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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때는 이름을 숫자로 짓는 것이 유행했었다.

by 중은우시 2018. 2. 8.

글: 이개주(李開周)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다. 명태조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璋)이라고, 주원장의 부친은 주세진(朱世珍)이고, 주원장의 두 형은 큰 형이 주흥성(朱興盛), 둘째형이 주흥조(朱興祖이다.


원장, 세진, 흥성, 흥조는 모두 듣기 좋고 뜻도 좋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 후에 고친 것이다. 주세진의 본명은 주오사(朱五四)이다. 주흥성의 본명은 주중육(朱重六)이다. 주흥조의 본명은 주중칠(朱重七)이다. 주원장의 본명은 주중팔(朱重八)이다. 그들에게는 자형이 있는데 본명이 왕칠일(王七一)이다. 다시 앞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증조부는 본명이 주사구(朱四九)이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각각 주초일(朱初一), 주초이(朱初二), 주초오(朱初五), 주초십(朱初十)이다.


오사, 칠일, 사구는 모조리 숫자이다. 초일, 초이, 초오, 초십, 중육, 중칠, 중팔도 모두 숫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원장의 이 가족은 왜 이렇게 숫자를 이름으로 한 것일까?


청나라때의 학자인 유월(兪樾)은 그의 저작 <춘재당수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원나라는 이민족이 중국을 침략해서 주인이 되었다. 한족을 노예로 보아서, 한족 평민들이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주씨가족은 할 수 없이 숫자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유월의 자는 곡원(曲園)이고, 장태염(章太炎)의 스승이다. 학술분야에서 명성이 드높다. 그래서 그의 해석은 영향력이 컸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그대로 인용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명나라의 그런 일들>의 시작부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어린 주오사가 출생한지 한 달 후에 부모는 그를 위하여 이름을 지어준다. 주중팔.

이 이름은 주팔팔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소개해보겠다. 주중팔의 가족 이름은 아주 특징이 있다.

주중팔의 고조는 주백육

주중팔의 증조는 주사구

주중팔의 조부는 주초일

그의 부친은 우리가 이미 소개했다: 주오사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주씨집안이 무슨 숫자놀이를 해서가 아니라, 당시는 원나라였고, 일반잭성은 공부할 수도 관직에 오를 수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의 연령을 더하거나 출생한 날자로 명명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했을까? 원곡(元曲)이나 원나라사람들의 필기(筆記)를 보면, 한족 평민백성들이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다. <두아원>에 나오는 두아를 처로 취하고 시어하는 하층남자의 이름이 '장려아(張驢兒)'이다. <지정직기>에는 '왕덕아(王德兒)'라는 평민남자아이도 나온다. 내가 가지고 있는 <중국역사계약회편고석>이라는 책에는 원나라때 휘주농민이 체결한 몇 건의 토지매매문서가 있는데, 매도인은 각각 이문귀(李文貴), 이문총(李文聰), 이문성(李文成), 사지보(謝智甫), 사준민(謝俊民), 호정경(胡鼎卿), 오덕인(吳德仁)이다. 또 다른 분가문서는 휘주 기무년 강가원촌의 정씨성을 가진 농민 삼형제와 조카가 체결했는데, 삼형제의 이름은 각각 정안경(鄭安卿), 정영경(鄭榮卿), 정춘경(鄭椿卿)이고 조카의 이름은 정정방(鄭廷芳)이다.


이를 보면 한족평민도 원나라때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이름은 상당히 우아하기도 하다.


사실상 숫자를 이름으로 쓰는 것은 원나라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송나라때부터 자주 볼 수 있었다.


진관(秦觀) 진소유(秦少遊)는 북송시대의 유명한 사인(詞人)이다. 그의 아들은 진담(秦湛)이다. 손자는 진남옹(秦南翁)이다. 진남옹은 4명의 아들을 핳는데 이름이 각각 진소오(秦小五), 진소십(秦小十), 진십일(秦十一), 진이십(秦二十)이다.


그후 진소십은 다시 진념팔(陳念八, 28)을 낳고, 진념팔은 진삼십칠(秦三十七)을 낳고, 진삽십칠은 진세이(陳細二, 小二)를 낳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들은 아마도 <수호전>에 나오는 완씨삼웅(阮氏三雄)을 떠올릴 것이다. 맞다. 완씨삼웅은 각각 완소이(阮小二), 완소오(阮小五), 완소칠(阮小七)이라고 불리웠다.


