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1116년, 송, 요, 금, 고려.....동북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중은우시 2018. 7. 31. 18:50

글: 추원(秋原)


1107년 고려의 주전파중신 윤관(尹瓘)은 여진을 공격하여 한때 승리를 거둔다. 전쟁후, 고려는 한반도의 동북부의 새로 차지한 토지에 9개의 성을 건설한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인 함주(咸州)에 대도독부를 설치한다. 이를 통해 새로 점령한 지역의 군사통치를 강화한다. 아래 그림은 고려인이 그린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이다.


그림의 내용은 고려가 공험진정계비(公嶮鎭定界碑)를 세우는 장면이다. 이 땅에 대하여 주권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2년후, 고려는 여진과 화의하면서 9개성의 땅을 돌려준다.


12세기초, 금(金), 요(遼)의 전쟁소식을 들은 북송(北宋)의 고위층은 금나라정권에 연락하여, 공동으로 요나라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련의 외교활동을 벌인다. 역사에서 말하는 "해상지맹(海上之盟)"이다. 이때, 요나라가 북방을 차지하고 있어 길을 막고 있으므로, 송,금간에는 육로로 연결이 되지 않았따. 송나라사신은 할 수 없이 바다길로 북상하는 방식으로 금나라와 연락했다. 그러다보니 가는 길이 힘들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은 해상지맹이 성사되기 전에, 북송이 일찌기 번속국인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었다는 것이다. 고려로부터 '길을 빌리거나(借路)', '연락(通款)'의 도움을 받아 송과 금이 맹약을 맺는데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북송 정화6년(1116년) 칠월, 변량성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뜨거운 태양이 지상의 것들을 구울 듯이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인 이자량(李資諒)에게 있어서 바깥의 더위보다는 눈앞의 식탁 위의 열기가 더더욱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이 식사는 범상치 않은 것이다. 주인은 대송의 황제 송휘종 조길이다. 그리고 문무중신들이 옆에 있었다. 이 연회는 "녹명연(鹿鳴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연회에서 승당악 <시경.녹명>을 연주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송때, 조당의 궁중연회로 승격된 녹명연은 전시에 문무양방의 장원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이다. 이 해이전에 송휘종의 집정기간동안 확실히 녹명연을 열었다고 기록된 적은 딱 2번이 있었다. 이전의 북송역사상, 이런 규격으로 외국의 사절을 접대한 선례는 없다. 하물며, 한반도에 있는 고려국은 10세기부터 장기간 중원왕조에 칭신하며 조공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자량은 단지 고려의 "사은사(謝恩使)"일 뿐이다. 그런데, 대송황제가 베푸는 녹명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정말 파격적인 대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자량은 황공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가 이번에 북송에 온 목적은 듣기로는 우아하기 그지없지만,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몇년전 송휘종이 사람을 몰아서 전왕조부터 내려온 궁정아악을 새로 정리해서 신악(新樂)을 제정한다. 그리고 <대성아악(大晟雅樂)>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당시 대송에 가장 열심이었던 고려국에 하사한다. 이자량이 이번에 온 것은 바로 고려의 예종을 대표하여, 북송의 동경 변량으로 와서 송휘종에게 감사인사를 하기 위함이다.


이자량은 훈구귀족인 인천이씨출신이다. 이 가족은 당나라때 신라왕국의 견당사였다. 이씨는 당나라황제가 하사한 성이다. 몇세기동안, 가족내에는 외교, 정치인원이 계속하여 나왔고, 이자량은 고려예종때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총신 이자겸(李資謙)의 동생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량은 비록 형부시랑 추밀원지주사라는 직위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재능은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는 뛰어났다. 그는 한학(漢學)에 정통해서, 중국어가 유창했다. 그는 말을 잘할 뿐아니라 윗사람의 뜻에 잘 맞추었다. 시사가부, 음악회화, 체육분야에 뛰어나서 송휘종과는 취미가 일치했다.


