(莊子)>에서는 노자를 "박대진인(博大眞人)"이라고 했다. 즉 그는 대도를 깨달은 성인이라고 했지, 신선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후한서-초왕영>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왕 영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황로(黃老)를 좋아했다." 동한시기 황로지술이 성행한다. 황로지도를 받들어모시면서 장생을 구하는 사회풍토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조정에까지 만연한다. 동한의 왕부(王阜)는 <노자성모비(老子聖母碑)>에서 이렇게 썼다: "노자는 도(道)이다. 무형(無形)의 앞에 생겨나서, 태초(太初)의 전에 일어나고, 태소(太素)의 원(元)을 행하고, 육허(六虛)를 부유(浮遊)하며, 유명(幽明)을 출입했다. 혼합(混合)의 미별(未別)을 보고, 청탁(淸濁)의 미분(未分)을 돌파했다." 이를 보면 이때 이미 노자는 '도'와 하나로 합쳐진다. 우주와 천지는 또한 '도'가 창조한 것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노자는 이미 신격화 되었다. 그러나, '태상노군'이라는 칭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노자를 '태상노군'이라 칭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이다. <위서.석로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태상노군'을 만났다. 같은 동한(東漢)시기의 도가경전인 <태평경(太平經)>에도 태상노군의 말을 전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조의 도홍경(陶弘景)의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는 비교적 계통적인 도교 선보(仙譜)이다. 이 책에서 신선을 7개 등급으로 나누는데, 제1등급의 신선의 주위(主位)는 원시천존(元始天尊)이다. 제2등급의 주위는 현황대도군(玄黃大道君)이고, 제3등급의 주위는 태극금궐제군(太極金闕帝君)>이다. 제4등급의 주위가 비로소 태청태상노군(太淸太上老君)이다. 이때의 노자는 도교내에서의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왕조가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도교교주와 같은 이(李)씨라는 것때문에 이연(李淵)은 교묘하게 도교와 노자의 민간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한다. 그는 스스로 노자의 후손이라고 말하여, 정권을 취득하는데 민간의 지지와 여론의 호응을 얻어낸다. 


당왕조가 건립된 후, 이연은 노자를 조상으로 모셨을 뿐아니라, 노자와 연결시키는 족보를 반든다. 그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받든다. 그리고 <도덕경>을 상경(上經)으로 삼아 공거인들이 반드시 정통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전국각지에 노자상을 모시고, 현원묘(玄元廟)를 건립한다. 그리고 여러번 친히 노자신묘를 배알하기도 했다. 무덕8년, 그는 도교를 우선으로 하고, 유교를 다음으로 하며, 불교를 그 다음으로 한다는 명을 내린다. 이때의 노자 즉 태상노군은 원시천존, 영보천존(靈寶天尊)과 더불어 도교에서 가장 높은 신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노자는 남북조 시대부터 '태상노군'이라고 불리워졌고, 당왕조때 정식으로 태상노군은 도교에서 지고무상한 지위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