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시)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보낸 미녀는 서시가 아니었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유지혜(兪志慧) 

 

한번은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나의 한쪽은 소산구(蕭山區) 부구장이고, 한쪽은 제기시(諸暨市)의 선전부장이었다. 그들은 춘추전국시대에 관한 책을 내가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물었다: 서시는 도대체 제기 사람인가, 아니면 소산 사람인가? 나는 난 내 책을 읽을테니, 너희들은 그냥 너희들 선전이나 하라고 말했다. 각자 자신의 일을 하자고. 그러나, 내가 얘기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들은 계속 확인하려고 했다. 나는 내 답을 들으면 너희들 기분이 상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나에게 대답해달라고 재촉했다. 나는 역사사실을 얘기한다면,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보낸 미녀는 기실 서시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어찌된 것인가? 오월쟁패가 끝난 후, 이미 여러 개의 자료에서 이 일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각각 <국어> 중의 <오어>, <월어상>, <월어하>에 있다. <국어>라는 이 책은 전국시대 초기에 쓴 것이고, 이 때는 바로 오월쟁패의 막이 막 내려진 때이다. 시간적으로 아주 가깝다. 그러면 이 말은 누가 한 것인가? 제계영(諸稽郢)이라는 사람이다. 제계영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구천의 세자 즉 태자이다. 당시 그는 부친이 참패했을 때, 그는 사신으로 오왕 부차에게 파견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구천청맹(句踐淸盟); 일개적녀(一介嫡女), 집기추이해성어왕궁(執箕箒以晐姓於王宮), 일개적남(一介嫡男), 봉반이(奉盤匜), 이수제어(以隨諸御)(<국어.오어>)

 

"구천청맹"은 당연히 성하지맹(城下之盟)을 체결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일개적녀"는 바로 구천의 친딸이다, "집기추, 이해성어왕궁"은 화의를 구하러 온 것이므로, 당연히 말은 겸손학 해야 한다. 바로 당신의 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청소하고 일을 할 것이다. 다만, 이 '해성'은 당신의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친 딸을 보내줄 뿐아니라, 또 하나 아들도 보낸다. "일개적남"은 바로 제기영 본인이다.  "봉반이, 이수제어"는 생활비서에 해당한다. 이 문헌이 기록된 시간은 오월쟁패가 끝난 후에 가장 가깝다. 말한 사람도 또한 구천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믿을 만하다. 마찬가지로 <국어>에서 또 <월어상>과 <월어하>도 있다:

 

[월대부문종(越大夫文種)]왈(曰): 과군구천핍무소사(寡君句踐乏無所使), 사기하신종(使其下臣種), 불감철성문어천왕(不敢徹聲聞於天王), 사어하집사왈(私於下執事曰): '과군지사도부족이욕군의(寡君之師徒不足以辱君矣), 원이금옥(願以金玉), 자녀뇌군지욕(子女賂君之辱), 청구천녀여어왕(請句踐女女於王), 대부녀여어대부(大夫女女於大夫), 사녀여어사(士女女於士), 월국지보기필종(越國之寶器畢從)'"(<국어.월어상>, <월어하>의 기재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구천의 아들이 아니라 문종(文種)이다. 구천의 오른팔이다. 말은 비슷하다. 다만 그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과군구천핍무소사, 사기하신종"은 바로 우리 대왕의 수하에 그럴 듯한 대신이 거의 없다.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본인 문종을 불렀다. 와서 무엇을 하러 왔는가? 천왕의 이 곳으로 달려왔다. 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왕 부차가 듣고 기분이 좋으라고 한 것이다. 직접 오왕부차에게 감히 직접 말하지 못하고 그저 부차의 부하에게 말하였다. 무슨 말을 했는가? "과군"이 가리키는 것은 구천이다. 우리 구천의 군대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당신이 와서 우리를 칠 필요도 없다. 그것도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우리는 물건을 내놓고 화평을 구하려고 한다. 무엇을 내놓는가? 첫째는 금옥(金玉)이고, 둘째는 자녀(子女)이다. 이 자녀라는 것이 특별히 가리키는 것은 일반적인 미남, 미녀가 아니다. 누구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일개적녀, 일개적남'이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논리에 따르면, 그 국가의 남자국민은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붙잡아서 노예로 삼는다. 그 국가의 여성공민은 상응한 등급에 따라 전승국에 분배된다. 상주왕이 소(蘇)나라를 멸망시키고 소달기(蘇妲己)를 취한다. 진헌공은 여(驪)나라를 멸망시키고 여희를 취한다. 모두 이런 논리이다. 그렇다면 문종은 어떻게 얘기했는가? "구천지녀여어왕" 구천의 딸은 여기서 결혼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공녀로 바친다. 이 '왕'은 바로 대왕 오왕 부차이다. '대부녀여어대부, 사녀여어사" 우리는 뒤의 두 마디 말을 한꺼번에 얘기하자. 왜냐하면 여기에 관련되는 것은 사회등급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고등급 가정의 여자가 아니면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더욱 높은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반대로 고등급 가정의 여자는 일반적으로 저등급의 가정으로 시집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접촉하는 전설과 다르다. 부차에게 바친 것은 저라산(苧蘿山)의 채신녀(採薪女)라는 것인데, 이것은 예악이 무너진 것이다. 등급사회가 붕괴된 이후의 전설이다.

 

셋째 자료는 명백학 우리에게 말한다. 당시 오왕부차에게 바친 여자는 바로 월왕 구천의 딸이다. 그녀는 저라산에서 땔감을 팔던 여자아이가 아니다. 저라산에서 땔깜을 파는 여자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먼저 이 문제는 놔두기로 하자.