변량의 조정에서 이자량은 극력 송휘종을 칭송했고, 송휘종은 만족해서 웃음을 멈추지 모했다. 송휘종은 기분이 좋아져서 그로 하여금 시로 "화답"하도록 요구한다. 이자량은 그 자리에서 <대송예모전어연응제(大宋睿謀殿御宴應製)> 시 한수를 짓는다:


녹명가연회현량(鹿鳴佳宴會賢良), 선악양양출동방(仙樂洋洋出洞房)

천상사화두상염(天上賜花頭上艶), 반중선귤수중향(盤中宣橘袖中香)

황하재보천년서(黃河再報千年瑞), 녹서경부만수상(綠醑輕浮萬壽觴)

금일배신참성제(今日陪臣參盛際), 원가천보영무망(願歌天保永無忘)


시의 글자에서는 아첨하는 내용이 충만했다. 송휘종은 중국황제중에서 문화수양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그의 감상수준으로는 이런 시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휘종의 당시 반응은 "대거 칭찬"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자량 본인 조차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북송의 군신이 고려사신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대한 것은 바로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 <고려사 열전>제8권에는 녹명연이 끝난 후, 송휘종과 이자량간의 밀담을 기록하고 있다.


"송휘종이 대거 칭찬했다. 돌아가려고 할 때, 밀유(密諭)를 내려 말하기를: '듣기로 너희 나라와 여진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 찾아올 때는 몇 명을 데려와도 된다."


원래 송휘종이 일부러 이자량에게 저븐한 것은 고려를 통하여 멀리 북방에 있는 여진과 연락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돌연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이때 동경성안에 숨어 있던 요(遼)나라의 한 한인(漢人)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전해 삼월초, 북송은 웅주(雄州 지금의 하북 보정 웅현)의 지방관이 돌연 밀서를 하나 받는다. 서신은 특별히 밀납(蠟)으로 마든 원각안에 봉해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환(藥丸)처럼 보였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조량사(趙良嗣)인데, 원래 이름은 마식(馬植)이고 대대로 유연(幽燕)에 거주해온 요나라의 한인이었다. <삼조북맹회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서신에는 조랑사가 북송에 여진인 완안아골타가 거병하여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담았을 뿐아니라, 특별히 완전히 그 본인이 생각한 금과 연맹을 맺어 요나라를 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완안아골타는 1115년 금나라를 건립했다).


송나라조정의 고위층은 깜짝 놀란다. 이전의 100년간 송,요 두 나라는 대규모의 전쟁이 없었으므로, 북송이 비록 매년 요나라에 세폐를 보내기는 했지만, 석경당이 할양해준 유운십육주에 대하여는 여전히 수복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송휘종은 조양사의 방안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당시 득세하고 있던 권신 동관(童貫)과 채경(蔡京) 두 사람에게 논의해 보라고 맡긴다. 이 두명은 중국역사상 악명이 자자한 화국앙민(禍國殃民)의 간신이다. 둘이 논의한 후에 일치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유연을 수복할 시기가 되었다고 여기고 송휘종에게 보고한다. "조양사가 암흑에서 빠져나와 광명을 찾았으니 마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밀유를 보내어 만나자고 하는게 좋겠습니다." 이는 송휘종 본인의 뜻과 일치했다. 그리하여 즉시 명을 내려 요나라로 들어가, 조양사와 사월에 남으로 도망쳐 송으로 귀순하도록 약정한다.


그달 구일, 조양사는 야색을 틈타, 송,요간의 국경에 있는 강을 건너 성공적으로 웅주에 도착한다. 그를 맞이할 책임을 지고 있던 웅주지방관리는 즉시 병력을 보내어 그를 비밀리에 개봉까지 호송한다. 구일후, 그는 소리없이 변량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날 황제를 만난다. 


원(元)나라때 사람이 쓴 <송사>에는 <열전>에 조양사를 다루고 있는데 <간신전>에 넣었다. 거기에는 조양사가 황제를 만났을 때의 비분강해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라는 반드시 망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옛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고통을 생각하셔서 중국의 옛날 영토를 수복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토벌하시옵소서. 왕사가 일단 출동하면 반드시 백성들이 기뻐하며 맞이할 것입니다. 만일 여진이 뜻을 얻어 먼저 선제공격을 하면, 뒤에 공격하려면 이미 늦을 것입니다."


