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흉노는 기원전3세기, 몽골초원에 건립된 유목을 위주로 한 강대한 민족정권이다. 이들은 대막남북, 동북평원, 하투 및 황토고원을 400여년간 통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국역사와 세계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이렇게 수세기동안 활약한 흉노민족이지만 지금까지 이 민족이 남긴 자신의 문자로 쓴 여하한 전적이나 문헌 혹은 비각명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흉노인이 민족문자를 가졌었느냐의 문제는 사람들이 탐구하는 이슈가 되었고, 고금중외의 학자들은 여러가지 견해를 내놓고 있다.
흉노민족이 민족문자를 가졌느냐의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한쪽은 흉노는 문자가 없었다는 것인데, 사마천이 <사기.흉노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흉노는 문자가 없다. 말로서 약속한다." 어떤 사람은 흉노족이 한문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결론도 내렸다. 다른 한쪽은 흉노는 문자가 있었다고 한다. 몽골족의 저명한 사학자인 도극도(陶克濤) 선생은 그의 역작 <전향춘추(毡鄕春秋)-흉노편>에서 흉노에게는 자신의 문자를 가진 적이 있다는 몇 가지 정보를 열거한다. 몽골 사범대학 교수인 망 무린에 의하면 소위 '흉노고문자'라는 것은 흉노인이 몽골초원 대막남북의 암각화를 포함하여 고적묘장유물에 남긴 일종이 독특한 문자부호계통을 가리킨다고 한다. 현재 수집한 흉노문자의 주요 출처는 세 곳이다: 하나는 유럽이다. 헝가리,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지구, 불가리아지구등이다. 둘은 몽골국으로 아르산암 부근, 차간강지구, 투모스투산 암각화등이다. 셋은 중국경내이다. 흉노의 통치중심과 주요유목지구는 음산 남북, 하투지구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토지에 그들은 '흉노문자'유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망 무린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우리가 아직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중국 경내에서 출토된 흉노유물과 흉노문의 관련자료를 발굴, 고찰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알고 있는 자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일찌기 만년전에 미주로 이주한 인디안의 선주민들은 암석에 유산을 남겼다. 상징부호를. 아시아와 북유럽지구에서 발견된 씨족인기와 흉노문자부호 나아가 중국장강, 황하, 요하 이 세 강유역의 고고학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도기문과 비슷하다. 이로 보면, 그들간에 모종의 연원관계가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흉노문자의 연원을 탐구하고 몽고리아인종문화의 원류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찌기 사라진 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진 명각과 조각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망 무린은 이렇게 말한다: "실전된 죽은 문자를 해석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이 문자에 대한 평술, 소개류의 전적문헌기록이 있어야 한다. 둘째, 그의 자모표와 쓰는 규칙등 원시증거가 있어야 한다. 셋째, 일정한 수량의 당해문자로 쓴 문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형(形), 의(意), 의(義)의 3자가 결합되어야비로소 죽은 문자를 해석하는 문을 열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흉노문자 부호에 대하여 어느 것이 어느 음인지, 그것이 어떤 규칙으로 기록되었는지, 흉노어의 자료는 모두 실질적인 증빙이 없다. 이런 상황하에서 흉노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숙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천고의 수수께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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