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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채륜(蔡倫)의 일생

by 중은우시 2018. 7. 14.

글: 임염청추(林炎淸秋)


중국역사상, 채륜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제지술은 인류문화의 전파와 세계문명이 진보에 걸출한 공헌을 한다. 채륜은 제조공들이 비조로 모시는 지신(紙神)이다. 미국의 권위있는 저적 <인류역사진보에 영향을 준 100명 랭킹>에서 채륜은 7위에 올랐다. 이를 보면 그가 세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채륜의 일생은 비극적인 색채로 가득하다.


채륜은 현재의 호남성 침주(郴州) 사람이다. 그는 평민가정에서 태어났고, 한명제(漢明帝) 말기, 18세의 나이로 채륜은 환관이 되어 궁중으로 들어간다. 그는 액정(掖庭)에서 일을 했는데, 액정은 후궁의 일부분이다. 채륜은 천성이 총명하고, 생각기 깊었다. 건초(한장제(漢章帝)의 연호) 시기에 채륜은 승급되어,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된다. 이는 황제의 근시(近侍)이다. 업무의 특수성으로 최륜은 황궁의 고위층 사이에서 잘 나갔다.


한장제의 황후 두황후(竇皇后)는 황자를 낳지 못했다. 한장제는 송귀인(宋貴人)의 아들인 유경(劉慶)을 태자로 앉힌다. 한장제의 또 다른 총비인 양귀인(梁貴人)에게도 아들이 하나있는데 이름이 유조(劉肇)이다. 두황후는 이 두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아주 미워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송귀인을 미워했다. 그녀가 나중에 황태후가 될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가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두황후는 갖은 방법을 써서 송귀인을 없애고자 한다.


한번은, 송귀인이 병들었는데, 두황후는 그녀가 무고지술(巫蠱之術)을 행했다고 모함한다. 얼마후 송귀인은 한을 품고 자살한다. 유경은 태자에서 폐위되어 청하왕(淸河王)이 된다. 양귀인도 겁을 먹고 자신의 아들 유조를 두황후에게 양자로 보낸다. 나중에 두황후는 양귀인의 가족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총애를 잃은 양귀인은 우울하게 죽어간다. 이때부터 두황후의 지위는 공고해지고, 후궁의 총애를 독차지 한다. 모든 궁중투쟁에 채륜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두황후의 두뇌집단 중 한 명이었다.


한장제가 병사한 후, 유조가 즉위한다. 그가 한화제(漢和帝)이다. 두황후를 황태후로 받든다. 이때 유조는 나이가 어려기 때문에 두태후가 조정을 대리한다. 채륜의 직업생애는 계속 승진가도를 달린다. 중상시(中常侍)가 되어 정무에 참여한다. 유조는 성인이 된 후에 점점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다만 채륜은 재능과 학문이 모두 우수하고 성실했으며, 직무를 잘 수행했다. 그는 여러번 황제의 뜻을 거슬려가며 득실의 이치를 설명했고, 이로 인하여 한화제의 신임을 받는다. 채륜은 나중에 상방령(尙方令)으로 승진한다. 이 직위는 각종 어용기물과 진귀한 기물의 제작을 감독하는 직책이고, 제지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토대가 된다.


고대서적은 대부분 죽간(竹簡)으로 적었다. 가끔 비단가 베에 적었다. 죽간은 너무 무겁고, 비단은 너무 비싸다. 그래서 아주 불편했다. 채륜은 고심하다가 한참을 연구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수피(樹皮), 마두(麻頭) 및 파포(破布), 어망(漁網)으로 초기의 종이를 만든다. 원흥(元興) 원년 채륜은 자신의 연구성과를 황제에게 보고한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면서 그에게 상을 내린다. 이때부터, 전국에 이 새로운 발명품이 보급된다. 글을 쓰는데 새로운 역사가 열린 것이다. 천하는 모두 이 좋이를 "채후지(蔡侯紙)"라 불렀다.'


한화제는 젊어서 요절했고, 아들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유호(劉祜)가 황제에 오르는데 한안제(漢安帝)이다. 그리고 그는 송귀인의 손자이다. 즉 폐태자 유경의 아들이 된다. 유호의 즉위는 채륜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한화제시대에 채륜은 일찌기 등수(鄧綏)를 보좌하여 황후로 오린다. 그는 등수의 총신이었다. 원초(한안제의 연호)원년 등태후는 채륜을 용정후(龍亭侯)에 봉한다. 봉지 내에는 수백호의 인구가 있었다. 그후, 등태후는 다시 그를 장락태복(長樂太僕)에 봉한다. 이는 태후의 궁내 근시이다. 봉건사회에 이 직위에 있는 사람은 권리와 영예가 지고무상이다. 나중에 채륜은 다시 황궁내 각종 전적문서의 교정을 감독하는 일을 맡는다. 이때가 채륜의 전성기였다.


121년, 채륜의 보호산인 등태후가 돌연 병사한다. 한안제의 친정이 시작된다. 그는 당연히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예전에 한안자의 조모인 송귀인을 박해하는데 참여했고, 유경태자를 폐위하는데 참가하였으므로 채륭은 관직이 박탈당하고, 조사를 받는다. 한안제는 그에게 스스로 정위(廷尉)에게 가서 죄를 고하고 처벌을 받으라고 한다.


관료사회에서 여러해동안 부침을 경험한 채륜은 이때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는 깨끗이 씻고 의복을 차려입은 후, 마지막으로 음독자살한다. 그의 봉지도 회수된다.


채륜은 탁월한 과학자이고, 그 자신의 성취만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궁중투쟁에 말려들었고, 정치의 희생양이 된다. 그의 최후는 안타까운 일이다. 증국번은 육계(六誡)중에 "구리지사물위(久利之事勿爲)"를 첫째로 꼽았는데, 바로 해가 중천에 뜨면 내려가고, 달도 차면 기운다. 물성즉쇠(物盛則衰)는 천지의 영원한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