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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한족 400년의 아픔

by 중은우시 2011. 6. 24.

 

 

: 노덕(路德)

 

 

 

936년 봄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태원(太原)에 주둔하고 있던 후당(後唐)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塘)은 마침내 명의상으로는 처남인 후당황제 이종가(李從珂)와 철저히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른다.

 

황제와 등을 돌린다는 것은 반란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당연히 심각하다. 그의 친동생, 당제, 두 아들은 수도 낙양에서 피살된다. 그리고 황제는 수만의 정벌군을 태원으로 보낸다.

 

석경당의 병력은 후당의 대군과 대적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정세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위급했다. 그러나, 석경당은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사전에 계획을 철저히 세워놓았기 때문에 황제와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단순히 후당의 공격을 저지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후당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의 도움을 받아서이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거란황제 야율덕광은 친히 출정하여, 석경당을 위하여 태원의 포위망을 풀어주었을 뿐아니라, 그를 도와 일거에 후당을 멸암시킨다. 그리고 석경당은 후진(後晋)을 건립하여 황제에 오른다. 거란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후진은 거란에 대하여 칭신(稱臣)하며 ,양국은 부자의 결맹을 맺고, 부자의 예를 행한다. 동시에 거란에 연운십육주를 할양한다.

 

석경당은 이로 인하여 중국역사상 가장 더러운 이름을 남긴 인물중 하나가 된다. 천여년동안 그는 아황제(兒皇帝)’매국적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사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자면, 오대의 난세에 참월난륜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석경당은 사타인(沙陀人, 서돌궐의 한 갈래)으로서, 그가 모셨던 후당의 3가지 성의 4명의 황제들 중에서 두번이나 형제간의 반목으로 무력으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벌어졌었다. 황제가 되고자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것은 특별히 문제삼지 않았었다. 적을 부친으로 모시는 것은 후안무치한 행동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였다고 욕하는 것은 지나친 점이 없지 않다.

 

사실상, 중원왕조는 한,당과 같이 강성한 때에도, 대외적으로 칭신하고 화친하거나 공물을 바친 사례가 있다. 한나라초기에 군사적으로 흉노와 대적할 수 없을 때, 한고조 유방때부터 흉노와는 화친을 통하여 전쟁을 피했다(이는 우회적인 조공이었다). 화친정책은 한문제,한경제를 거쳐, 한무제가 즉위한지 10년이 지나서야 폐지된다. 당고조 이연 및 당태종 이세민은 돌궐에 칭신하면서 제업을 일구었다; 당숙종은 안록산으로부터 경도를 수복하기 위하여 회흘에 병력을 빌리면서, 회흘과 성을 함락시키면, 토지와 사대부, 백성은 모두 당나라에 귀속하고, , 비단, 여자는 모조리 회흘에 귀속한다는 치욕적인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석경당이 추악한 명성을 후세에 널리 남게 된 것은 후진이 단명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기록을 남기면서, ‘기술적으로 처리를 통하여 역사의 진상을 가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연운십육주를 할양한 악영향은 후대에 너무나 크게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후 최소한 4백년간은 중원왕조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러다보니 후세인들이 모두 이 일을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운십육주는 유(, 지금의 북경), (, 지금의 천진 계현), (, 지금의 하북성 하간), (涿, 지금의 하북성 탁주). (, 지금의 하북성 임구), (, 지금의 하북성 밀운), (, 지금의 북경시 순의), (, 지금의 하북성 탁록), (, 지금의 관청댐수몰지역), (, 지금의 북경시 연경), (, 지금의 하북성 선화), (, 지금의 산서성 대동), (, 지금의 산서성 응현), (, 지금의 산서성 삭현동북), (, 지금의 산서성 삭현), (, 지금의 하북성 울현)이다. 전체지역은 동서로 약 600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200킬로미터에 달하며, 한반도크기 정도이다.

 

지도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16주는 동서로 지금의 천진, 북경, 하북성 북부, 산서성북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모두 장성의 남쪽(안쪽)에 해당한다. , 장성이라는 군사방어선의 배후의 중요한 거점들인 것이다. 그중, 영주, 막주의 2개는 이미 하북성의 남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 험준한 산세의 지역을 잃으면서, 중원왕조는 전체 북방에서 오랑캐의 철기를 공격할만한 천연적인 군사방어벽이 사라지게 된다. 남으로 천리를 남하해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이 없다. 황하에 이르기까지는 말로 평원을 죽 달리면 된다. 중원은 이때부터 대문을 활짝 열어준 셈이 된다.

 

이후 사백년간, 중원왕조에 있어서, 연운십육주의 수복은 가장 중요한 꿈이 된다. 959, 주세종 시영은 강력한 후주의 대군을 이끌고 연운십육주를 공격한다. 1개월여의 시간을 들여 영주, 막주, 역주(易州) 3주와 익진(益津, 지금의 하북성 문안성), 와교(瓦橋, 지금의 하북성 웅현 경내), 어구(淤口, 지금의 하북성 패현 경내) 3, 합계 17개혀의 땅을 되찾는다. 이는 오대이래 중원의 요나라에 대한 전투에서 최대의 승리로 기록된다. 아쉽게도 시영이 이때 돌연 병에 걸려, 얼마후 병사하고 만다. 연운십육주를 수복하려는 꿈은 중도에 그만두게 된다.

 

송태조 조광윤이 재위하고 있을 때, ‘내고(內庫)’를 두었는데, ‘봉장고()’라고 불렀다. 그 기능은 매년의 재정수입중 일정비율의 남겨서 적립해두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오백만 민()에 이르렀을 때, 거란으로부터 연운십육주를 사오려는 것이다. 만일 거란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돈을 전쟁경비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십사 견()으로 거란병사의 수급 1개를 샀다. 그들의 정예병사는 10만에 불과하다. 비용이라고 해야 이백만 견이면 그들은 모두 없앨 수 있다.” 아쉽게도 송태조는 만오십세가 되었을 때 급사한다. 그의 웅대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나중에 송태종 조광의가 북한(北漢)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두번이나 거란을 정벌하려 했으나, 참패로 끝나고 만다. 송나라제국의 무력으로 연운십육주를 수복하려는 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끝난다. 이때부터, 송나라의 군신들 사이에서는 공요(恐遼)’심리(나중에는 공금심리)가 생겨난다. 이런 심리적 콤플렉스는 송나라멸망때까지 지속된다.

 

사고의 방향을 바꾸어 보면 분명해진다: 북방의 정권은 연운십육주를 얻은 후, 한편으로 중원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군사적인 이점을 확보했고, 다른 한편으로 연운십육주의 농경경제와 북방의 유목경제가 서로 보완작용을 하여, 북방제국은 전체적인 사회발전을 크게 이루게 되고, 중원왕조의 강력한 적수가 된다.

 

연운십육주는 명나라가 건립되고서야 비로소 중원국가의 판도로 다시 돌아온다. 석경당의 악명은 아마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환원하려면 상유한(桑維翰)’이라는 인물을 기억해야 하다. 그는 석경당의 부하인 모사였다. 그가 바로 연운십육주 할양의 아이디어를 제출한 인물이다. 사실 당시에 거란의 출병을 위해서는 그저 돈과 재물을 좀더 많이 보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