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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지폐(紙幣)는 어떻게 남송을 흥하고 망하게 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8. 2. 5.

글: 천하전서(天下電書)





북송, 남송 가운데, 남송은 항상 문약(文弱)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기실 화폐제도에서 검토해볼만한 점이 있다. 남송은 대체적으로 북송의 제도를 그대로 승계하지만, 남송은 동남쪽의 일부 영토만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중심지가 남쪽으로 이전하게 되고, 경제제도에서도 북송과 비교하여 부득이하게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금융혁신이 일어나고, 한때 남송의 생존은 염인(鹽引)제도에 의존하기까지 한다. 소위 염인이라는 것은 소금을 전매하던 시기에 국가가 상인에게 파는 소금취득허가증이다. 염인은 유가증권 및 어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남송조정의 초기에, 금나라군대는 수시로 남하하여 사방을 뒤흔든다. 송고종 조구는 심지어 해외로 도피하기따지 한다. 조구가 하남상구에서 즉위한 후 정식으로 항주에 도읍을 정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고, 휴대하기 편리한 염인은 군사비용을 조달하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남도입국(南渡立國), 전앙염초(專仰鹽鈔)"(남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운 것은 오로지 염인 덕분이었다)라믄 말까지 나왔다. '남도'라는 것은 송고종 조구가 남하하였다는 것이고, '염초'는 염인이라는 것이다. 송고종이 등극하기 전에는 병마대원수의 직위를 맡았는데, 정강지난의 근왕(勤王, 황제를 보호한다)을 구호로 내세워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염인을 발행한다. 얼마후에 50만민(緡)을 모으고 심지어 송고종이 남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는 노선에서 계속하여 상인들이 돈을 내고 염인을 구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염리(鹽利)를 세수로 삼은 것은 기원전7세기 춘추시대에 기록이 있다.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에서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 유세를 빌어서 "염철지리(鹽鐵之利)"를 흥성시킨다. 이것이 염법의 시작이다. 그후에 소금(염)은 관영에서 사영을 오간다. 당나라때는 개원이후에 염철사(鹽鐵使)를 둔다. 나중에 이 직위는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새로운 부문인 삼사(三司)에 편입된다. 송나라때 삼사의 지위는 한때 재상과 맞먹을 정도였다. 염리는 더더욱 뛰어난 역할을 발휘하고 염법은 더더욱 완비된다. 이리하여 염인등 제도적 혁신이 일어난다. 송휘종때 재상인 채경(蔡京)은 경제개혁을 실시하면서 염인의 사용범위를 더욱 광범위하고 빈번하게 한다. 그 제도는 후대에도 이어져 내려간다. <송사.식화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숙종연간에 염법을 개혁하고, 이재의 명신 유안(劉晏)이 대거 정리정돈하여, 전국의 염리가 1년에 40만민에 달한다. 당말에 이르러 염리는 이미 재정수입의 절반에 달한다. 북송 송철종연간에 회염(淮鹽, 회하가 지나는 강소에서 나는 소금)과 해염(解鹽, 산서성 해지에서 나는 소금) 이 두 개 항목의 연간 수입만 400만민에 달한다.    이는 당나라때 세금의 2/3에 상당한다. 남송 송고종에 이르러, 태주해릉(泰州海陵)의 염감(鹽監)의 수입만 6,7백만민에 이른다. 1개주의 수입이 전체 당나라제국의 수입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염인이 비록 널리 사용되었지만, 기실 이는 진정한 화폐가 아니다. 채권에 유사하다. 지폐로 말하자면 남송에는 교자(交子)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지폐는 바로 회자(會子)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송에 이르러 지폐는 진정으로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한다고. 그리하여 법정화폐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이 점은 필자의 새 책 <백은제국>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회자는 최초로 남송 송고종 소흥30년(1160년)에 관청에서 발급한다. 다음 해에는 회자무(會子務)를 설치한다. 사천교자의 방식을 본받아, 액면금액과 준비금을 설정한다. "모두 사천의 전법(錢法)을 봐서 시행했다. 동남의 제로에서 무릇 군수를 공급할 때는 돈과 같이 취급한다. 그리고 1천, 2천, 3천의 세가지로 나누었다. 호부시랑 전단례가 이를 주재하여 시행한다. 죄탕전 10만민을 본(本)으로 한다." <백은제국>에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회자는 각각 동남회자, 호북회자, 회남회자등이 있다. 사천에서 기원하여 지역적으로 사천에 한정된 교자와는 달리, 회자는 유통지역이 광범위했다. 그 준비금은 주로 동전이고 심지어 은본위가 있었다. 남송의 장수 오개(吳玠)는 하지(河池)에서 은회자(銀會子)를 발행했는데, 이는 중국최초의 은본위제(銀本位制)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은의 화폐기능을 확대시킨다. 당시에 회자와 백은간에는 왕왕 이것이 오르면 저것이 내리는 관계가 형성된다. "관회와 은가는 항상 서로 소장(消長)의 관계에 있다. 회자가 내려가면, 은가가 올라가고, 회자가 올라가면 은가가 내려간다" 지폐는 북송에서 발행되어 원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중간을 이어주는 남송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만일 북송화폐의 유통은 그저 국부적인 현상이라고 본다면, 남송의 지폐는 전국적인 상황이 된다. 지폐는 송나라때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화폐경제가 번성한 자연적인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 군사적압력하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자의 유행은 먼저 남송정부의 재정결핍에서 기원한다. 남송이 지배하는 범위는 북송보다 좁았고, 영토는 절반으로 줄었다. 다만 남방의 부유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재원은 충분했다. 해외무역을 개척하는 외에, 계속하여 전부(田賦)이외의 각종 세금을 거둔다. 예를 들어 경제전(經制錢), 절백전(折帛錢), 첨주전(添酒錢)등등이다. 북송과 이후의 제국의 기준과 비교하면, 남송은 지역이 비록 좁고, 인구도 겨우 6000만에 불과하지만, 주로 양절(兩浙)과 사천등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수입은 오히려 북송보다 많았다. 이는 기실 남송경제의 번영과 관리들의 이재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반영한다.