조얄사의 생각은 범상치 않았다. 게다가 말재주가 있었다. 그의 몇 마디 말에 송휘종은 얼굴이 활짝 편다. 기실 일찌기 송인종과 송신종 시기에 조정은 고려와 연합하여 요나라에 항거하는 전략을 세운 바 있다. 그리고 일부는 실현되기도 했다. 송신종의 11째아들로서 송휘종이 즉시 생각한 것은 바로 황부의 방식을 본받아, 현재의 고려와의 관계 외에 여진이 요에 항거하는 하늘이 내린 좋을 기회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만일 기회를 잡으면, 철저히 요나라라는 북방의 근심거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조양사의 정보는 송휘종의 마음을 건드렸고,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이 예술황제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송휘종은 아무런 공로도 없고 근본도 모르는 조양사를 "조청대부, 비서승, 위비각대조, 비황제고문"의 직위를 내린다. 그는 요나라의 배반자에서 대송의 총신이 된 것이다.


다만, 조양사가 북송에 가져온 것은 단지 엉성한 구상일 뿐이다. 구체적인 행동방안은 없었다. 그는 이전에 심지어 여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금나라와 연합한단 말인가. 어떤 형식과 경로를 통할 것인가? 이것은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이다. 이것은 모조리 북송이 생각해야 한다. 북송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형세에 대하여 믿을만한 적시의 정보통로도 없었다. 요동반도는 요나라의 동경도에 속하고, 요나라사람은 대송의 선박이 해안에 정박하는 것을 허용하고 아무런 저지도 없이 북상하여 금나라와 연락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북송이 바로 떠올린 것은 우호적인 인웃나라 고려였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그 일막이 벌어진 것이다. 조양사가 송나라에 온지 1년3개월후에, 휘종은 이자량을 환대하고, 그는 고려의 협조를 얻어, 금나라와 연락하고자 한다. 정치적 후각이 예민했던 이자량은 송휘종의 밀유를 받고, 즉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십년전에 이미 여진인에게 한번 피를 흘린 바 있는 고려로서는 분명히 억지로 밀려서 고압선을 건드리는 꼴이었다.


이자량은 송휘종의 면전에서 아부를 한 것은 그 개인의 성격적인 이유도 있지만, 기실 숨은 사정이 있었다. 6년전, 송나라사신은 일찌기 고려에게 요나라와 너무 가까지 지내서, 그동안 대송의 선제 신종황제이래 고려에 대한 고심을 배신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바 있다. 그리하여 고려 예종은 이자량으로 하여금 <대성아악>에 대한 감사인사를 한다는 핑계로 변량에 가서 해명을 하고, 북송의 양해를 받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송휘종의 한 마디는 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원래 요와 송 사이에 끼어있던 고려는 이제 다시 중간에 튀어나온 금나라까지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요,금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하에서 송나라수도에 와 있는 이자량으로서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난감하다고 여긴다.


이런 난감함의 근원은 바로 송, 요, 고려간의 미묘한 관계때문이다.


<송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960년, 조광윤이 북송을 건립하고, 고려는 즉각 사신을 보내어 조공한다. 그리고 본국에서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한다. 976년, 송태종 조광의가 천하통일의 창끝을 북으로 향하며 요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북송은 이때 고려와 요나라에 대한 군사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압록강 양안에 흩어져 있던 여진부락과도 긴밀히 연락한다. 여진인들이 말을 잘 기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필을 도입하기 위하여, 요동반도에서 바다로 산동에 이르는 해상밀수노선을 개척한다.


979년과 986년, 조광의는 요나라에 두번에 걸쳐 북벌전을 전개한다. 유운십육주를 빼앗아 오기 위함이다. 제2차북벌에서, 조광의는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교섭한다. 고려에 출병하여 협력해달라고. 그는 고려국왕에게 보낸 조유(詔諭)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 요나라를 멸할 좋은 기회이다. 기회는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려가 출병만 하겠다고 하면, 장래의 전리품은 모조리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송태종의 호기로움은 날개가 꺾이고 패전해버린다. 고려에서는 자신의 국가안전을 고려하여, 병력을 준비하는 모습만 보이는 것으로 북송의 요구에 대응하고, 실제로 출병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여전히 요나라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993년부터 1018년까지, 요나라는 세번에 걸쳐 고려정벌에 나선다. 그리하여 고려로 하여금 북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압박한다. 국력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고려는 요나라군대를 방비하기 위하여, 거금을 들여 한반도 북부에 천리장성을 쌓는다. 이를 북방 국경선으로 한 것이다. 그 후, 요나라군대가 압록강 연안의 여진부락을 토벌하며,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여진부락이 북송에 말을 판매하는 노선을 막아버린다.


