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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우문헌(宇文憲): 북주(北周) 최대의 원안(寃案)

by 중은우시 2018. 6. 18.

글: 육기(陸棄), 손옥량(孫玉良)


북주의 흥성은 실로 북제를 멸망시키고 남북대치를 하는데 있고, 우문헌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북주의 멸망은 실로 주선제가 스스로 대들보를 제거한데 있다. 즉, 우문헌을 궁안에서 액사하도록 한데 있다. 북조의 흥망성쇠는 실로 비감하다. 우문헌은 제왕지가에서 태어났고, 큰 공을 세웠지만, 결국 토사구팽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주의 기반을 닦은 사람은 우문태(宇文泰)이다. 그는 관농의군(關隴義軍)으로 시작해서, 부친과 3명의 형이 모두 전쟁터에서 사망하고, 오직 그 혼자만 살아남는다. 굳건한 의지력과 뛰어난 담량으로 그는 남으로 장강과 한수를 정리하고, 서로는 파촉을 격패시키며, 북으로 사막을 통제해서 3분천하중 하나를 차지하여 위무제 조조와 같은 업적을 세운다. 우문태는 평생동안 2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우문헌은 그중 다섯째아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문태가 돌연 병사하게 되었는데,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임종때 권력을 조카인 우문호(宇文護)에게 넘겨준다. 우문호는 중국역사상 최대의 권신중 하나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3명의 천자를 세우고 3명의 천자를 시해한다. 북주의 개국황제 효민제 우문각, 두번째황제 주명제 우문육, 세번째 황제 주무제 우문옹은 모두 그가 세웠다. 그리고 북위의 공제 척발곽, 북주 효문제 우문각, 주명제 우문육은 모두 그가 시해한다. 우문헌은 도광혈영의 서위, 북주 시기에 살았고, 친히 활실 내부의 권력다툼과 살륙을 눈으로 보면서 자랐다.


우문태가 죽었을 때, 우문헌은 막 12살이었다. 천자로 세워진 그의 형 우문각은 이때 겨우 15살이었다.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당형 우문호는 이때 44살이다. 우문각이 시해될 때 우문헌은 13살이다. 우문육이 피살될 때 우문헌은 겨우 16살이었다. 이렇게 많은 궁중사변을 겪으면서, 우문헌은 어려서부터 노련하고 기민하게 바뀐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표정이 엄숙하여 마치 어른같았다. 우문헌은 나이가 어렸지만, 그가 군국의 중임을 맡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때는 문벌세족의 시대이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는 외침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우문헌은 10살도 되기 전에 부성현공(涪城縣公)이 되고, 나중에 안성군공(安城郡公)으로 오른다. 12살때는 효민제에 의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된다. 주명제가 즉위한 후에는 대장군, 익주총관 겸 익,녕,파,노등 2주제군사 및 익주자사가 되고,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진다. 식읍은 1만호이다. 이때 그는 겨우 12,3살의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까? 답은 Yes이다. 자고로 영웅은 소년에서 나온다. 감라(甘羅), 곽거병(霍去病), 주유(周瑜)가 모두 소년영웅이다. 우문헌도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일찌감치 우문태가 살아있을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문태가 촉을 평정하고, 아들 중에서 촉을 다스릴 사람을 고르는데, 10살도 안된 우문헌이 스스로 나서서 맡겠다고 한다. 우문태는 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러자 우문헌은 이치를 내세워 반박한다: "재능이 서로 다른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과 관련이 없습니다. 만일 써보시고 효과가 없으면 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16살때, 주명제 우문육은 그가 원하는대로 그를 촉으로 보내어 부임하게 한다. 우문헌은 조괄, 마속처럼 탁상공론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일찌기 소년시기에 우문옹(宇文邕)과 <시경>, <춘추>을 읽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공부했다. 촉은 그의 인생에서 첫번째 시험밭이 된다. 우문헌은 촉을 다스리면서 소송사건을 혼자서 처리한다. 사건을 맡으면 피곤함도 없이 분명하게 살피고 판단해서 공평하고 공정했다. 전쟁이 자주 있던 시기에 우문헌의 이런 조치에 촉의 사람들은 감격하여 그를 위하여 비를 세워 칭송한다.


우문헌의 재능을 당시의 권상 우문호가 바로 알아본다. 그리하여 우문헌을 발탁하여 경성으로 부른다. 주국(柱國), 옹국공(雍國公), 대사마(大司馬), 소총재(小冢宰)등의 직위를 받는다. 그리고 우문호를 따라 남정북정한다. 우문헌은 비범한 치국능력을 가졌을 뿐아니라, 천재적인 군사지휘능력도 가졌다. 북주시기 북주는 북제와 항상 전쟁을 벌였는데, 북주의 강력한 적수는 북제의 명장 곡률광(斛律光)이었다. 곡률광은 고거족(高車族)이다. 그는 군대를 엄하게 다스렸고, 항상 먼저 모범을 보였으며,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그리하여 낙조도독(落雕都督)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우문헌이 곡률광과 만난 것은 정말 제대로 적수를 만난 셈이다. 비록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지만, 우문헌은 위기에 닥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장의 모습을 드러내어, 북주의 관병들이 모두 탄복한다. 우문옹은 우문호를 제거한 후, 북방을 통일하기 위하여, 북제를 멸망시키는 전쟁을 시작한다. 우문헌은 북제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전군을 지휘하지 않고 선봉을 맡는다. 그리고 앞장서서 적진을 돌파하여 북주관병의 옹호를 바는다. 일거에 북제명장 곡률광을 격패시켜 명성을 크게 떨친다. 곡률광은 북제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북주는 오랫동안 공격해도 그를 무너뜨릴 수 없게 되자, 이간책을 써서 곡률광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었다고 모함한다. 고위(高緯)는 북주의 이간계에 속아서 의심을 품고 곡률광을 죽이고, 일가를 멸문시킨다. 이렇게 하여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게 된다. 576년 12월, 우문옹은 우문헌과 개휴(介休)에서 회사(會師)하고 북제의 수비장수 한건업(韓建業)를 핍박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이렇게 하여 북주는 결국 북방을 통일한다. 웅재대략의 위무제 조조가 일찌기 완성했던 북방통일대업을 완수한 것이다.