남송 송효종 말기의 정부수이은 6,530만민에 달한다. 북송 송철종때는 5,000만민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각종 군사지출과 대외배상금 압력이 있어서, 남송의 재정은 많은 돈을 끌어모았지만, 결국은 "회계불명(會計不明), 용절무도(用節無度)"했다. 비용의 지출은 수개월 심지어 반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으로, 전황(錢荒)이 갈수록 빈번해진다. 전황은 수당시대부터 기록이 있는데, 송나라때 더욱 빈번해진다. 이는 먼저 백동의 결핍이다. 수당이전에 상업은 그다지 번성하지 않아서, 관방정책은 민간이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위주였다. 그후에 무역이 점점 일어나면서 동전의 사적주조르 금지하지만, 구리의 가격이 오르면서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하여 얻는 이익이 없었다. 관방이건 민간이건 모두 화폐를 주조할 이익이 없었다. 구리가격이 높아지면서, 민간은 더더욱 동폐(銅幣)를 녹여서 동기(銅器)로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윤이 5배 내지 15배에 달한다. 민간의 동기주조를 예로 들면 당나라때 기록으로는 동전1000문으로 구리 6근을 얻는데, 근당 600여문이다. 소득이 이미 4배가량이다. 송나라때에는 다시 배가 된다. 송고종때는 이런 기록이 있다: "백성은 10문동전을 녹여서 구리 1냥을 만드는데, 주조하는 동기는 150문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이익이 많다보니, 자연히 금지할래야 금지할 수가 없어진다. 동전은 점점 더 부족해진다.


교자와 비교하여, 회자는 더욱 송나라 지폐를 대표한다.  중국인들은 왕왕 송나라때의 지폐를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빈털털이로 만든다. <백은제국>에서 우리는 송나라민간사회의 창조력과 관료의 신축성있는 경제관리수준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전쟁의 실패는 재정의 파탄으로 이끌고, 파탄된 재정정책은 반드시 파탄된 화폐정책으로 이어진다. 지폐는 재정화폐화의 비극을 이길 수 없었다. 교자, 회자등 화폐는 결국 통화팽창의 역사적 비극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송나라 통치자들이 개혁의 이익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만든다.


송나라지폐는 무대에서 퇴출된다. 다만 탐욕과 우매는 영원히 존재한다. 특히 말기왕조에 이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지폐를 통하여 민간의 부를 약탈하려는 시도를 더욱 악독하게 벌이게 된다. 송나라가 그러했고, 금나라도 그러했고, 원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지폐는 중국고대의 마지막 일막을 장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