개략 60년이 지나서, 송인종 조정(趙楨)이 등극한다. 이때 북송의 서북방에 있는 서하(西夏)의 효걸(梟桀) 이원호(李元昊)는 칭제하고 송과 반목한다. 연속으로 토벌하러 온 송나라군대를 물리친다. 요나라는 그 기회를 틈타 북송에 대한 군사압박을 시작한다. 와교관(瓦橋關) 남쪽의 10개현을 내놓으라고 한다(지금의 하북 보정 동쪽). 북송은 어쩔 수 없이 요나라와 담판을 벌여서, 최종적으로 전영지맹에서 규정한 세폐의 금액을 10만냥, 비단을 10만필 늘이는 것으로 합의한다. 하북에서 요나라를 상대하고, 서북에서 서하를 상대하느라고 양쪽 전선에서 대치하는 상태가 일어나 북송이 힘들 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압력을 나누어 짊어질 동맹국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요나라와의 담판을 책임지고 있던 중신 부필(富弼)은 상소를 올려 다시 고려와 연합할 것을 건의한다. 적당한 시기에 고려를 통해 여진과도 연락하여 요나라에 대항하고 견제하자는 것이다. 1067년 정월, 송신종 조욱(趙頊)이 즉위하며, 부필의 구상은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고려와 여진에 대한 '해상외교'를 시작한다. 다음 해, 조욱은 천주(泉州) 상인 황신(黃愼)을 보내 장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고려로 가게 하고, 비밀리에 황제의 칙서가 담긴 첩문(牒文)을 전달한다. 마침, 이때 재위하고 있던 고려 문종 왕휘(王徽)는 일찌감치 북송과 연락할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칙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금방 송나라에 회첩을 보내고, 송나라와 복교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둘 다 원하는 일이다보니 국교를 회복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고려는 북송에 다시 칭신하는 동시에 한 가지 '불합리'한 요구를 해온다. 공식문서에는 여전히 요나라를 정삭(正朔)으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요나라에 칭신납공하겠다는 것이다. 즉, "일번사이주(一藩事二主)"하겠다는 것이다.


고려는 북송과 복교하지만, 여전히 요나라에 칭신하고 공공연히 요나라 연호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주국인 대송의 체면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러나, 고려의 북방국경이 요나라와 접경해 있고, 오랫동안 군사적 위협을 받아온 점을 고려하면, 만일 요와 단교했을 때, 보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지나치게 요나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고려의 이런 요청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송신종은 고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조정의 일부 관리들과 북송의 문인사대부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속속 이것을 문제삼아 고려가 수서양단(首鼠兩端)하고 입장이 모호하다고 질책한다.


이런 반대의 목소리가 북송 내부에서는 계속하여 존재했을 뿐아니라, 그 목소리는 상당히 컸다. 고려측에서도 이런 정치적 공격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미안함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번 북송에 해명한다: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은 실로 어쩔 수 없어서이다. 북송에 칭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의를 최대한도로 표시하기 위하여, 고려는 북송에 대한 외교문서에서는 요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그냥 갑자기년을 썼다.


1078년, 송,고려 양국의 군신관계가 정식으로 달성된다. 겉으로 보기에 혁혁한 외교적 성과이다. 그리하여 북송내부에서는 반고려의 목소리가 잠시 잠잠해진다. 이때부터 고려는 두 나라를 섬기는 '등거리외교'를 했다. 송,요의 양대강국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평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추세를 보면 고려의 송과의 관계는 강화되고, 고려와 요와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12세기초, 고려 숙종이 북방의 여진과 전쟁을 시작한다. 이리하여 3자간의 외교평형이 무너지게 된다.


