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산해경(山海經)>은 누가 지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25.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춘추시기, 제후들이 쟁패하는 동탕(動蕩)의 시대였다. 기원전520년, 주경왕(周景王)은 왕실의 후계문제를 정리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리하여 왕자들간의 피비린내나는 다툼이 벌어진다. 왕자맹(王子猛)이 귀족대신들의 옹립으로 주도왕(周悼王)에 오르나, 주경왕의 총애를 받던 왕자조(王子朝)는 그를 공격하여 죽여버리고, 스스로 왕이 된다. 4년후, 진(晋)나라가 왕자조를 공격하고, 왕자개(王子匄)를 옹립하여 주경왕(周敬王)이 된다. 왕자조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대량의 주왕실 전적(典籍)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가 초(楚)나라로 간다. 수행자는 소(召), 모(毛), 윤(尹), 남궁(南宮)의 4대귀족외에 주왕실 도서자료관의 관리와 학자(예를 들어 老子도 아마 관직을 사임하고 동행했을 것이다)들이 있다. <좌전,소공26년>에 이렇게 기록한다: "왕자조 및 소씨지족(召氏之族), 모백득(毛伯得), 윤씨고(尹氏固), 남궁효(南宮囂)는 주나라의 전적을 받들고 초나라로 갔다."


그의 수중에는 주나라왕권을 상징하는 전적이 있으므로 경성을 떠나기는 하지만, 왕자조는 여전히 자신이 정통성있는 주왕이라고 여긴다. 여러번 사자를 각 제후국에 파견하여 지지를 구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좌전.정공5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이 보낸 사람이 초에서 왕자조를 죽였다." 기원전505년, 주경왕은 사람을 보내어 왕자조를 암살한다. 누군가 이렇게 추측한다. 이 일은 아마도 주경왕이 주왕실의 추적하여 회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그리고 왕자조는 죽음을 무릎쓰고 전적을 내놓지 않았다고. 이때부터 이 무가지보인 전적은 신비롭게 사라진다. 그리하여 중국문화사상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왕자조는 도망칠 때, 상당히 충분한 준비를 한 것같다.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이며 중국선진사학회 회장인 송쩐하오(宋鎭豪)의 분석에 따르면, 왕자조가 받든 주왕실의 전적은 주로 서주의 문서와 상대(商代), 하대(夏代) 및 더 이전의 문헌전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가치가 엄청나고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문헌이라는 것이다. 왕자조는 패배한 후 남으로 도망치는데, 이는 원래 정치사건이다. 그러나 전적의 소실로 인하여 영향이 큰 문화사건이 되어 버렸다. 설사 오늘날의 사학연구에서도 이들 전적은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연구와 추진에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중국역사, 중화민족 심지어 전체 인류문명역사에 모두 아주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공자는 서적을 수집해서 주왕실에 보존하고자 했다. 자로(子路)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가 듣기로 주왕실의 사관 노담(老聃)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께서 서적을 수장하고 싶으시면 그의 의견을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자.천도>에는 이런 글이 있다: "주나라의 서적담당관리인 노담이라는 사람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서적을 구하고자, 가보았다." 아마도 노담의 면직은 주왕실의 전적이 소실된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이들 전적이 이렇게 중요한데, 왕자조와 그의 후예들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왕자조는 초나라로 가는 도중에 초평왕(楚平王)이 막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초나라도 마찬가지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남양(南陽) 서악(西鄂) 일대에 체류한다. 개략적인 위치는 오늘날 남양시 와룡구 석교진을 중심으로 하여, 방성현 박망진, 남양시 완성구 신점향과 압하공구 황로점진의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무가지보는 아마도 몇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일부분은 세상에 흘러나가 전해졌을 것이다. <역경(易經)>은 원래 주왕실의 비장전적이었다. 소위 공자가 오십에 <역경>을 읽었다는 것은 <역경>이 이미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때는 바로 왕자조가 초나라로 도망친 후 10여년이 지난 때였다. 아마도 공자는 수집한 상당한 수량의 주왕실 전적(필사본일 것이다)을 정리하여 <상서(尙書)>, <시경(詩經)>등을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서가 외부로 유출된 것은 객관적으로 제자백가의 학술이 번영하는 국면을 형성하게 해주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이미 왕자조가 어느 한 곳 혹은 여러 곳에 숨겨두었을 것이다. 후예들도 시종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마 조용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사실상, 고고학에서도 지금까지 주왕실의 원시자료문헌을 찾아내지 못했다. 상대, 하대 혹은 더욱 이른 시대의 문서원본도 찾아내지 못했다.


