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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마작(麻雀)이 나오기 전에 중국인들은 무슨 놀이를 즐겼는가?

by 중은우시 2018. 3. 22.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투호(投壺)


춘추전국시대는 제후들이 쟁패하던 시기이고, 말타고 활쏘는 무사정신이 숭상되었다. 그래서 사술(射術)을 겨루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투호가 인기있던 놀이가 된다. 투호의 최초기원은 예의(禮儀)이다. 정현(鄭玄)이 주석을 단 <예기정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투호라는 것은 주인과 손님이 즐기면서 재예(才藝)를 논하는 예(禮)이다" 당시 성인남자들은 활을 잘 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고, 제후들이 만나면 왕왕 손님을 모셔서 활쏘기를 했다. 그러나, 어떤 손님은 활을 쏠 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화살을 주호(酒壺)에 던지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리하여, 투호는 점점 연회의 게임이 되었다. 투호를 할 때, 주인과 손님이 마주하고 주호를 용기로 하여, 사람과 주호의 거리를 몇 척 떨어지게 한 다음, 화살촉을 뽑은 화살을 던져서 주호에 들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좌구명의 <좌전.소공12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소공이 즉위할 때, 주왕실과 제후들이 와서 축하했다. 진소공은 제경공과 투호로 겨루었는데, 두 사람은 투호를 하는 과정에서 설전을 벌여 누가 제후중 우두머리인지를 다툰다. 결과는 서로 기분나쁘게 헤어진다. 이를 보면 궁중의 게임은 때때로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정치이기도 하다.


수계(修禊)


문인들은 체력을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들은 우아한 것을 좋아하며 우회곡절(迂回曲折), 만묘완전(曼妙婉轉)한 오락활동을 좋아한다. 그래서 시정화의(詩情畵意)가 있는 수계가 나타난다. 수계는 원래 화를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음력3월초, 사람들이 모여서 물가에서 놀면서 재해를 몰아내고 복을 기원했다. 나중에 수계는 문인들의 우아한 모임으로 변모하는데, 특히 위진(魏晋)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진 뎡화9년(353년) 삼월삼일, 왕희지와 당시의 명사 손작(孫綽), 사안(謝安)등 40여명은 회계군(지금의 소흥) 난정(蘭亭)에 모여서 수계를 한다. 명사들이 구불구불한 계곡물 가에 앉고, 술잔을 계곳물에 놓아두어서 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게 한다. 술잔이 머무는 자리에 앉은 사람은 시를 지어야 한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3잔 마신다. 이것이 수계에서의 놀이인데, 유상곡수(流觴曲水)라고 부른다. 이때 사람들이 창작한 37수의 시를 모아서 <난정시집>을 만들어 당시에 크게 인기를 끈다. 왕희지는 이번 성회를 길어서 <난정집서>를 쓴다. 중국문학사와 서예사의 절세보물이 된다.


축국(蹴鞠)


당송(唐宋)때 가장 유행한 오락활동은 아마도 축국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축국이 유행하면서, 국(鞠, 즉 공)의 모양도 계속 발전한다. 문헌에 기록된 것으로 봄ㄴ, 당시에 이미 공기를 넣은 공이 과거에 털을 채워넣은 공을 대체한다. 모유(毛維)의 시에서는 "축국루과비조상(蹴鞠屢過飛鳥上), 추천경출수양리(秋韆竟出垂楊裏)"라고 하였고, 두보(杜甫)도 "십년축국장추원(十年蹴鞠將雛遠), 만리추천십속동(萬里秋韆習俗同)"이라고 했다. 이를 보면 축국이 얼마나 인기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는 오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때 고구(高俅)는 축국을 잘해서 일약 성공가도를 달린다. 왕명청의 <휘진록>에 따르면, 고구는 부마도위 왕선(王詵)의 하급관리였는데, 한번은 왕선이 고구로 하여금 단왕부(端王府)에 물건을 가져가게 했다. 마침 단왕이 축국을 하고 있었는데, 단왕이 조구에게 같이 하자고 한다. 고구는 축국의 고수여서, 공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았다. 단왕은 그의 축국솜씨에 감탄한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심복으로 삼는다. 나중에 단왕이 황위를 이어받아 송휘종이 되고, 고구는 일약 관직을 받아 나중에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른다.


투계(鬪鷄), 투실솔(鬪蟋蟀)


명청(明淸)시기에는 투계(닭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인 투계사(鬪鷄社)가 나타난다. 장대(張岱)의 <도암몽억>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천계 임술연간에 투계를 좋아했고, 닭싸움을 하는 조직이 용산(龍山) 아래에 있었다. 명선종 주첨기는 어려서부터 귀뚜라미싸움(鬪蟋蟀)을 좋아했다. 즉위후에는 귀뚜라미를 모은 것을 정치적인 임무로 하달했으며 백성들은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를 "실솔천자"라고 욕한다. 청나라는 무력으로 한족을 정복하였으므로, 상무정신을 전승하는 것이 통치자에게는 주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강희제는 열하에 목란위장을 만들어, 연무대회, 열병식을 거행했는데, 융중하고 열렬했다. 단지 중원에 들어온 유목민족은 결국은 한족문화에 동화되고, 이들 왕공귀족들도 결국은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말타기와 활쏘기를 버리고 금기서화에 심취한다. 사냥은 점점 형식으로만 남고 오락으로 변한다.


당연히 천년을 이어온 놀이는 이것들 만이 아니다. 동시에 게임은 비록 정치와 이익에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통백성들도 참여할 수 있는 몸을 건강하게 하거나 쉬는 활동이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게임은 사람들의 건강한 몸과 즐거운 마음을 가져다 주었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