고려와 여진간의 갈나전(曷懶甸)전투는 1104년 고려가 압록강 양안의 여진부락에 공격을 감행하여 무력으로 북방국경을 갈나전까지 확장하고자 도모한다. 이번 전투에서 고려는 패배하고, 이전에 수십년간 축적해왔던 것을 모조리 잃고, 오히려 여진족에게는 굴기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북송은 이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천진하게 호랑이와 같은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나라에 항거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결국 금나라에 멸망당한 것이다.


<고려사.숙종>, <윤전>에는 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095년, 고려 문종의 셋째아들인 왕희(王熙)는 중신 윤화(尹和) 및 상장군 왕국모(王國髦등과 연합하여, 자신의 집안에 양성한 사병을 골간으로 궁중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여 고려 숙종이 된다. 숙종 본인은 사병출신인 척준경(拓俊京), 왕자지(王字之)등을 크게 신뢰했다. 척, 왕은 이로 인하여 고려의 소장파 무신이 되어, 윤화등 중신과 결탁하여, 점점 느슨하고, 확실한 정치적인 목표가 없이 그저 '충군', '효의', '존례'를 구호로 하는 조직인 당을 결성하게 된다.


숙종은 그저 수성지군(守成之君)으로 남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주관적으로 '전공'을 추구할 동기가 있었다. 당내부에도 특별히 전쟁을 통하여 공명을 얻으려는 갈망이 있었다. 이때의 고려정권은 건립된지 이미 200년이 가까웠고, 토지겸병등 사회갈등이 점점 첨예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외전쟁을 일으켜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 개척한 판도를 새로운 귀족들에게 나눠주어 권신들을 다독거려 정원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과거 일찌기 세번이나 고려에 침입하고 이제는 종주국이 된 요나라에 대하여는 왕희와 소장파무신들이 아무리 담량이 커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이제 북방의 여진이다. 그리하여, 고려군신은 여진에 대한 북정을 기획한다. 이를 통해 동북변경바깐의 갈라전지구(지금의 북한 동해안의 함흥평원)을 점령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때의 여진은 일찌감치 느슨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락이 아니었다. 북방의 송화강유역의 완안부(完顔部)는 굴기추세를 최소한 30녀년간 유지했다. 11세기말 마침내 여진부락연맹을 결성하고, 영향력을 한반도로 펼쳐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완안부의 남하와 고려의 북진은 바로 갈라전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한다.


1104년 정월, 자신의 군사실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던 고려는 17만군대를 결집하여, 북방천리장성을 넘어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32일후, 개성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숙종과 당은 나쁜 소식을 듣게 된다. 고려군대가 여진과 교전후에 바로 궤멸했다는 것이다. 약 7만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갈라전의 토지를 한치도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천리장성이내의 정주(定州), 선덕(宣德)의 주 중요도시까지 잃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려는 여러번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에게 호소한다. 고려와 여진 모두의 종주국인 요나라가 여진쪽에 압력을 가하거나 직접 전쟁국면에 관여하여달라고. 1109년 가을, 고려는 여진에 화의를 청한다. 그리하여 천리장성 이내의 여진은 물러나고, 갈라전지구는 완안부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의 오년동안 여진은 갈라전에서 상당히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고려의 북방변경은 장기간 여진의 군사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부득이 계속하여 요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이를 통해 다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므로, 1104년에서 1113년까지, 고려의 사신은 빈번하게 요나라로 가서 활동한다. 멀리 남방에 있는 대송은 고려를 도와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요와 고려의 관계가 밀접해진다. 송과 고려의 관계는 잠시 냉각된다. 송휘종 조길은 1100년 봄에 등극했고, 고려의 친요원송(親遼遠宋)정책은 북송내의 반고려 목소리가 수십년간 억눌려 있다가 다시 터져나오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때인 1105년 즉위한 고려예종 왕오(王俣)는 첫번째로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청한다. 그러나 북송에 대하여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는다. 이 거동은 북송의 고려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킨다.


