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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감숙 19세소녀의 투신자살에 왜 구경꾼들은 박수치고 환호하는가?

by 중은우시 2018. 6. 26.

글: 풍청양v(風靑揚)


2018년 6월 20일 오후 15시경, 감숙(甘肅) 서봉시(西峰市)의 한 호텔 문앞에는 구경꾼들이 건물위에 있는 19살 여자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여자아이는 호텔 창문밖의 대 위에 앉아서 투신하려 하고 있었다. 소방차는 건물아래에 와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수백명의 구경꾼들이 보고 있었는데, 계속하여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 냉혈한들은 이 여자아이를 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각종 글을 SNS에 올리고 있었다. 저녁 7시경이 되어, 여자아이는 마침내 투신했고, 젊은 목숨 하나가 이렇게 사라졌다. 여자아이가 투신한 원인은 현재 조사중이다


곧 죽어갈 동포의 생명을 마주하면서 구경꾼들은 초조해 하거나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죽도록 종용했다. 이는 간접살인이 아닌가? 물어보자 만일 투신하려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 부친, 남편, 아들이라면 그래도 너는 투신하기를 바랄 것인가?


최근 몇년동안 매번 투신자살하는 사람을 구경한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귓가에는 계속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같다: "뛰어내릴 거면 뛰어내려!" "빨리 뛰어내려!" "어째서 아직 안뛰어내리는 거야!" "다시 한번 뛰어내려!" "재주가 있으면 뛰고, 재주가 없으면 죽어" "화이팅".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당연히 취해서는 안된다.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구경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은 죽으려는 사람을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심지어 직접 자살하려는 사람이 투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아야 할 것은 통상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항상 극도의 슬픈 일을 당한 사람들이다. 의외의 심각한 타격을 견디지 못해서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심지가 정상인 구경꾼이라면, 당연히 자살자가 그 난관을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자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목숨을 귀하게 여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투신자살의 구경꾼들만 냉막하고 무정한 것이 아니다. 지금 누군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차갑게 구경만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몇명이나 그가 고향을 떠나서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주겠는가. 용감하게 나서서 도와주려는 사람이 폭도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피하기에 급금하다. 인심이 이렇게 냉막하게 된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모든 사회의 인심이 어찌 이렇게 차가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백여년전, 목을 치는 것을 둘러싸고 구경하던 한 무리 사람들의 장면은 노신(魯迅) 선생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죽은 사람의 불행을 애도하고, 구경꾼들이 싸우지 않는 것에 분노하면서 선생은 의사로서의 길을 버리고 글을 쓰게 된다. 그는 손에 든 붓으로 국민성을 개조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지금까지, 이런 구경꾼형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심해지는 추세이다. 제목만 봐도 가슴떨리는 뉴스들을 보자: "여자아이가 화장실안에서 쓰레기줍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데, 40여명이 둘러싸고 구경하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5살짜리 아이가 실족하여 차가운 오물구덩이에 빠졌는데, 구경하던 백여명은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육교위에서 자살하려 하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뛰어내리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한다. 우리의 사회는 이미 '구경꾼'의 사회가 되었다고. 노인이 길거리에서 숨이 막혀서 죽거나, 묘령의 아가씨가 택시안에서 강간을 당하거나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한다.


더욱 무서운 일은 오늘의 중국 구경꾼들은 죽으려는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뿐아니라, 적지 않은 구경꾼들은 무료한 생활에서 자극을 찾으려는 것인지, 다른 사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자살장면을 즐기고, 자신의 오락거리로 삼는다. 다른 사람의 자살을 보면, 그들의 마음은 즐거워지는 듯하다. 심지어 자살자가 마침내 투신하여 죽으면 마음 속으로 '좋다!'고 소리치는 것같다. 아마도 자살자는 그저 이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목적이 뭐든지 간에 최소한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이런 하책을 선택한 것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아예 죽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료해서 소리치는 구경꾼들이 그들의 뒤에서 떠밀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경꾼일 때, 도움이 필요한 노인은 천천히 죽어가고, 구경꾼들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도움을 받아야할 물에빠진 사람은 천천히 익사하지만, 주위의 냉막한 구경꾼들은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투신자살자가 투신하면 구경꾼들은 박수를 친다. 우리는 생생한 생명을 그저 오락거리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저 오락으로 여긴다. 인간성이 어떻게 이렇게 냉막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을까? 인간성이 이미 더 이상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누가 자신은 절대 약자가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자신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없을 거라고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우리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국면을 맞이해서 이렇게 냉막하고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신사기(辛斯基) 선생의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너의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기껏해야 너를 죽일 뿐이다; 너의 친구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기껏해야 너를 배신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인할 때, 이 세계에는 비로소 살륙과 배신이 있게 된다."


누군가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 안에 원숭이를 길렀고, 원숭이를 잡아서 손님에게 접대했다. 손님이 오면, 흰옷을 입고 손님에게 원숭이를 고르게 했다. 우리안의 원숭이들은 규율을 알게 된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 중 한 명이 죽는다는 것을. 그래서 원숭이들은 아주 긴장하고 필사적으로 뒤에 숨었다. 손님이 원숭이 한 마리를 고르면, 나머지 원숭이들은 힘껏 그 원숭이를 밖으로 밀어냈다. 밖으로 밀쳐진 원숭이는 분명히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나머지 원숭이들은 곁에서 그 원숭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즐겼다. 이 장면은 계속되었고, 결국 원숭이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게 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집이 강제철거되는 것을 냉막하게 보고 있고, 소녀가 강간당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고,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고, 교통사고를 목격하고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 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아마도 그 우리 속에 들어있는 한 무리의 원숭이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