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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시)

서시(西施)는 최후는 어떠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2. 14.

글: 정정(丁丁)

 

중국역사상의 사대미녀중 시간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서시가 가장 먼저이다. 그녀는 주나라 춘추시대 월나라의 저라(苧羅, 지금의 절강 제기 남쪽)사람이다. 서시가 얼마나 아름다웠고,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큰 기여를 했는지, 그녀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서시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서시가 어디에서 죽었는지에 대하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시의 최후에 대하여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전해진다.

 

첫번째 견해는 명나라때의 희곡가 양진어(梁辰魚)의 극본 <<완사기(浣紗記)>>에 근거한 것이다. 극의 내용은 바로 서시와 범려의 사랑이야기이다.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시 월나라의 대부이건 범려는 한 따스한 봄날에 민간으로 갔고, 저라로 갔다. 거기서 빨래중인 서시를 만난다. 졸지에 젊은 범려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버린다. 서시도 범려의 재주와 똑똑함과 용모에 이끌린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리하여 계곡물가에서 서로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한다. 범려는 집으로 돌아간 후 즉시 서시를 처로 삼기 위해 준비했다. 서시도 집으로 돌아가서 시집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오왕 부차가 원수를 갚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하고, 월나라가 패배한다. 월왕 구천은 포로로 잡혀간다. 범려도 인질로 월왕부부를 따라 오나라로 가서 노예가 된다. 그와 서시의 혼사는 이렇게 하여 미루어지게 된다. 3년후,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부부와 범려를 풀어준다. 구천은 귀국후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꾀한다. 그는 범려가 내놓은 미인계를 채택한다. 서시도 범려의 애국적인 열정에 감동한다. 그녀는 미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범려의 뜻에 따라 오나라로 가기로 한다. 오왕 부차는 서시를 보고는 크게 기뻐해서 아주 총애한다. 이때부터 조정을 돌보지 않고, 결국 월나라에 멸망당한다. 구천이 논공행상을 하려고 할 때, 범려는 관직에 더 이상 있고자 하지 않았다. 오나라로 가서 서시를 만나, 함께 호수위에 배를 띄워 떠난다. 이후 이름을 바꾸고 은거한다.

 

이것은 서시의 최후에 관한 좋게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본이다. 역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이런 기록이 없다. 그저 범려가 월왕을 도와서 오왕을 패배시킨 후 은거했다는 내용만 있다. 그는 먼저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꾼다. 나중에 제나라 도지(陶地, 지금의 산동성 정도의 서북)에 정착하면서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된다. 이리하여 그는 중국상인의 비조가 된다. 다만 그와 서시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가 서시와 결혼했다는 내용도 없다.

 

그러나, 동한의 원강(袁康)이 쓴 <<월절서(越絶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다시 범려에게 되돌아왔고, 함께 오호로 건너 갔다" 그러나 후인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원강이 쓴 오나라 월나라 양국사 및 범려와 서시의 일등은 많은 것이 소문이나 전설을 기록한 것이어서 신뢰도가 높지 않다고 본다.

 

<<사기>>이 <<월왕구천세가>>와 <<화식열전>>에서는 모두 범려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서시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범려와 서시의 관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두번째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서시가 나중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처음 나타난 것은 <<묵자. 친사>>편이다. 거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서시의 침(沈)은 그 아름다움이다" 이곳의 침(沈)은 침()과 같은 뜻이다. 그 뜻은 서시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녀의 사인이 그녀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나중에 서시에게 침어(魚)라는 말이 붙는 것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동한 조엽이 쓴 <<오월춘추>>에도 서시에 관한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오나라가 망한 후, 월왕은 서시를 강으로 보낸다음, 가죽부대에 넣어서 빠져죽게 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묵자>>보다 수백년 늦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서시의 죽음이 더욱 상세해졌다. 이는 아마도 민간의 전설을 기록한 것일 것이다.

 

그외에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의 시 <<경양정>>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단장오왕궁외수, 탁니유득장서시(斷腸吳王宮外水, 濁泥猶得葬西施)". 이것도 개략 서시는 물에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대미녀 서시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을까? 필자는 서시가 물에 빠져죽었을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고 본다. 이유는 아래와 같은 다섯가지이다:

 

첫째, 만일 서시가 정말 범려의 미혼처였다면, 범려는 자기의 미혼처를 미인계로 오왕에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민간에서 미녀를 구했고, 서시는 바로 그 민간미녀였던 것이다. 나중에 범려는 월왕구천의 마음씨를 꿰뚫어보고, 관직을 사직하고, 장사를 하게 된다. 후세인들이 서시를 동정하여 그와 연결시킨 것일 뿐이다. 설사 정말 범려가 미혼처를 오왕에게 바쳤더라도, 범려는 그녀를 다시 자신의 처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남자들이 여자의 정조를 아주 중시했고, 하물며 범려는 고관인데, 오왕이 품에 안았던 여인을 처로 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서시를 속여서 동의받은 후, 나중에 오왕을 패배시킨 다음에, 사람을 시켜 물에 빠트려 죽게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서시가 만일 단지 민간미녀라면, 구천의 인품으로 봐서 당연히 서시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려는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당시 같이 대부로 있던 문종(文種)에게 월왕구천은 환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안락을 함께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날아다니는 새가 다 죽으면, 활과 화살을 창고에 들어가고, 재빠른 토끼가 다 죽어버리면 개는 삶아먹는다(토사구팽)"는 말을 한다. 문종은 믿지 않다가 나중에 결국 월왕에게 자진을 명받는다. 서시에 대하여 월왕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그가 미인계를 써서 오나라를 이겼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시의 가치를 다 이용한 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저 민간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셋째, <<묵자.친사>>의 기록은 신뢰도가 비교적 높다. 왜냐하면 묵자는 바로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사기>>는 상하 3천년을 기록했고, 서시의 죽음은 그저 창해일속에 불과하고, 하물며 그녀는 일개 민간여자이므로 기록에서 빠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넷째, 서시에게는 "침어"의 미가 있다고 하는데, 왜 하필 그녀에게 "침어"일까? 이것은 그녀가 강에 빠져 죽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섯째, 서시에 관한 모든 기록에는 호수 혹은 물 혹은 강과 관련이 된다. 가장 좋은 결말은 범려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서 오호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백성들의 아름다운 희망을 의미한다. 서시가 강물에 빠져죽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시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선량하며,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서시가 마지막에 범려와 결혼해서 둘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고 싶다. 필자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서시의 최후에 대하여 쓰지않은 이유가 이런 고려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냥 민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서시를 너무나 아꼈기 때문이다. <<사해(辭海)>>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서시는 선시(先施)라고도 하는데, 춘추말기 월국 저라 사람이다. 월왕 구천에 의하여 오왕 부차에 바쳐지고, 부차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 된다. 전설에 따르면, 오나라가 망한 후, 범려와 함께 오호로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도 서시가 물에 빠져죽었다는 전설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름다운 서시가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