1110년 육월, 북송은 사절단을 고려로 보낸다. 명목상으로는 송휘종의 고려예종에 대한 책봉조서를 읽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고려의 태도를 살피는 것이고, 주로 문책하기 위함이었다. 사절단의 정사(正使)는 왕양(王襄)이고, 부사는 바로 정강지변후 여진인들이 황제로 올린 그 '대초황제(大楚皇帝)' 장방창(張邦昌)이다. 고려는 마음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사절단을 경시하지 못한다. 특별히 고위관리를 보내어 대송사절단이 머무는 역관에서 배동(陪同)하게 한다. 장방창은 고려왕의 앞에서 밀유를 전한다. 당당하고 완곡하게 상대방에게 권유하기를 양국의 우호관계를 중시하고, 절대로 양국관계를 파괴시키는 일은 하지말라고 한다.


고려측에서는 즉시 송나라사신에게 해명하면서 양해를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사신을 변량으로 파견하여 대송황제를 알현하고, 면전에서 사죄드리겠다고 말한다. 권신 이자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동생 이자량이 그 임무를 맡도록 한다. 예종8년부터 이자량은 고려사신의 신분으로 여러번 송,요 두 나라를 오간다. 그중에는 정화6년에 송휘종과의 녹명연이 열린 것도 포함된다.


변량의 조정에서, 이자량은 고려의 원송근요(遠宋近遼)의 원인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고 언급하지 않는다. 송휘종과 그의 수하의 고관들은 아예 고려와 여진간에 있었던 갈라전전투를 알지 못했다. 쌍방이 현재 긴장된 관계도 알지 못했다. 단지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는 태도로부터, 이렇게 판단한다. 현지 고려인들에게 기회를 봐서 여진과 연락하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하고, 송,금의 동맹에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하면서 상당한 물자를 지원해서 보답하면, 고려가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송휘종이 "듣기로 너희 나라는 여진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하는데, 다음에 사신으로 올 때는 몇명을 데리고 같이 와라"라고 했을 때, 이자량은 노련하고 원활한 말솜씨로 단지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여진은 인면수심이고,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탐욕스럽고 추하니 상국(上國)과 통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마디로 송휘종의 요구를 거절한다.


북송과 금을 연결하는 교량이 되어 달라는 북송의 요구를 고려가 거절한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고려와 여진의 관계가 원래 좋지 않았다. 송나라사람에게 본국의 육로를 개방하여 여진지구로 가도록 허용하든, 여진사람이 한반도를 지나가도록 하든 모두 스스로 화를 부르른 짓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북송과 여진이 연맹을 맺도록 길을 열어주면, 쌍방간에 1세기간 중된 된 연락을 다시 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는 여진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다.


셋째, 북송이 고려에 다시 여진과 연락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찌기 송신종 원풍5년(1082)경 북송은 산동 등주를 기지로 하여 1세기전의 해상말교역로를 다시 열고자 했다. 이 계획에는 대송이 고려를 여진의 '대리인'이 되는 것을 승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고려가 마필수입의 중개인이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고려는 국가안전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리고 사적인 경제이익도 문제되었다. 송과 여진은 관방무역이 백년간 끊겨 있었지만, 경제교류가 중단된 적은 없다. 여진에서 나는 귀한 피혁과 북주(北珠)는 북송에서 진귀한 물건으로 여겨졌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리고 고려와 요나라는 중간의 무역중개를 통하여 이익을 얻어왔다. 만일 송과 여진이 직접 연락한다면, 고려의 이 돈버는 길은 막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고려가 비록 문화적으로 북송을 앙모하고, 경제와 무역에서 북송에 의존하여, 대송의 군신들 면전에서 공손하기 그지없는 속국신하의 자태를 보였지만, 국가안전이나 국가이익과 관련되는 일에는 여전히 본국이익을 우선하는 원칙을 견지했다. 소위 "대송이 명령만 내리면, 속국인 고려는 그대로 집행하고 희생도 감수한다"는 것은 그저 북송군신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아무런 근거없는 억측이었던 것이다.