 

부차에게 바친 여자는 구천의 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른다. <사기.월왕구천세가>에서는 월(越)이 "선우지묘예(先禹之苗裔), 이하후제소강지서자야(以夏后帝少康之庶子也)" 그렇다면 아마도 성이 사(姒)일 것이다. 서(西)도 아니고 시(施)도 아니다. 그러나 추가적인 이름에 대한 기재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가 없다. 비록 우리는 구천의 용모에 대하여는 약간 알고 있다. 그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사기.월왕구천세가>에서 그녀는 "장경조훼(長頸鳥喙)"라고 되어 있다.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하다. 목이 길다는 것은 미인은 목이 길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녀는 부친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예뻤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입이 뾰족하고 튀어나왔다는 것은 아마도 아름다움과 연결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정할 수 있다. 그녀의 출신이다. 그녀는 구천의 딸이므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부천의 후궁이 될 만한.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것은 서시는 무엇인가이다. 서시는 당시 미녀의 대칭이다. 현재 한 여인이 예쁘면 사람들이 그녀가 초선처럼 생겼다든지 양귀비처럼 생겼다든지 한다. 다만 당시에는 초선도 없고, 양귀비도 없었다. 당시의 북방사회에서 서시는 미인의 대명사이다. 서시의 출현은 필자의 독서경험에 따르면,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묵자>라는 책에서이다. 묵자는 어떤 사람인가> 전국시대초기의 사람이고 시간적으로 월녀보다 약간 늦다.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신자>, <맹자>이다. 전국시대 중기의 작품이다. 그 다음은 <순자>와 <전국책.초책>중의 당차(唐且)는 전국후기이다; 이어서 <한비자>이다. 모두 북방의 자료이다.

 

모든 이들 자료에 나오는 서시는 모두 미녀의 대명사이다. 이 미녀의 일생이 어떤지 우리는 <묵자>, <맹자>, <순자>, <한비자>등에 기재된 글자와 행간을 보면, 서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녀는 아주 예뻤다. 그리고 자주 또 다른 모장(毛嫱)과 나란히 언급된다. 다만 더욱 구체적인 상황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 동한때가 되어서도 서시는 여전히 이런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맹자.이루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서자몽불결(西子蒙不潔), 즉인개엄비이과지(則人皆掩鼻而過之)" 동한 조기(趙岐)는 주석을 달아서 이렇게 적었다. "서자(西子), 고지호녀서시야(古之好女西施也)". 그리고 예를 들어, <초사.구장,사미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수유서시지미용혜(雖有西施之美容兮), 참투입이자대(讒妬入以自代)" 동한의 왕일이 주석을 달아서 말했다. "세유호녀지이모야(世有好女之異貌也)". 즉 하늘 아래 미녀가 있는데 생긴 모습이 남들과 달라 아주 예쁘다는 것이다. 동한말기에 고유가 <회남자.정신훈>에 주석을 달 때 이렇게 말한다. "모장, 서시, 개고지미인(皆古之美人)". 여기서 시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오왕 부차가 자살한 것은 기원전473년이다. 동한후기는 이미 기원후200년가량이다. 기나긴 670년의 시간동안 중국의 북방에서는 서시가 월나라 여인이라는 기록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시는 오왕에게 시집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시와 오왕 부차에게 보내어진 딸이 언제 하나로 합쳐졌는가? 즉 동한시기이다. 앞에서 우리가 본 것은 대다수가 북방인(그중 왕일은 호북인이다)의 기재이다. 동한때가 되어 소흥 사람이 2부의 책을 쓴다. 하나는 <오월춘추>이고, 다른 하나는 <월절서>이다. 이 두 부의 소흥사람이 쓴 책에서 서시는 월녀(越女)와 이미 합체되었다. 왜냐하면 춘추시기와 같은 등급사회는 이미 역사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땔감을 파는 여자도 공경귀족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배경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왜 북방인들은 이런 내용을 쓰지 않았는데, 소흥에 와서 비로소 월녀와 서시가 하나로 합쳐졌는가? 이 중간에 필자는 관련 문헌기재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감격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어찌되었던 이 여자는 소흥인들에게 공헌을 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한 여자가 젊고 예쁘다 하물며 그녀는 마음이 더욱 예뻤고 미인이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서시를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월녀를 화려하게 변신시킨다. 이름도 거론되지 않던 여자를 구천과 연결시킨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고향정서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자신의 지도자의 공주가 원수에게 바쳐졌다는 이런 굴욕적인 사정은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원련 서시는 저라산에서 땔감을 파는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한번 얘기되고나서 불변한 것도 아니다. 나중에는 다시 변화가 생긴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여성에 대하여 왕왕 연향석옥(憐香惜玉)의 마음이 나타났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여운 여자를 땔감을 만들고, 땔감을 파는 이런 힘든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주도적으로 일을 바꿔버린다. 땔감을 패서 파는 것이 아니라, 빨래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이 좀더 편하고 쉬운 것이다. 미녀의 신분과 어울린다. 구체적으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이미 아주 늦었다. 금,원의 잡극에서이다. 그 이후, 명나라때의 양진어의 곤곡 <완사기>가 온 천하에 유명해진다. 원려서시가 빨래를 하는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서시의 직업이 시대에 따라 다시 바뀔 지도 모른다. 화이트칼라가 되든지 고급지식인으로 바뀌지는 않는지 눈을 씻고 기다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