우문헌은 문무에 모두 능하고 유명한 효자였다. 옛날에 증자(曾子)의 "교지통심(嚙指痛心)"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은 증참이 아주 효자여서 모친에게 효성스러웠는데, 한번은 증자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마침 증자는 산으로 나무하러 가 있었다. 증자의 모친은 증자를 부르기 위하여 문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는데, 산에서 나무를 베던 증자는 갑자기 가슴이 아팠고,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모친에게 왜 불렀는지 물어본다. 증자의 모친은 손님이 와서 아들이 생각났다고 대답한다. 증자모자의 마음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문헌은 모친을 극진히 모셨는데, 매번 모친이 병들면 반드시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도 않고 간병했다. 오랫동안 외지에서 전쟁에 참여했지만, 증자와 마찬가지로 모친이 병이 들면 비록 만수천산이 가로막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 느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덕과 재능을 겸비한 주왕실의 충신이 황제와 권신간에 끼어서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공이 너무 높아지며 지위와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겁냈다. 항상 우문호를 따라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우문호가 북주무제 우문옹에 의하여 제거될 때, 우문헌은 거의 혼비백산한다. 자신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우문옹은 과연 일대명군이었다. 그는 우문헌이 예전에 우문호와 같이 전투에 참가한 것에 대하여 질책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우문호는 군왕을 눈아래 두지 않았고, 황상을 능멸했고, 반란을 꿈꾸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죽여서 나라를 안정시킨 것이다. 너는 나와 친형제이고, 고락을 함께해야 한다. 너는 이 일과 관련이 없다." 그리고 그를 대총재(大冢宰)로 봉하고, 제왕(齊王)의 작위를 내린다. 대총재는 승상에 해당한다. 1인지하 만인지상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문헌은 계속 두려워하고, 항상 물러날 생각을 한다. 주무제가 계호(稽胡)를 칠 때, 우문헌은 병을 핑계로 더 이상 공을 세울 기회를 피한다. 우문헌은 자신의 존재감을 희석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황실의 사람이고 범려처럼 오호를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비극이다.


주무제는 웅재대략의 황제였다. 그는 비록 신하들에게 의심을 많이 품었지만, 어쨌든 혜안을 가지고 충간을 분명히 가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우문윤(宇文贇)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그대로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천자였다. 우문옹은 위무제 조조와 같이 북방을 통일하는 기업은 만들어냈지만, 손중모같이 강산을 지킬 아들을 낳지는 못했다. 우문헌의 우려는 주무제시대에 벌어지지 않았지만, 주선제시대에는 잔혹한 현실로 바뀐다. 주선제 우문윤은 우문옹이 재위할 때는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우문옹이 죽자 진면목을 드러낸다. 우문윤은 망국지군의 전형이다. 그의 흥미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술과 여자에 있었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5명의 황후를 동시에 세운 황제이기도 하다. 그중 한 황후는 바로 수문제 양견(楊堅)의 딸인 양려화(楊麗華)이다. 향락을 즐기기 위하여, 그는 먼저 7살된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이 태상황은 스스로를 '하늘(天)'이라고 한다. 대신들이 그를 보려면 3일간 고기를 먹지 않고 1일간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 우문윤이 가장 우려한 것은 공로가 크고, 덕망이 높고 권한이 큰 황숙, 제왕 우문헌이 그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우문헌은 배분도 높고 공로도 크고, 덕망도 있고 사람됨도 겸손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인격상의 이런 무결점은 그의 최대 결점이 된다. 악착같은 조정에서 진흙 속에서 자라났지만 더럽지 않은 연화(蓮花)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우문윤은 급히 우문헌을 제거하려 했다. 심지어 '막수유'같은 죄명도 필요없었다.


그리하여 우문헌은 무고하게 궁문에서 액사(縊死)당한다. 나이 겨우 35살이었다. 그의 아들인 질(質), 종(賨), 공(貢), 건희(乾禧), 건흡(乾洽)도 같이 주살된다. 상대장군 안읍공 왕흥(王興), 상개부 독고웅(獨孤熊), 개부 두로소(豆盧紹)등 우문헌과 가까운 대신들도 같이 처형당한다. 죄명은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우문윤은 역사상 재판을 거치지 않고 대신을 죽인 최대의 원안을 만들어낸다. 우문헌이 죽기 전에 가장 걱정하고 신경쓴 것은 모친에게 아직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문헌이 죽은지 겨우 2년만에 우문윤은 주색에 과도하게 빠져 살다가 병사한다. 나이 겨우 22세의 일이다. 우문헌이 죽은지 3년만에 양견은 북주에서 황위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나이 겨우 8살의 소황제 우문천(宇文闡)을 죽이니 북주가 멸망한다. 가련한 우문태, 우문옹, 우문헌부자영웅이 일구어놓은 만리강산은 겨우 20여년만에, 불초자손 우문윤의 손에 망해버린다. 그리고 영웅일세의 우문헌은 평생 조심스럽게 공성신퇴를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조카황제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