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외국의 지하공정을 깊이 파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일련의 과학적이고 신뢰할만하고 효과적인 기술적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 조치는 지하에서 작업하는 사람에게 아주 양호한 통풍상태를 마련해준다; 지하작업면은 반드시 시공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편리하게 수직과 수평으로 오갈 수 있는 교통설비가 있어야 하고, 지하수의 위협이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어느 왕조때의 사람이건간에 반드시 이런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진시황시대에 만일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지궁건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이런 기술난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면 모든 것은 헛소리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일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진정 진시황릉의 지궁공사건설문제를 연구하고 싶으면, 먼저 진지하게 조사연구를 해보라는 것이다. 각종 지하채광공사와 방어시설을 공사할 때, 어떻게 방수, 통풍, 조명, 교통등 기술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진시황릉을 시공할 때 마찬가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는지.
진용관 고고학자는 진시황릉연구의 출발점 혹은 연구의 전제조건을 바로 사마천의 <사기>를 굳게 믿는 것으로 잡는다. 진시황릉의 지궁이 "아래로 물을 세번이나 뚫고, 궁궐과 백관이 있으며, 위로는 천문이, 아래로는 지리가 있고,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는 신기한 묘사를 완전히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진시황릉은 아주 깊은 지하에 있고, 확실히 무한하게 광활한 '신기한 세계'이다. 이 '신기한 세계'의 모습은 2004년 한 고고학자가 상상해서 그린 '진시황릉지궁' 효과도에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국내외 각 매체와 인터넷에 정식으로 공표되었고, 여기에 진릉고고팀, 혹은 진용고고팀의 권위있는 고고학자들이 멋진 말들을 덧붙여 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진시황릉의 높은 봉토무더기의 알에 지면에서 아주 깊은 곳에 또 하나의 세계와는 완전히 격리된 무한하게 광활한 '진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교하게 건설된 '지하세계'는 배치가 완료되면 즉시 대량의 흙을 운반해서 모조리 매워버려야 한다. 만일 한편으로 배치하고 한편으로 메운다면 이건 원래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 되지 않는가? 만일 복토공정이 정말 '강하,대해'를 모조리 흙으로 덮어버린다면, 어떻게 '강하'의 수은이 계속하여 '대해'로 흘러들어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고고학자들은 고민고민하다가 마침내 한가지 기이하고 파격적인 지궁의 청사진을 내놓는다. 진용관 고고부주임 유점성(劉占成) 선생은 2009년 6월, 특별히 내외기자회견을 열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릉의 지궁의 덮개부분은 돌로 쌓아서 돔형으로 만들었다. 그 위에 수십미터 두께의 봉토를 쌓고, 이 돌로 만든 돔형덮개의 아래에는 천문성수의 도상을 그렸다. 이것은 유렵입자물리연구소의 학자들이 내놓은 지궁의 위에는 아치형의 덮개가 있고, 진시황릉의 봉토 아래에는 거대한 내부공간이 있다는 견해와 일치한다.
서안의 한 유명한 문화재전문가는 일찌기 이런 글을 실은 바 있다. 진시황릉의 지궁방향을 가로질러서 길이가 500미터에 달하는 아치형지붕이 있다고. 이런 추리는 합리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궁에 정말 방대한 인조경물이 있으려면 충분하고 넓은 시야와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하왕국의 존재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묘사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고학자의 견해와 관점은 당연히 아주 명확하고, 아주 굳건하다. 다만 이렇게 큰 길이의 아치형지붕은 진정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건축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고고학자, 역사학자와 여러 문인들은 건축학자를 무시하고, 진시황릉의 지궁건축구조등 건축의 전문적 기술문제를 논의할 자격이 없다. 만일 이런 것을 다 무시하고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심지어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배척한다면 건축학자는 그들을 아주 창피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아치형구조의 지붕은 어떤 사람이건 어떤 시대이건 모두 만들 수 있다. 진나라때의 벽돌은 모두 바닥에 깔기 위한 것이었다. 진나라때의 궁전의 벽체는 모두 흙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동한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석회 혹은 석회장으로 쌓은 벽이 나타난다. 석회장(石灰漿)에 찹쌀을 섞어서 벽을 쌓는 것은. 남북조시대부터 시작된다, 동유회장(桐油灰漿)은 당송이후에나 사용되었다. 진한시대의 다리(橋)는 모두 량(梁)이라고 불렀다. 한나라의 성문은 목량평포(木梁平鋪)로 모두 대들보식 구조이다. 이를 보면 진나라때는 근본적으로 여하한 아치형을 만드는 물질기술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치형이 가질 수 있는 길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자료를 보자: 수(隋)나라때 만든 조주교(趙州橋)의 석공(石拱, 아치)의 길이는 37.37미터이다. 이는 세계에서 돌로된 아치중 최대의 길이이다. 현대의 강철콘크리트구조로 만든 사천자공공교(四川自貢拱橋)의 길이도 겨우 160미터이다. 강철11만톤을 부어서 만든 베이징의 "냐오차오(鳥巢, 올림픽주경기장)"의 길이는 330미터이다. 진용관 1호대청의 강철구조 아치형지붕의 너비는 겨우 70여미터이다. 한번 물어보자: 2000여년전의 진나라때 어떻게 이런 공사기술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진시황릉의 거설에 학실히 72만명의 형도를 동원했고, 38년의 시간을 들여서 시공건설했다면, 건축학의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은 마치 현대의 초대형 건설공사프로젝트와 같다. 초대형 건설공사에서 부딛치는 문제는 시공건설과 시공조직의 문제이다. 고고학자들이 진정 진시황릉의 건설규모를 알고 싶으면, 초대형시공건설의 전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고대문인들이 쓴 몇 마디 말에만 의지해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억측과 상상만 나올 뿐이다. 진시황릉공사의 전모를 파헤칠 수는 없다. 초대형공사는 초대형의 용지규모가 필요하다. 주체공사에서의 용지가 많이 필요할 뿐아니라, 보조공사의 부지도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과거 초대형공사건설부지의 실무경험으로 보자면, 주체공사의 용지와 보조공사의 용지의 비율은 최소한 1대 2정도이다. 만일 성원범위내를 주체공사구역으로 한다면, 진시황릉의 외곽지구는 보조공사의 용지면적이 된다. 그것은 주체공사구역 용지의 2배이상이 되어야 한다.
