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양려화(楊麗華): 황후, 황태후를 거쳐 공주가 된 미녀

중은우시 2017. 12. 27. 21:43

글: 이자지(李子遲)


역사상 복을 타고난 여자들이 있다. 그녀들은 공주로 태어나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다가 나중에 황후, 황태후가 되어 황제를 모신다.  그런데, 한 여자는 먼저 태자비, 황후, 황태후를 지내고 다시 공주가 된다. '역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사상 유일하게 한 명이다. 그녀는 바로 북조(北朝)와 수(隋)나라 교체기에 살았던 양려화(561-609)이다. 중국고대에 3명의 "여화(麗華)"라고 불리는 미녀황후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다. 나머지 두 명은 음려화(陰麗華)와 장려화(張麗華)이다.


그녀는 당나라의 무측천과 유사하다. 무측천은 남편, 자신, 두 아들, 손자가 모두 황제였지만, 양려화는 부친, 남편, 동생, 아들(비록 친아들은 아니지만)이 모두 황제를 지낸다. 무측천은 공주가 아니었지만, 양려화는 공주였다. 양려화는 북주(北周)의 천원황후(天元皇后), 천원대황후(天元大皇后), 황태후(皇太后)를 지내고 수나라의 낙평공주(樂平公主)가 된다.


건덕2년(573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황태자 우문윤(宇文贇)을 대신 양견(楊堅)의 딸과 결혼시킨다. 이렇게 하여 아름다운 양려화는 황태자비(皇太子妃)가 된다.

선정원년(578년), 우문옹이 죽고, 우문윤이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북주의 선제(宣帝)이다. 같은 해, 우문윤은 양려화를 황후에 책봉한다.

대상원년(579년), 우문윤이 태자 우문천(宇文闡)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한다. 양려화는 천원황후가 된다. 같은 해 우문윤은 우문천의 생모인 주만월(朱滿月)을 천원제후(天元帝后)에 책봉한다; 나중에 천완제후 주만월은 천황후(天皇后)로 고쳐부르고, 비(妃)인 원락상(元樂尙)을 천우황후(天右皇后), 진월의(陳月儀)를 천좌황후(天左皇后)로 하여 양려화와 함께 4명의 황후를 둔다.

대상2년(580년), 우문윤은 영을 내려 모든 황후의 봉호에 "대(大)"자를 추가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양려화는 천원대황후, 주만월은 천대황후, 원락상은 천우대황후, 진월의는 천좌대황후가 된다. 그리고 다시 비 위지치번(尉遲熾繁을 천중대황후(天中大皇后)로 삼는다. 이렇게 양려화와 함께 황후가 5명이 된다. 양려화는 성격이 유순했고, 질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4명의 황후 및 후궁중의 구빈(九嬪), 시어(侍御)등이 모두 그녀를 존경했다. 우문윤은 말년에 혼용하고 포학하여 희노무상(喜怒無常)했다. 일찌기 아무런 이유없이 양려화를 질책하며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려화는 행동거지가 평안하고, 말투다 내도에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우문윤은 그리하여 크게 화를 내고 양려화에게 사죄를 내려 사약을 내린다. 양려화의 모친 독고가라(獨孤伽羅)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궁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위하여 사정한다. 머리를 땅에 박아 피가 날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양려화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같은 해 우문윤이 사망한다. 우문천은 양려화를 황태후에 봉하고 홍성궁(弘聖宮)에 거주하게 한다.

당초 우문윤이 병들었을 때, 양려화의 부친 양견으로 하여금 궁안으로 들어와서 모시게 한다. 우문윤의 병이 위독해지자, 내신 유방(劉昉), 정택(鄭澤)등은 그 기회를 틈타 가짜 성지로 양견으로 하여금 조정을 보좌하도록 임명한다. 양려화는 처음에는 이 일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황위를 이어받은 우문천이 나이가 어려, 대권이 다른 가족에게 넘어가게 되면 자신에게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고, 유방, 정택등이 이미 이 조서를 하달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뻐한다. 양려화는 나중에 부친 양견이 모반의 뜻을 가진 것을 알고 크게 불만을 갖는다. 말과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개황원년(581년), 양견이 외손자로부터 천하를 빼앗는다. 북주로부터 천하를 찬탈하고 수(隋)나라를 건립하고 수문제(隋文帝)가 된다. 양려화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더욱 큰 원한을 품는다. 수문제는 그녀를 질책할 수는 없었고 마음 속으로 그녀에 대하여 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개황육년(586년), 수문제는 양려화를 낙평공주에 봉한다. 나중에 수문제는 양려화의 개가를 논의하나 양려화가 결사반대하여 없던 일로 한다.

양혀와와 우문윤 사이에는 딸이 있었다. 우문아영(宇文娥英).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외조부인 수문제가 그녀를 위하여 사위를 뽑는 성지를 내린다. 황제의 명을 받아 홍성궁에는 사위가 되려는 귀족자제들이 매일 수백명 모였다. 양려화는 친히 장막에 앉아서 사위모집에 참가한 귀족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소개를 하게 하고, 기예를 시험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돌려보낸다. 유주총관 이숭(李崇)의 아들 이민(李敏)이 들어왔을 때 양려화는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사위로 삼는다.

이민은 1품의 우의(羽儀)를 받았는데, 이는 황제의 딸을 취하는 예와 같았다. 나중에 수문제의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때 양려화는 이민에게 말한다: "나는 천하를 황상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제 사위 하나 뿐이니,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주국(柱國)의 관직을 달라고 해야할 것이다. 황상이 만일 다른 관직을 내리려고 하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절대 하지 말라."

수문제를 알현할 때, 수문제는 친히 비파를 타면서, 이민에게 말한다. "현재 너에게 의동(儀同)의 직을 내리겠다." 이민이 응답하지 않자, 수문제가 말한다: "너는 만족하지 않는 것이냐? 그럼 너에게 개부(開府)를 내리겠다." 이민이 그래도 감사인사를 하지 않았다. 수문제가 말한다: "낙평공주는 나에게 큰 공을 세웠다. 내가 어찌 그녀의 사위에게 관직을 인색할 수 있겠는가? 너에게 주국의 직위를 내리겠다." 이민은 그제서야 수문제에게 감사인사를 한다. 수문제는 그리하여 용상에서 조서를 써서 이민을 주국에 임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그리고 그 관직을 가지고 황궁에서 일을 하게 한다.

대업5년(609년), 양려화는 동생 수양제 양광을 따라 장액(張掖)을 순행한다. 그때 하서(河西)에서 사망하니 향년 49세였다. 임종전에 수양제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나는 아들이 없다. 오로지 딸 하나 뿐이다. 나는 죽는게 겁나지 않으나 단지 딸과 사위가 걱정될 뿐이다. 나에게는 현재 식읍이 있는데, 이것을 이민에게 승계하도록 해달라" 수양제는 바로 그녀의 요청을 응락했다.

수양제는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명을 내려 누나인 양려화를 천원황제 우문윤과 정릉에 합장하도록 조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