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영(唐潁)
홍콩 매체가 2016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장쩌민의 군대내 심복인 쉬차이허우가 체포될 때 이미 말기암을 앓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시진핑에게 "마지막 요청"을 했는데, 죽기 전에 처를 한번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이를 허라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쉬차이허우의 처인 자오(趙)씨는 만나는 것을 거절한다. 알려빈 바에 따르면, 쉬차이허우는 죽기 전에 머리가 크게 부풀어 올라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2015년 3월 15일, 쉬차이허우는 방광암으로 죽는다.
봉황주간도 일찌기 비슷한 뉴스를 보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쉬차이허우는 병이 위독할 때, 머리가 사람들이 놀랄만큼 부풀어 올랐다. 군대는 그의 처인 조씨에게 와서 보도록 했으나, 조씨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어떤 중국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쉬차이허우는 에이즈가 발병하여 사망했다고 한다. 정부는 이를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2013년 3월 15일, 쉬차이허우는 십여명의 무경에 의해, 북경301부대병원에서 들려나갔고, 그의 처와 딸 그리고 개인비서는 같은 날 구금되었다.
쉬차이허우는 중국공산당 18대이래로 군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낙마장군이었다. 미국 <워싱턴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2012년 후진타오는 18대에 물러나기 전에, 군권을 모조리 시진핑에게 넘긴다. 동시에 시진핑에게 중요한 말을 한다. 쉬차이허우는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소식에 따르면, 2014년 1월 20일, 시진핑은 군대노간부를 위문하는 공연에 참석한다. 쉬차이허우는 전임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역시 참가했다. 공연과정에, 쉬차이허우는 시진핑에게 말을 걸었으나 차가운 반응만 얻는다.
이전에 홍콩의 <남화조보(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군대소식통을 인용하여, 시진핑이 2010년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돈 후, 직업 장쩌민의 군대내 대리인인 쉬차이허우와 궈보슝(郭伯雄)이 어떻게 후진타오를 십여년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군대내에 인맥을 널리 깔아놓았는지를 목격했다.
쉬차이허우, 궈보슝은 후진타오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시진핑이 군사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 15기 4중전회때 중국공산당 군사위 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17기 5중전회에 비로소 군사위 부주석이 된다. 가장 크게 그의 진입을 막은 것은 바로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여러 명이 참석한 군대내 반공개장소에서 쉬차이허우는 궈보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시진핑을 가리킴)에게 5년만 하고 꺼지라고 하지 뭐."
그때부터, 시진핑은 중남해의 주인이 된 후에 군대에 대하여 대숙청을 진행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절대로 후진타오처럼 허수아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쉬차이허우가 조사를 받은 후, 홍콩매체는 쉬차이허우가 뇌물받은 재산의 세부내역을 보도한 바 있다. 북경 부성로의 2000여평방미터에 이르는 쉬차이허우의 호화주택 안에서 사건수사관이 지하실을 열자, 산더미처럼 쌓인 현금, 화전옥(和田玉), 경목(硬木), 비취, 골동서화가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중국의 군대신문에서는 쉬차이허루를 "국요"라고 불렀다. 보도에 따르면, 쉬차이허우는 다른 탐관오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각지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고 이들 부동산은 처와 딸을 통해서 보유했다.
외부에 너리 알려진 것은 쉬차이허우가 상하이에 4건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쉬차이허우의 처인 자오씨는 이 뇌물을 받은 사람이다. 이 부동산은 구쥔산(谷俊山)의 동생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쉬차이허우는 사천 성도에도 호화빌라가 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역시 부인 자오씨이다. 쉬씨집안의 사천에 있는 별장은 알려진 바로는 성도군구의 모 책임자가 처리했다고 한다. 그 장군도 쉬차이허우사건이 발발한 후 낙마했다.
쉬차이허우가 낙마한 후, 중국의 매체에서는 쉬차이허우의 성공사를 보도한다. 1980년대, 원래 평범했던 쉬차이허우는 퇴역하고 다롄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운명이 그를 고속승진하는 무리"에 들어가게 했다. 특수한 '서클'에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한 무리를 사람들을 알게 된다. 나중에 그의 관료로서의 길은 순조로웠고, 관직은 갈수록 높아졌다. 마지막에는 상장까지 오르고,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된다.
그것은 어떤 서클일까> 쉬차이허우의 정치 '귀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2014년 7월 3일, "소상검객"이 올린 블로그 글에서 이렇게 폭로한다: 1983년, 쉬차이허우는 와방점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을 만날 때, 우연히 당시 광주군구 모집단군 정위를 맡고 있는 고향사람 위용보(于永波)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인정을 받아 승진가도를 달린다.
블로그 글에 따르면, 1984년, 쉬차이허우는 길림성 군구에서 심양대군구로 올며간다. 그리고 퇴역노간부에 대한 서비스업무를 담당한다. 여기에서 인맥을 쌓고, 나중에 동북군내의 인맥기초를 닦는다.
1985년, 위용보는 남경군구 정치부주임이 된다. 쉬차이허우는 16집단군 정치부 주임이 되어 실권을 가진다.
1989년, 위용보는 당시 막 군사위원회를 접수하고, 군대내에서 세력확장을 도모하는 장쩌민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총정치부 부주임으로 발탁된다. 쉬차이허우도 따라서 16집단군의 정위로 승진한다.
1992년, 장쩌민이 양가장(楊家將)을 숙청하는 과정에 위용보가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총정치부 주임에 오른다. 쉬차이허우도 곧 이어 북경으로 옮겨와서 위용보의 조리가 된다.
그후, 위용보와 장쩌민이라는 두 배경을 가지고 계속 발탁된다. 2002년, 쉬차이허우는 위용보의 직위를 물려받아서, 총정치부 주임이 된다. 이때부터 "우규서구(于規徐矩)" 위용보가 만든 것을 쉬차이허우가 따른다. 그리고 장쩌민의 명을 받들어 시키는대로 한다.
이전에 쉬차이허우는 1996년, 제남군구의 정위를 맡고 있을 때, 구쥔산을 만난다. 구쥔산은 쉬차이허우를 잘 모셨다. 그리하여 쉬차이허우에게 인정받는다. "그의 재정대신으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된다" 그후 구쥔산은 계속 승진하며, 쉬차이허우를 위하여 재물을 긁어모은다.
2012년, 구쥔산은 후진타오에 의하여 수사를 받는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거을 보자 쉬차이허우, 궈보슝 두 사람은 자구책을 마련한다. 쉬차이허우는 비정(悲情)카드를 꺼내어 병치료(방광염)을 이유로 301병원에 입원하고 나오지 않는다. 궈보슝은 방술(方術)카드를 쓴다. '풍수대가'를 모셔서 그가 시킨대로 집에 '풍수포(風水砲)'를 설치하여, '화를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래도 화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2015년 7월 30일, 궈보슝은 중국공산당 당적에서 제명되고, 사법에 이송된다. 관방통보에 따르면, 2015년 4월 궈보슝은 이미 조사를 받고 있다. 이제 장쩌민의 두 '아끼는 장군'은 모두 붙잡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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