소위 주체공사의 용지라는 것은 반드시 전체 진시황릉 성원이내의 지궁, 봉토공사의 용지면적, 능원지면의 주축선상의 규모가 거대한 '전조후침'의 궁전건축군, 낭무(廊撫)건축과 수릉대신, 호릉부대의 관청공사부지면적, 능원녹화공사부지면적을 포함한다. 소위 보조공사의 용지는 반드시 지궁에서 파낸 흙을 보관하는 구역, 지상의 봉토로 쓸 흙을 파내는 구역, 건축재료를 놓아두는 구역과 가공작업구역, 지궁의 수은보관창고, 70만인부의 거주지역, 수십만 경비부대의 군영지역, 전체 능묘공사의 지휘부 및 관리인원지역이 필요하다. 당시 여산의 북록은 마치 100만명이 장기간 일하고 거주하고 생활하는 초대형 도시같았을 것이다. 그 외에 양식보관, 물자지원, 대외교통도 모두 부지를 필요로 한다. 이런 실제문제가 하루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공사건설은 하루도 진행될 수 없다. 그래서, 진시황릉의 전체 시공건설과정에서는 정교하게 계획된 시공조직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능원의 성원안은 당연히 주체공사소재지이다. 공사지휘부, 군사관제구, 행정관리구, 인부생활구, 공구재료보관구역은 모두 능원의 성원 바깥에 둘 수밖에 없다. 능의 서쪽은 가공, 퇴적, 거주용지로 쓰고, 능의 남쪽일대는 지세가 높으므로 거주, 관리, 생활시설을 둘 수 있다. 왕자금(王子今) 선생의 <진시황릉복토공정용공인수논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궁에서 624.5만입방미터의 흙을 파내야 한다. 그것을 다시 메꾼 후에 밖에서 다시 1863만입방미터의 새로운 흙을 가져와서 봉토를 쌓아야 한다. 지궁에서 흙을 파내고, 지궁을 건조하고, 진시황을 매장하고, 다시 흙을 메워서 끝내려면 흙을 쌓아두는 구역이 오랫동안 필요하다. 고대 <구장산술>이라는 책에는 "천지사(穿地四), 위양오(爲壤五), 위수삼(爲竪三), 위허사(爲墟四)"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뜻은 4입방미터의 실토(實土)를 파내면, 5입방미터의 허토(虛土)가 형성되거나 혹은 3입방미터의 항토(夯土)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추형(錐型)체적공식으로 계산하면, 624.5만입방미터의 실토를 파내면 퇴적장으로 운반했을 때, 811.8만입방미터의 허토가 된다.
이렇게 많은 흙을 1곳에 모두 쌓아둘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분산하면할수록 점유면적은 더욱 넓어진다. 흙무더기의 높이가 더욱 낮아질수록 점유지역은 더욱 넓어진다. 만일 퇴적높이를 2미터로 계산한다면 점유면적은 405.9만평방미터가 된다. 진시황릉의 외성은 남북으로 길이 2,165미터, 동서로 너비가 940미터인데, 겨우 203.51만평방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보라! 흙을 쌓아두는 장소만으르도 진시황릉 자체의 점유면적보다 2배는 넓어지게 된다. 만일 퇴적높이를 4미터로 한다면 흙을 두는 장소의 면적이 거의 진시황릉자체의 점유면적과 같아진다. 흙을 쌓아두는 곳으로는 능의 동쪽의 개활지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중일의 <진시황릉고고발견과연구>라는 책을 보면, "진시황릉구유지분포시의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시황릉의 동측은 남쪽의 두가촌 북쪽에서 서소촌으로 사하(沙河)를 따라서 동서로 너비 110미터, 남북으로 길이 1500미터의 마구갱군(馬廐坑群)이 있다. 이곳에는 두터운 흙이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지하의 이들 마구갱은 진시황릉건설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증명한다.
왜 진시황릉 동쪽의 이들 마구갱이 진시황릉의 배장갱이 아예 아니라고 보는가? 이유는 바로 마기갱의 안에 매장된 것은 모두 진짜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의 키가 대부분 135센티미터이고 가장 큰 것이 147센티미터이다. 진용갱에서 출토된 도마(陶馬)보다 키가 크고, 동거마(銅車馬)의 크기를 1배로 늘인 후의 원형말의 키보다도 더 높다. 중국고대의 묘장에서 진짜말을 가지고 순장한 것은 춘추시대에 성행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전쟁의 규모가 계속 확대되면서, 각국은 속속 자신의 기병부대를 조직하고, 각종 좋은 말들은 공급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일종의 대체품인 배장용으로 도기로 만든 말을 썼고, 이것이 역사무대에 홀연히 등장한다. 진한시대에 이르러, 군사전투에 말이 필요하고 ,경제발전에 말이 필요했고, 사회생활에 말이 필요했다. 어떤 좋은 말의 가격은 이미 '백금'을 넘어선다. 그래서 진시황릉 부근에서 출토된 700여마리 진짜말의 그 배장갱은 근본적으로 진시황릉과 관련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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