송휘종이 이자량을 성대하게 접대한 정화6년(1116년)은 요나라의 천경(天慶)6년, 금나라의 수국(收國)2년이다. 그리고 한반도 고려예종11년이다. 바로 "기가환락기가수(幾家歡樂幾家愁)"라는 말처럼 각국은 서로 자신의 속셈을 굴리고 있었다.


지난 해 연말, 요나라 천조제는 구대를 일으켜 친히 여진정벌에 나선다. 그의 주력부대는 금군에 궤멸되고, 경내의 여진인과 발해인은 이 기회를 틈타 적극적으로 그들의 완안부 동족에 호응한다. 요동지구는 빈번하게 반란이 일어난다. 완안부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여, 아골타와 그의 당형제들은 요동에 대한 적극적인 진격을 계획한다.


한반도 중북부, 천리장성의 고려수비군은 발견했다. 이미 그들과 장성연안에서 10년이나 대치하고 있던 여진군대가 최근 1,2년간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요나라와의 전투에 가담하러 옮겨갔다. 고려의 군신이 북방변경의 군사압력이 마침내 약화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을 때인 이해 사월, 금나라는 돌연 사신을 왕경 개성으로 파견하여, 고려에 금나라의 황제 아골타의 뜻을 전한다: 아골타는 전혀 감추는 것이 없이 고려에게 권한다. 어떤 형식으로든 구종주국 요나라를 도우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하루빨리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어라. 고려내부는 아골타의 언사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소수의 소장파무신들은 더더구나 고려에 대해 고의로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쉽게도, 주변정권에 발생한 이런 일들을 송휘종은 물론이고, 동관, 채경같은 근신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지금은 대송과 고려의 외교관계에서 저조기라고 여기고, 고려가 망은부의했으며 대송의 은전을 배신했다고 여길 뿐이었다.


기실 만일 고려의 입장이었다면, 북송에 '비궁굴슬(卑躬屈膝)'하는 것이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니다.


고려는 비록 한반도에 치우쳐 있지만, 국가로 따지자면 오히려 북송보다도 40년이나 앞서서 건립되었다. 이점은 비록 실질적인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북송과 비교했을 때의 우세라고 보고 있었다.


고려는 건국시부터 국가의 민족독립 정통을 강조했다. 나중의 이씨조선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사대주의'를 행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후당부터 원나라까지 고려는 비록 여러번 속국이 되었지만, 국가자결을 강조했고, 상대방이 강박을 하든(요,금), 회유를 하든(북송) 고려는 그저 제한적으로 들었고,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더더구나 누구의 앞잡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근대에 북한의 김일성정권은 왕씨고려의 독립자주를 적극 선전하고, 이씨조선의 사대부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시 북송초기로 돌아가면, 송태종이 옹희북벌을 할 때, 요나라에게 대패했다. 이는 고려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나중에 요나라군대가 세번에 걸쳐 고려를 정벌했고, 고려가 하마터면 망할 뻔했지만, 중신 서희(徐熙)가 변량으로 가서 적극적으로 북송과 군사연맹을 재건할 것을 요구한다. 이미 투지를 잃은 송태종은 그저 몇 마디 미적지근한 말만 하고 서희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북송은 고려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고려의 군신은 이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덕행을 지닌 상국이라면 우리 고려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송의 풍후한 국력은 고려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송신종이 해상외교를 추진할 때, 목적은 '부(富)'였다. 1078년, 북송은 대규모이 외교사절단을 해로로 고려에 보낸다. 이를 위하여 두 척의 만석을 실을 수 있는 신주(神舟)를 만들고, 기진이보를 싣고서 고려에 하사할 준비를 한다. 이들 물품은 수량과 종류가 많아서, 기록한 예책만도 정(正), 별(別), 부(復)의 삼단(三單)이다. 고려는 위로는 국왕, 왕족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신료까지 모두 자신의 몫이 있었다.


그러나 북송은 그저 '부'만 보았지, '강(强)'은 보지 않았다. 고려군신의 눈에, 대송은 그저 부를 자랑하는 뚱뚱한 돼지일 뿐이다. 더 명확히 얘기하자면, 기댈 수가 없는 나리인 것이다. 자신의 실지조차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무슨 속국을 도와준단 말인가.