<여씨춘추.선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릇 나라가 망하면, 도를 가진 사람이 먼저 떠난다. 이는 고금이 같다....하왕조의 태사령 종고(終古)는 걸(桀)왕이 혹란한 것을 보고 도법(圖法)을 꺼내어 잡고서 통곡한다...태사령 종고는 상으로 도망친다. 은의 내사 향지(向摯)는 주(紂)왕이 날이갈수록 미혹에 빠져서 어지러운 것을 보고, 도법을 싣고 주나라도 망명한다. 진(晋)의 태사(太史) 도서(屠黍)는 진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진공이 교만하고 덕이 없는 것을 보자 도법을 가지고 주(周)로 귀순한다." 중국선진사학회 부회장이며 청화대학 교수인 류궈중(劉國忠)은 이렇게 말한다. "유도지국(有道之國)"은 오래된 문화전통이다. 이 기술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주왕실의 도서관에서 수장한 것은 하왕조, 상왕조의 도책문물이다. 중화문명은 다른 문명보다 더욱 완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동주이전의 역사, 황제, 염제, 요순우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 주왕실의 전적이 행방불명된 된 것은 중화문명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은 2500년동안, 아무도 이 무가지보의 행방을 추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일을 아무도 물어보지도 않는다. 왕자조가 "분초(奔楚, 초나라로 도망침)"하여 도착한 곳은 서악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황람. 총묘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조총(子朝塚)은 남양 서악현에 있다." 그는 사후에 이곳에 묻혔다. 왕자조의 무덤이 아직도 존재할까? 실종된 전적은 그와 함께 이 일대에 묻혀 있지는 않을까?


가랑비가 내리고 땅바닥은 진흙탕이 되어 있을 때, 필자는 와룡구 석교진 하장촌의 가장 동쪽으로 갔다. 일망무제의 보리밭은 연우(煙雨)에 덮여 있다. 약간 노란색깔을 띄는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다. 올해는 풍년이 될 것같다.


지세가 약간 높은 토지 위에, 수양버들이 곧게 서 있다. 마치 커다란 우산을 펼친 것처럼. 작은 나무숲에는 3간의 기와집이 흩어져 있다. 가운데의 한칸의 벽에는 "총강묘(塚崗廟)"라고 적혀 있었다. 남쪽에는 근 2미터 높이의 청석비(靑石碑)가 있는데, 글자가 또렷하다. 도광원년 이씨가족이 세운 것으로 "중수불현총묘비(重修不見塚廟碑)"이다. 중국선진사학회 고문이자 낙양대학 교수인 차이윈장(蔡運章)은 여기의 '견(見)"은 "현(現)"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비석에 글을 쓴 이는 아마도 출토된 기물에서 이미 묘장의 연대를 확인한 것인지, 이씨가족은 수백년동안 불현총을 주시해 왔고,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묘를 만들었다.


75세된 촌민 리광원(李廣文)은 한편으로 손가락으로 그으면서 한편으로 말한다. 원래의 무덤은 더 높고 더 컸다고 한다. 무덤 위의 봉토는 3층의 마름모꼴 대(臺)의 형태였다. 면적은 개략 2무(畝)이다. 묘의 바닥은 청석조(靑石條)였고, 묘문이 있는 곳에는 9개의 높고 큰 석비가 있었다. 묘건물은 웅장하여, 3칸의 전전(前殿)과 4칸의 후전(後殿)이 있었다. 그리고 250킬로그램이 나가는 큰 종도 있었다. 아쉽기도 이것들은 1970년대에 모두 훼손된다. 묘가 철거된 후, 주위의 백성들이 몰려들어 무덤 위의 백토분장(白土粉墻)을 가져갔다. 1980년대에 이르러 큰무덤은 이미 평지가 된다. 지금은 그저 주변의 밭보다 약간 높은 정도이다. 최근 들어 도굴꾼들은 불현총을 그냥 놔두지 않았고 여러번 도굴당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4년전, 도굴꾼이 근 4톤의 동정(銅錠)을 파냈는데,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그냥 폐구리로 팔아치웠다. 나중에, 다른 도굴꾼이 대정(大鼎)을 파냈는데, 누군가 공안에 신고했고, 정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른다. 2017년 10월, 현지학자는 무덤의 서남측 20미터지점에서 도굴꾼들이 흘리고간 흑색목탄조각 20여개를 발견한다. 무게는 80그램정도이다.


