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도사(魔都師)
양송역사에는 후세에 욕을 얻어먹는 국책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폐"를 바치고 평화를 얻은 것이다. 일찌기 요나라와 격전을 벌이다가 나중에 <전연지맹>을 체결한다. 나중에는 서하와 악전고투하다가 마지막에는 "세폐"를 주고 서하로부터 칭신을 받아낸다. 이것은 돈으로 체면을 산 것과 다름이 없다. 나중에 금나라에 의하여 반벽강산을 빼앗기고, 분명히 전쟁터에서는 유리한데도, 다시 "세폐"를 주고 칭신한다. 이것은 분명히 돈까지 주면서 남의 조카가 된 꼴이다. 이처럼 "돈을 줄 지언정 싸우지는 않겠다"는 방식은 확실히 "약송(弱宋)"이라는 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발한 정책이 당시는 물론이고 후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해주고 있다. 하나의 유행하는 관점은 이렇다: 양송이 "부송(富宋)"이 된 것은 조정에 돈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위 "세폐"는 아주 가볍게 지급할 수 있는 돈이었다. 싸우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돈을 들여서 평화를 사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겉으로 볼 때 굴욕적인 '세폐'가 북송에 있어서는 정말 '부담이 아주 가벼운' 것이었을까?
많은 북송의 중신들 말을 빌리자면, 아주 가벼웠던 것같다. 예를 들어 <전연지맹>에서 지급할 세폐는 매년 견이십만필, 은십만냥이다. 겉으로 볼 때는 천문학적 숫자인데, 당시 재상 왕단(王旦)의 계산으로는 "병력을 유지하는 비용에 비하면 100분의 1에도 못미친다"
사실상, 송나라 조정에서 대신의 눈에, 주전파이건 주화파이건 불문하고, "세폐가 가볍다"는 것에 대하여는 컨센서스가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나중에 송인종연간에 요나라가 신의를 어기고 전쟁위협을 가할 때, 요나라로 달려가서 협상을 했던 송나라대신 부필은 "차라리 돈을 더 줄지언정 전쟁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세폐"를 매년 견삼십만필, 은이십만냥으로 늘였고, 맹서에 매년 송나라에서 요나라에 "하사"한다는 문구를 "지급한다"는 문구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 굴욕의 정도는 부필이 협상시에 비분강개하여 다툰 말과 같다: 어찌 형이 동생에게 바친단 말이냐. 그러나 아무리 굴욕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역시 송인종의 지시대로 이를 악물고 맹약을 체결했다.
이 차라리 굴욕을 당하더라도 돈을 주겠다는 역사는 후세인들에게 이런 인상을 남겼다: 세폐를 지급하는데, 송나라조정에 정말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을까?
심지어 <전영지맹>때 송진종은 협상내용을 듣고는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것도 "세폐가 가볍다"는 하나의 방증이다. 처음에 송진종은 매년 삼백만의 "세폐"인 줄알고 깜짝 놀랐다가 나중에 확인해보니 "삼십만"인 것을 알고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협상을 책임졌던 송나라대신 조이용(曹利用)에게 중상을 내린다. 황제의 눈에 이 거래는 부담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같다.
다만, 민간의 질곡을 잘 알고 있는 남송의 문학가 주밀(周密)은 이러한 "세폐가 아주 가볍다는 논리"에 대하여 분노한다. "누가 세폐의 부담이 무겁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주밀의 <무림구사(武林舊事)>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강남은 매년 세폐를 지급해야 했다. 그 세금을 모조리 써야하니, 어찌 백성들에게서 심하게 거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리가 많고 교란되어 인심이 멀어지고 원망이 쌓인다. 반란으로 망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겁지 않아보이는 세폐는 이미 백성들을 수탈하여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가벼웠단 말인가, 무거웠단 말인가?
기실 송진종 내지 왕단등 양송의 군신들이 세폐가 무겁지 않다고 한 것은 주로 장부의 숫자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급하려면 대송의 비용은 이 '장부상의 숫자'보다 훨씬 중하다.