지금 다시 송나라대의 판결문서회편인 <명공서판청명집>을 보자. 제14권에는 명교교도를 장형에 처하는 판결이 있는데, "축십이(祝十二), 십삼(十三), 구백사십(仇百四十)을 각각 장백대에 처한다." 제9권에는 다시 농민분쟁을 처리한 판결이 있는데; "구대이(丘大二), 왕삼일(王三一)을 여윤조(黎潤祖)와 같이 처리한다." 이 문서 제6권에는 토지분쟁을 처리한 판결이 있는데, "이웃이 증언하고, 심구이(沈九二)등이 진술하니 울타리는 심백이(沈百二)의 집기둥을 지나가는 것으로 한다."


축십이, 축십삼, 구백사십, 구대이, 왕삼일, 심구삼, 십백이. 이들은 송나라때 판결문에 나오는 이름이다. 모두 숫자로 이름을 지었다.


송나라는 이민족이 중국을 침략한 시기도 아니다. 송나라황제는 평민백성들에게 이름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숫자이름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대송의 민간에 이름을 짓는데 숫자로 짓는 유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유의 <노학안필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요즘 오(吳)지방의 사람들은 자제가 약간 자라면, 다른 사람들이 아명을 부르는 것을 원치 않고, 윗사람이라도 항제(行第)로 부른다." 즉 강남지역의 사내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아명을 직접 부르는 것을 듣기 싫어해서, 설사 그들의 윗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항열의 차례에 따라 그들을 부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성공하기 전에 그의 형제 몇 사람의 이름도 모두 항열의 차례였다.


유월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원나라때 숫자로 이름을 지은 것이 많은 것은 부모의 연령을 서로 더한 합이거나 혹은 출생할 때의 조부의 연령이라는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중팔은 바로 조부의 나이가 88세였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주원장이 출생한 그 해에 그이 조부는 나이가 88세였던 것이다. 이런 해석은 상식작인 착오가 있다. 앞에 얘기한 것처럼 주원장의 큰형은 주중육이고 둘째형은 주중칠인데, 만일 이런 이름들이 모두 조부의 연령과 관련있다면, 절대로 형세 3명이 출생할 때 조부가 마침 66세, 77세, 88세였을리는 없다.


합리적인 해석이라면 중팔의 '중(重)'은 '우일대(又一代)'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나 조부때의 항열순서에 이미 소육, 소칠, 소팔등의 이름이 나왔으면, 그의 자손대의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는 반드시 중육, 중칠, 중팔로 부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윗대의 사람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명공서판청명집>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조부에 진초사(陳初四)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친대의 넷째는 진재사(陳再四)라고 하고, 다시 손자대의 넷째는 진중사(陳重四)라고 했다. 그리고 증손자대의 넷째는 진증사(陳曾四)라고 지었다. 만일 유월의 해석대로라면, 초사, 재사, 중사, 증사같은 류의 이름에 대해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보충설명을 덧붙이기로 하자.


고애인들의 항열순서는 작은가정내부의 순서가 아니다. 전체가족안의 순서이다. 전술한 <명공서판청명집>에 나오는 '구백사십'같은 이름이 있는데, 한 평민백성이 아무리 번식능력이 좋더라도 140명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내부의 순서로는 절대로 140명에 달할 수가 없다. 다만 수천명에 이르는 대가족내에서라면 같은 대의 형제순서가 백명이 넘어서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송나라때의 대문호 소식(蘇軾)같은 경우에 그는 소순(蘇洵)의 둘째아들이다. 소식의 형인 소경선(蘇景先)은 불행히도 요절했다. 그는 이 소가정에서는 둘째이다. 소철(蘇轍)은 소순이 낳은 셋째아들이고 이 소가정에서는 셋째이다. 그러나 소씨집안은 미산(眉山)의 대가족이고, 소식과 소철은 전체 대가족에서 같은 대의 형제들 중에서 순서를 보면 소식이 구십이, 소철이 구십삼이다. 그래서, 소식은 섬서의 보계에서 관리로 있을 때, 경성인 개봉에 있던 소철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앞부분에 "구삼랑(九三郞)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소순이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소식의 이름은 '소구이(蘇九二)', 소철의 이름은 '소구삼(蘇九三)'이 되어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잘 알고 나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호한중 완씨삼웅의 이름이 왜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인지. 완소이 다음에 완소삼, 완소사로 되지 않고 완소오, 완소칠이 되었는지를. 왜냐하면 전체 대가정에서의 순서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에서의 순서가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당연히, 송나라때 영유아 중에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이럴 가능성도 있다: 완소이의 앞에 원래 완소을(阮小乙, 즉 小一. 즉 첫째에 해당한다. 낭자 연청이 연소을로 불린 것은 바로 그가 첫째였기 때문이다)이 있고, 뒤에 원래 완소삼, 완소사가 있었고, 그리고 완소오와 완소칠의 사이에 완소육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완소삼, 완소사, 완소육은 모두 요절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만 남은 것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