현지인 우쉐꾸이(武學貴)의 집에는 1966년에 출판된 옛지도가 있다. 서서히 펼치면서 손가락으로 가르키는데, 총강묘가 있는 곳은 약 8미터 높이였다. 주변의 마을은 모두 그것을 표지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묘강(廟崗), 묘저(廟底), 조장(晁莊), 대룡와(大龍窩)와 소룡와(小龍窩)등의 마을이 있다.


1904년판 <남양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왕자조의 묘는 서악 고성의 서쪽에 있다." 남양출신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교육자인 장자모우(張嘉謀)는 1927년 11월 27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의 남양현 북쪽 오십리 석교진 악성사는 서악 고성이다. 그 서쪽에 총강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고편종(古編鐘)을 얻었고, 색이 검고, 유(乳)가 있으며, 명문(銘文)은 없다." 그는 '불현총'이 바로 왕자조의 무덤으로 추정했다.


2017년 5월, 남양시 압하공구에서 문화재부문을 초청하여 이 일대에 대한 문화재일제조사를 요청한다. 3개월의 탐사를 거쳐, 놀라온 소식이 전해진다. "불현총"은 동주시기 대형 '갑(甲)"자형 수혈토갱묘라는 것이다. 총길이가 66미터, 묘실의 길이가 40미터, 너비가 38미터, 깊이가 18미터, 묘실의 사방은 게단식의 대계(臺階)가 있고, 서쪽에는 길이 70미터, 너비 7.5미터의 대형 차마갱(車馬坑)이 배장갱으로 있다. 주위에는 여러 대형 묘가 있다. 이 차마갱은 하남성이 ㅈ금까지 발견한 최대규모의 차마갱이다. 낙양 동주의 '천자가륙(天子駕六)' 차마갱보다도 28미터가 더 길다. 2017년 11월, 중국과기대학 과기고고실험실은 묘안에서 나온 흑색석탄조각에 대하여 탄소14검사를 해본 결과, 유적지의 연대범위는 전국시대이고, 더 앞당길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화재고고전문가는 수수께끼의 해답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 이렇게 하여 현지인들의 회고(懷古) 열정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촌민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고 있다. 계속하여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다시는 도굴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차이윈장은 이렇게 말한다. 총강묘는 지금까지 남양분지에서 발견된 형제, 규모가 가장 큰 동주시대 최고등급의 묘이다. 현지조사, 문헌연구, 전설이야기등 여러 각도로 볼 때, 아마도 그렇게 찾아헤매던 왕자조의 묘일 것으로 본다. 정통 주나라천자의 배장이라면 당연히 구정(九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조는 서악에 거주하다가 돌연 피살되었으므로, 수행인원이 구정팔궤(九鼎八簋)는 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온 가장 진귀한 주왕실전적을 배장했을 수 있다고 본다.


왕자조가 죽은 후,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서 '조(朝)'와 음이 같은 '조(晁)'로 성을 고친다. 한나라이전에, 조씨는 남양의 망족이었다. 나중에 전란으로 점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 <사기.조착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씨는 남양에서 나왔다. 서악 조씨의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문화재고고부서에서는 압하공구에서 근 5만평방미터에 이르는 주나라촌락유적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조장유지(晁莊遺址).


