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하왕조(夏王朝)는 존재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8. 2.

글: zhangzizhong1940


하왕조는 중국전통사서에 기록된 중원지구 최초의 세습제 왕조이다. 일반적으로 하왕조는 부락연맹형식의 국가라고 본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하, 상, 주의 3대는 모두 노예제 세습왕조였고, 군주와 제후가 나누어 다스렸다. 그리고 하왕조는 최초의 세습제 씨족봉건왕조였다. 하나라때의 문물중에는 일정수량의 청동기와 옥으로 만든 예기가 있다. 그 연대는 약 신석기시대말기, 청동기시대초기이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하왕조와 관련한 사료는 아주 부족하다. 그래서 역사상 하왕조가 존재했는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기.하본기>에 기록된 하왕조의 세계(世系)는 <사기.은본기>에 기재된 상왕조 세계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상왕조세계는 안양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 복사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사기.하본기>에 기록된 하왕조세계도 다수의 학자들은 믿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고고학자들은 안양은허, 정주상성등 상왕조의 물질문화유적지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인식하는 기초 위에서 하문화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수단으로 하왕조의 물질문화유산을 찾아서 하왕조 역사를 회복시켜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고대사학자들은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두 지역이 하나라사람들이 활동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는 하남성 서부의 숭산(嵩山) 부근의 등봉(登封), 우현(禹縣)과 낙양평원이고, 다른 하나는 산서성 남부의 분수(汾水) 하류지역이다. 왜냐하면 전설에서의 하왕조 도읍(都邑)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이 두 지역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1959년부터 "하허(夏墟)"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이리하여 하문화탐색의 서막이 열린다. 사십여년동안 예서(하넘서부), 진남(산서남부)에서는 일련의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작업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하문화탐색의 목표를 점점 좁혀갔다. 다수의 학자들은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유적지에 대하여 명명된 "이리두문화"(이리두유형과 동하풍(東下馮)유형으로 나뉜다)와 예서지구의 "용산문화(龍山文化)"를 하문화탐색의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하문화문제에 대하여 각종 견해를 내놓는다. 그러나 문자등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함에 따라, 학술계에서는 남아있는 하왕조문화에 대하여 아직 컨센서스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예서지구의 '용산문화'이건 '이리두문화'이건 모두 이미 상당히 풍부한 자료가 축적되었고, 최종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좋은 조건이 마련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송나라 선화 연간에 임치(臨淄)에서 춘추시대의 청동기 숙이종(叔夷鐘)이 출토되었다. 이 기물을 만든 숙이는 송목공의 후예이고,제령공때 제나라의 정경을 지냈다.


명문은 송나라때 사람 조업(祖業)에 따르면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극성당(隙成唐), 우엄재제소(又嚴在帝所), 부수천명(溥受天命), 산벌하사(刪伐夏司), 패궐영사(敗厥靈師), 이소신유보(以少臣惟輔), 함유구주(咸有九州), 처우지도(處禹之堵)..." 즉, 위무당당한 성탕(成湯)은 하늘을 경외하고 하늘의 명을 받아, 하나라를 토벌해서, 그 군대를 격패시키고, 소신의 보좌아래 구주의 땅을 차지하고 대우의 도성을 점거했다는 내용이다. 이 명문은 서주이래의 문헌에서 하와 은(상)이 전후로 승계된 두 개의 왕조이고, '은혁하명(殷革夏命)'했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하여 양주(서주,동주) 사적의 하왕조에 관한 기록에 대한 유력한 방증이다. 하왕조와 하,상의 왕조교체를 기록한 문헌사적에 서주의 것이 없으므로, 춘추시개의 동기인 숙이종은 '서주이래' 혹은 '양주사적의 하왕조기록에 관한 유력한 방증'이라고 하기 어렵다.


2002년, 세상에 나온 수공수(遂公盨)는 서주 중기의 것이다. 거기에는 "천명우부토(天命禹敷土), 타산준천(墮山浚川)"이라는 글자가 있다.


명문의 내용은 대우가 산을 깍고 강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홍수를 막고, 구주를 획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지의 토지조건에 따라 각자의 공헌을 규정하고, 홍수가 물러난 후에는 산으로 도망갔던 민중들이 하산하여 다시 평야에 정착했다. 민중에게 공로가 있어서, 대우는 민중의 왕이 되었다. 수공수의 발견은 대우치수의 문헌기록의 시기를 6,7백년 앞당길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대가 가장 빠른 가장 상세한 대우에 관한 믿을만한 문자기록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하(夏)'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다. 우는 마치 신으로 보이고 인간의 왕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명문은 하나라때의 '대우치수전설의 최초의 문물증거'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적지를 찾지 못한 것도 아니다.


여러 사료기재에 따르면, 하왕조의 도성인 짐심(斟鄩)의 위치는 개략 이락평원(伊洛平原)지역으로 본다. 낙양 이리두 유적지의 고고학적 발건은 바로 이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탄소14연대측정결과 이리두유적지의 절대연대는 약 기원전1900년가량이다. 하왕조때에 해당한다.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전의 역사이다. 총면적은 3.95평방키너이고, 그 안에는 궁전유적지가 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리두문화유적지가 바로 하왕조의 도성인 짐심의 소재지로 본다.


다만, 아직까지 이리두유적지가 하왕조의 도성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대로 보면, 그것은 확실히 하왕조시기의 문명유적지이다. 즉, 그것은 명확하게 증명한다. 문헌에 기록된 하왕조의 연대에 중원지구는 확실히 이미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고, 국가가 나타났다. 설사 이리두가 하왕조의 도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왕조 도성문명은 이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성적으로 고려하자면, 당시왕조의 명칭은 하라는 것을 확정할 수 있다. 혹은 잠시 이 점을 확정할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것을 하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예를 들어 '중국제일왕조'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본질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