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정샤오송(鄭曉松): 중국에서 보기드문 장관급 고위관료자살의 배후는...?

중은우시 2018. 10. 24. 11:00

글: 최사방(崔士方)


마카오중련판공실 주임 정샤오송이 경비가 삼엄한 거처에서 투신자살했다. 비록 중공18대이후 부패단속의 압력하에서 부패관련자들이 속속 자살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장양(張陽)을 제외하고, 정샤오송의 죽음과 비견할만한 사람은 없다.


군계(軍界) 고위층의 자살은 정계(政界)와 서로 다른 집단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다루지 않기로 한다.


문혁이후,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난 자살사건중 장차관급이상의 고위관료는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장관급은 더더욱 적다. 겨우 2명이다. 정샤오송이 그 중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은 텐진시의 전 정협주석 송핑순(宋平順)이다.


중국관료사회에서, 차관급은 수가 아주 많지만, 장관급은 훨씬 적어진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다 합하더라도, 모두 합쳐서 이백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중국의 권력 차핵심층이다. 만일 더욱 핵심층인 "당과 국가의 지도자"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자살하게 압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7년 6월 텐진 정법계(政法界)의 '큰형' 송핑순의 죽음을 살펴보자. 당시 천진의 관료사회에서는 "양순일찰(兩順一昌)"이라는 말이 있었다. 양순은 송핑순과 우창순(武長順)이고, 일창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천진시위서기인 장리창(張立昌)을 가리킨다.


송핑순은 리진바오(李金寶)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당시 우창순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이며 공안부장이었던 저우용캉(周永康)이 '데려가서' 살려주었다. 그런데, 저우용캉은 왜 진흙탕에 빠져있는 송핑순은 구해주지 않았을까? 한가지 합리적인 추론은 이렇다. 송핑순의 보스는 다른 사람이고, 그 보스는 그를 보호해주려 하지 않았다.


많은 분석가들은 모두 장리창이 송핑순의 보스라고 본다. 맞다. 그러나 장리창은 송핑순의 소(小)보스이다. 장리창은 반년후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는 당시 마찬가지로 불리한 소문에 휩싸여있던 장리창도 심신이 지쳐서 스스로를 지키기도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송핑순을 죽음으로 강하게 몰고간 것은 기실 송핑순의 대(大)보스이자, 당시 중공정치국상임위원 겸 정법위서기였던 뤄간(羅幹)이다.


뤄간은 1999년 4월 25일 파룬공신자들이 북경으로 와서 '중남해를 포위'한 사건을 만들었는데 이는 송핑순(당시 텐진시위 정법위서기 겸 공안국장)이 텐진에서 많은 사람들을 체포함으로써 성공했다. 그래서 송핑순은 뤄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까지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뤄간으로서는 송핑순이 이미 중앙기율검사위의 조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송핑순이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마음씀씀이가 악독한 뤄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중앙특파원'의 신분으로 정샤오송은 마카오에서 진정한 막후의 보스이다. 마카오의 특별구행정수반도 그의 눈치를 보며 일을 처리해야 한다. 소위 '특구', '고도자치'는 모두 문앞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전 마카오중련판공실 주임 리강(李剛)의 하야는 <빈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마카오의 전 특구행정수반 에드문드 호(何厚鏵)가 북경에 고발장을 낸 것과 관련이 있다. 사유는 서화를 고가에 팔고, 횡금비지(橫琴批地)문제에서 재물을 취한 혐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전임 행정수반 에드문드 호가 고발장을 냈을까, 현임 마카오특구행정수반 페르난도 추이(崔世安)이 아니고. 그것은 마카오의 페르난도 추이는 그 당이 보낸 감시인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급이 더 높고, 지위가 '국가지도자'에 오른 에드문드 호(당시 정협 부주석)이 북경에서 손을 쓴 것이고, 그래서 비로소 이강을 끌어내릴 수 있었다.


마카오라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정사요송은 의심의 여지없는 '큰형님'이다. 그가 건물에서 투신했다면, 배후의 거대한 압력이 있었음은 당연히 알 수가 있다. 분명히 북경에서의 압력이다.


정샤오송과 송핑순사건은 공개시기에서 큰 차이가 있다. 송핑순사건은 항간의 소문이 떠돈지 5일만에 공식으로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서 조사받는 동안에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샤오송사건은 다음날 바로 공개했다. 그리고 마카오사법계통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저 먼저 성격규정을 해버렸다: '우울증.' 그리고, 정샤오송이 죽은 후, 중앙조직부와 홍콩마카오판공실책임자는 마카오로 가서 '가족을 위로'하는 '우대'를 해준다.


이렇게 한 것은 많은 정도에서 시진핑이 남하하려는 시기에, 북경은 살풍경한 장면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정샤오송에게 '우울증'이라는 병을 붙여서 해결한 것이다. 만일 정샤오송이 뛰어내리기 전에 이런 결말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는 정말 관료사회의 "산사초(算死草, 주성치가 주연한 영화제목이면서, 광동어로 심계가 깊은 사람을 뜻한다)"이다.


그러나,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 정샤오송의 배후의 그 보이지 않는 손도 결국은 드러날 때가 있다. 이것은 중국의 부패단속역량이 강해서가 아니라, 정의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창순은 저우용캉의 비호하에 살아남았지만, 몇년후 우창순뿐만 아니라 저우용캉까지도 감옥에 들어가고 만다 천망은 회회하나 소이불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