12세기초 금나라가 흥성해서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시국에서 고려는 바로 그런 상황을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십년전 여진과의 갈라전전투에서 비록 고려문종이 힘들게 삽십여년간 쌓아온 것을 거의 모조리 잃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여진인 굴기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차렸다. 그런데, 요나라와 송나라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북송과 고려가 막 복교했을 때, 거유인 증공(曾鞏)은 명주지주(明州知州)로 있었다. 그는 고려사절단을 영접하는 책임을 졌다. <명주의사고려송유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제가 생각하던데 고려는 오랑캐중에서는 문학을 알고 지식이 상당해서 덕으로 품어야지,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특별히 설명할 것은 북송관료사회의 정치파벌중에서 증공은 해상외교를 지지하는 신당집단이다. 반대태도를 지닌 구당인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신당내부의 고려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말해준다: 고려가 학문을 좋아하니 품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도 품으면서 여전히 '오랑캐'의 반열에 넣었다. 결국 문화소양이 있는 오랑캐라는 것이다.


이런 천조대국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북송고위층과 사회명류들 사이에 태생적인 것이다. 그들은 일단 문화를 얘기하면, 서적을 내리고, 궁정아악을 하사하고 여기에 필요한 경제적물질적 지원을 해주면 속국들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이자량은 고려로 돌아간 후, 고려예종과 군신은 북송에 대하여 여진완안부의 실력이 발전한 상황, 금요전쟁의 상황등 관련정보를 완전히 봉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북송이 구상한 금과의 동맹전략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1117년 금나라는 요동반도를 점령한다. 요나라의 한인 고약사(高藥師)는 일가족을 이끌고 배를 타고 피난가다가 중도에 길을 잃어, 산동 등주(지금의 산동 봉래)에 표류해 도착한다. 그는 북송에 요금전쟁의 최근 상황을 알려준다. 북송은 그제서야 사신을 파견한다. 고약사에게 안내를 맡기고, 다시 배를 타고 북상하여 마침내 요동에서 금나라군대와 만난다.


해상지맹은 억지로 이루어졌다. 이때는 조양사가 송휘종에게 연금공료(聯金攻遼)의 방책을 올린지 이미 2년여가 지난 때였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금나라는 일찌감치 가장 곤란한 시기를 넘겼고, 이제는 요나라로 전략적인 진격을 하는 때였다. 그들은 비록 북송의 결맹제의에 환영을 표시했지만, 대송에 있어서, 이는 이미 최적의 외교이익을 얻을 시기를 놓친 것이다.


이어진 일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1125년, 금나라는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야율연희(耶律延禧)를 생포하고, 이어서 북송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1127년 변랑으로 진입한다. 송휘종의 11째아들 조구를 제외한 북송황실의 모든 사람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다. 조구는 남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남송을 건립한다. 한반도의 고려는 금나라의 굴기를 목격하고, 요와 북송을 연이어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최종적으로 다시 남송과 단교하고 금나라에 칭신납공한다.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소한 고려는 일관되게 자기중심주의, 무실자보(務實自保)의 외교방침을 견지한다. 비극적인 일은 송휘종이 고려의 북송에 대한 진실된 생각을 몰랐다는 것이다. 정강지치를 겪은 남송조정도 여전히 혼자서 '국가의 소프트파워를 수출하여 우방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꿈 속을 헤맸다는 것이다. <송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건염원년(1127년), 남송이 호려(胡蠡), 유열(柳悅)등으 국신사(國信使)의 신분으로 파견하여, 여러번 고려로 향한다. 고려로부터 적국인 금나라의 정보를 캐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다음 해, 송고종 조구는 다시 절동로 마보군 총관 양응성에게 나서서 고려가 길을 빌려주어 '이제(二帝, 송휘종,송흠종)'를 모셔올 수 있겠는지 상의한다. 이번에 양응성은 고려로부터 직접적인 거절을 당했을 뿐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가차없는 모욕까지 당하게 된다: "두황제가 연운에 잡혀 있고, 귀국이 영토를 다 가져다 바쳐도 반드시 돌려받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데, 왜 군사를 길러서 싸우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우방에 기대하기 보다는 스스로 군사력을 길러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