먼저, 지급방식을 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크지 않다. 그러나 요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은 경화(硬貨)이다. 대송의 동전, 철전, 지폐, 양식은 안되고, 오로지 대송의 백은(白銀)과 견(絹)만 받았다. 그러나 대송의 백은의 생산량은 아주 적었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북송의 백은산지는 단지 계양(桂陽), 봉주(鳳州), 건주(建州)의 세 곳뿐이었다. 북송의 백은수입은 송인종 연간에 겨우 22만냥에도 미치지 못한다. 당시 '세폐'의 금액을 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북송의 매년 '은과(銀課)'를 모조리 요나라에 주는 것이다. 대송의 백성들이 힘들여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요나라를 위하여 은광에서 은을 채굴해주는 셈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백은이건 견이건 당시 주요산지가 남방지구였다. 요나라까지 보내려면, 천리먼길을 운송해야 했다. 운송비용만 하더라도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이 돈을 요나라는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북송은?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으로 떠넘긴다. 부패가 가중된 북송말기에 연도의 관리들은 거기에서 사적으로 이익을 챙겼다. 그리고 교묘한 명목으로 징수금액을 올려받았다. 백성의 부담은 당연히 매년 증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폐를 받는 것은 요나라 하나만이 아니다. 이어서 서하도 있었고, 나중에는 금나라도 있었다. 지급대상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이 무거운 부담은 가중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도 기실 안전감은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나라는 송진종 연간에 체결하고도 송진종 연간에 틈이 생기니 다시 빼앗아 간다. 그래서 안전감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송은 계속하여 모병숫자를 늘여야 했다. 송태조때 금군은 겨우 20만이었는데, 송인종때는 120만에 달한다. 맞으면 맞을수록 더 많은 돈을 보내고, 더 많은 돈을 보내면 보낼수록, 더 많은 병사를 모집했다. 이렇게 악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이같은 악순환에 <송사>에는 이런 저명한 문구가 나오게 된다: "인종지세(仁宗之世), 거란증폐(契丹增幣), 하국증사(夏國增賜), 양병서추(養兵西陲), 비루백만(費累百萬)" 대송의 세폐가 경하다고? 송인종이 그렇게 느꼈을까?
바로 이런 무거운 재정부담때문에, 송신종연간에 왕안석의 개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간의 부국강병은 있었지만, 그 후에 끊임없는 당쟁으로 결국 반벽강산을 잃게 되는 것이다.
북송의 산하가 '정강지치'에 빠지게 된 것의 전주는 '방랍의 난'이다. 이것은 결국 '세폐'때문에 일어난 난이다. 방랍이 기치를 들어 반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방랍이 분노하여 선언한 것은 바로, "서북 두 오랑캐에게 바치는 세폐가 백만이고, 조정 군대의 경비가 십만이다. 대부분 동남에서 가져간다." 그의 말에 많은 백성들이 호응한다. 매년 보내는 세폐는 바로 백성들이 내는 것이다. 백성들이 고통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다.
송왕조가 강남으로 물러난 후 계속하여 금나라에 세폐를 보내어 평화를 구한 후 백성의 부담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송고종이 악비를 억울하게 죽이고, "세폐로 평화를 바꾼" 20년동안, 남송대신 호전(胡銓)은 분노하여 비판한다: "진회가 승상으로 있던 이십년간,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개와 양애게 주었다. 지금까지도 관청의 창고에는 열흘 한달을 쓸 것도 남아있지 않다. 수천수만의 촌락이 쓸쓸해졌다." 세폐로 평화를 바꿨다고? 그저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이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래서, 남송말기 문학가 주밀의 그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인심이 멀어지고 원망이 쌓인다. 반란으로 망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송,원의 왕조교체를 경험한 이 문학가에게 있어서 이는 자신이 느낀 진솔한 말일 것이다.
이 "돈을 주고 평화를 구걸한" 세폐는 송나라에 번영을 가져다 주었는가? 반대로 계속하여 피를 흘리며 감염되는 상처만을 남겼다. 남송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치료해줄 약도 없게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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