2018년 4월, 중국선진사학회는 '중국선진사학회 왕자조분초기남양선진유지보호연구기지"를 설립하는데 동의한다. 고고학적 발견과 연구논증으로 아마 '분초'사건은 남양에서 백일하에 모습을 들어낼지도 모른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진보는 문화사상의 화려한 편장이다. 동시에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도 남겼다. 학자인 왕홍치(王紅旗)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기에 3대 문화수수께끼가 있는데, 바로 <산해경> 작자의 수수께끼, <도덕경>작자,대사상가 노자의 사관은세(辭官隱世)의 수수께끼, 주왕실도서자료전적실종의 수수게끼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이 3자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산해경>은 중국고대의 기서(奇書)이다. 그것은 신주대지(神州大地)의 산천면모를 기술하였을 뿐아니라, 많은 황당한 사물도 묘사하고 있다. 근대학자는 <산해경>의 작자는 아마도 춘추에서 진한까지의 초인(楚人), 주인(周人), 제인(齊人)일 것으로 본다. 또 어떤 사람은 고인도인, 고바빌로니아인, 고미주인이 <산해경> 혹은 그 중의 일부분을 저술했을 것이라고 본다.


중국의 고대사전문가 쉬쉬(徐旭) 선생은 <중국고대사의 전설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산해경.중차십일경>에 기록된 산 이름은 남양, 진평, 남소, 노산 및 부근 각현의 경내에 흩어져 있다." 이 범위는 대부분이 남양경내의 복우산(伏牛山) 남부이다. 다년간 <산해경>을 연구한 학자인 저우푸샹(周付詳)은 이렇게 분석한다. <산해경.중산경>은 초(楚)지역 산천과 초나라백성의 신화습속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산해경.서산경>은 주(周)의 산천과 화하의 신화습속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를 보면 편찬자는 동시에 양쪽 지방의 산천습속과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동주시기의 초와 주는 오랫동안 적으로 싸워왔고, 수시로 전투를 벌였다. 학문이 뛰어난 학자가 양쪽의 풍토인정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있다. 바로 왕자조 일행 혹은 그들의 후예이다. 그들중에서 원래의 주왕실 도서자료관에서 일한 관리, 학자나 태사라면 그 예외에 해당할 것이다.


왕홍치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왕자조는 전적을 가지고 초나라로 도망가는 중에 노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외적으로는 실화로 전적이 불에 탔다고 말하여, 사람들이 찾으러 오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서 암중으로 전적을 숨겨둔다. 노자는 아마도 전적을 숨겨두는 일에 관련되어 공개적 활동을 하기는 불편하여, 사직하고 은거하여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왕자조가 주왕실의 전적을 비장한 장소는 아마도 서악일 것이다. <산해경>이 쓰여진 것과 이 두 사건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홍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산해경>은 모종의 전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저술강령 내지는 편집방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관계가 밀접한 저술인원들이 있을 것이다. <산해경>에서는 자주 사언운구가 나온다. <도덕경>에도 자주 쓰인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렇게 의심한다. 사언운구는 상고의 사관(史官) 겸 무사(巫師)의 상용수사법이다. 동시에, <산해경>에 나오는 대량의 내용은 모두 주왕실 도서전적자료에서 나왔고, 거기에는 하, 상의 전책과 문물, 원방이국의 함장과 문서, 그리고 민간에서의 신화전설도 포함된다. 이들 자료를 다른 사람이라면 얻기가 어렵지만, 왕자조를 따라 초나라로 간 사관 혹은 그 후예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산해경>을 쓴다. 그리고 책안에 자신의 이상을 담는다: 사재사방(事在四方), 요재중앙(要在中央). 


초여름, 복우산 복지의 바오텐만(寶天曼)국가삼림공원의 수목은 울창하고, 계속은 구비구비 흐른다. 공기에는 약간의 습기가 느껴지고, 초목의 향기가 가운데 흐른다. 험준한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이 보이는데 주변의 산세는 험준하고 괴석이 난립해 앴다. 경외심이 저절로 솟아난다. 2500년전에 왕자조가 초나라로 가던 일행이 이곳을 지나갈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강산은 일어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망망한 밀림의 깊은 곳에는 또 덜마나 많은 아사고인들의 이합비환이 서려 있을까?


불현총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지, 정말 옛날의 그 전적들을 볼 수 있을지, 많은 수수께끼들이 여전히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