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서시(西施)는 중국역사상 가장 예쁜 여인중 하나이다. 역시 민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여인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녀는 춘추전국시기 월(越)나라 절강(浙江) 제기(諸暨) 저라촌(苧蘿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서시가 아니다. 다만,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고, 서촌(西村)에서 태어났으므로, 인근에서는 그녀를 '서시'라고 부른 것이다. 이 경국경성의 여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치투쟁의 희생양으로 운명이 결정되어진다.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에 오(吳)나라의 국왕 부차(夫差)는 부친을 죽인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월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포롤 잡혀 오나라의 노예가 된다.
월왕 구천의 극진한 노력으로 3년후, 부차는 마침내 구천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귀국한 후, 구천이 한 첫번째 일은 바로 월나라의 미인들을 선발하여 오나라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부차를 마비시킨다. 이런 상황하에서, 서시는 미모로 범려(范蠡)의 눈에 든다. 범려의 제안에 따라, 구천은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바친다.
부차에게 바쳐진 후, 서시는 구천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경국경성의 미모와 뛰어난 금기가무(琴棋歌舞)로 신속히 오왕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 된다. 그녀의 미혹하에 부차는 월나라에 대한 경계심이 점점 느슨해진다. 이리하여 월나라는 재기의 외부적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십년후, 그녀가 내부에서 호응하면서, 월나라는 병력을 일으켜 오나라를 점령한다. 부차는 결국 검을 뽑아 자결한다.
서시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상적이라면, 그녀처럼 국가를 위하여 이처럼 큰 희생을 하고 공헌을 한 사람이 귀국하면, 당연히 군왕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그녀의 공헌과 비례하지 않았다.
서시의 최후에 대하여 사학계이건 민가넌설이건 모두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서시는 귀국후에 범려와 오호(五湖)에 은거했다고 한다.
일찌기 구천이 범려에게 보낼 전국의 미인을 선발할 때, 범려와 서시는 이미 서로를 알고 애인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단지 나라가 어려우므로 그들은 잠시 자신들의 애정을 포기한 것이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범려는 일찌감치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는 구천이 환난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부귀를 같이할 수는 없는 군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시가 귀국한 후, 그녀와 함께 도망쳐서 강호에 은거하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런 견해는 어느 정도 합리성이 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구천은 확실히 환난은 함께 해도 부귀는 같이 누릴 수 없는 군왕이다. 범려의 총명함을 보면, 구천과 십여년을 함께 일했으니, 구천의 이런 어두운 면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성공한 후에 은퇴한 범려는 자신의 애인과 은거를 선택하는 것도 정리에 맞다고 할 수 있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범려가 배를 타고 오호에 은거했다는고 하는데 바로 이 점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에 따르면 부차의 부인이 서시를 밀어서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는 것이다. 풍몽룡(馮夢龍)의 <동주열국지>와 백양(柏楊) 선생의 <황후의 죽음>에 따르면 서시가 귀국한 그날 밤에 월왕 구천은 그녀에게 시침하도록 한다. 그가 보기에 서시가 오왕과 동침했으면, 당연히 그와도 동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부차의 이런 행동은 그와 환난을 함께한 부인을 격노하게 한다. 그래서 그녀는 부차가 보지 않을 때, 서시를 물에 밀어넣어 익사시킨다. 일대미인이 이렇게 호수에 빠져 죽은 것이다.
이런 견해도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 당시 서시는 구천에 의하여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 다만 그녀의 경국경성의 미모는 여전히 구천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서시에게 시침하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구천이 부차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의 부인이 서시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도 정리에 들어 맞는다.
또 어떤 사람은 서시가 물에 빠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구천의 본부인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애인인 범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의 신뢰도는 비교적 낮다. 범려는 무정무의(無情無義)한 사람이 아니다. 월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그가 자신의 연인에게 이렇게 독수를 썼을 리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서시는 다른 사람이 물에 밀어넣어서 익사한 것이 아니라, 부주의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당나라초기의 시인 송지문(宋之問)의 시: "일조환구도(一朝還舊都), 정장심약야(靚粧尋若耶), 조경입송망(鳥驚入松網), 어침외하화(魚沉畏荷花)", 그리고 이상은(李商隱)의 시: "경양궁정잉감비(景陽宮井剩堪悲), 부진용란서사기(不盡龍鸞誓死期). 단장오왕궁외수(斷腸吳王宮外水), 탁니유득장서시(濁泥猶得葬西施)"를 그렇게 이해한 것일 것이다. 신뢰도가 얼마나 될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시가 자체는 시인이 가공을 거친 것이고, 그저 문학일 뿐이다. 이를 역사의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서시가 부주의해서 물에 빠졌다는 설은 아마도 당시 시인의 함리적인 상상이 아닐까 싶다. 후세인들도 이런 시를 근거로 상상하여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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