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기실 원고(遠古) 시기의 묘장은 원래 아주 간단했다. <역.계사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상고혈거이야처(上古穴居而野處)" 원시인들은 모두 동굴안에 살고, 황야에서 생활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냥 들판에 버렸다. <맹자.등문공상>에는 "예전에는 그 가족을 묻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가족이 죽으면 들어서 골짜기에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흙을 파는 도구가 나타나면서 토장의 습속이 나타난다. 목공,석공기술이 나타난 이후에, 관의 제작이 현실화된다. 묘장규모도 계속 커진다. 상,주시대에 이르러, 대형 수혈토갱묘(竪穴土坑墓)가 주류의 묘장형식으로 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여러 <황장제주>의 묘실구조가 나타난다. 이는 묘장의 최고등급이다. 이런 묘실은 일단 덮개를 덮고, 봉토를 올리고나면, 공사가 끝나는 것이다. 위로는 풍상의 춘추시대 진공대묘에서부터 아래로는 함양 원상의 서한황제릉까지, 모두 수혈토갱묘의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황장제주'구조로 지하궁전을 건설한다.
무엇이 '황장제주'인가? <한서.곽광전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목(柏木)을 관의 바깥에 노랗게 두어 쌓기 때문에 "황장(黃腸)'이라고 했다; 나무머리가 안을 향하므로 '제주(題湊)'라 했다." <예기.단궁상>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주는 방(方)이 모두 1척이다" <소>의 주석에는 "관의 재목은 모두 아래에서 쌓아서 위로 올라간다. 그레서 제주라고 한다. 주는 향하다는 말이다. 나무의 머리가 서로 향해서 사아(四阿)가 된다" 이를 보면 황장제주라는 것은 일종의 상등급의 백목으로 1척크기로 '벽돌'처럼 깎아서, 그것을 쌓아서 담벽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밀집하게 돟아서 서로 다른 묘실공간을 형성하고, 나무토막 위에는 석점(蓆墊)을 깔고, 그 후에 목탄, 고니(膏泥)를 쌓는다. <오월춘추>에는 "문석위곽(文石爲槨), 제주위중(題湊爲中)"이라는 말이 나논다. <여씨춘추>에는 "제주지실(題湊之室), 관곽수습(棺槨數襲, 적석적탄(積石積炭), 이환기외(以環其外)"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서.곽광전>에는 "곽광이 죽자, 황상과 황태후가 친히 장례에 참석하고 황장제주 1구를 하사한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지실'이 완성된 후 흙으로 채운다. 어떤 경우에는 높이 구릉으로 쌓는데, 이는 당시 최고등급의 지궁구조였다.
"황장제주"를 만든 묘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수혈(竪穴)을 파고, 여러 '황장목'을 쌓는 것 자체는 그다지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다른 부장물품도 궁정에서 쓰는 보물들을 가져오면 된다. <순자.예론>에는 "천자칠월, 제후오월, 대부삼월, 일을 모두 처리하여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사망때부터 매장때까지 7개월의 장례기간은 바로 흙을 파내고, '황장제주'를 쌓고, 내부를 완성하는 공기이다. 이 모든 것이 '후사'의 핵심부분이다. 근본적으로 생전에 '예수'할 필요가 없다. 왜 수혈토갱묘는 예수할 수 없다고 하는가? 대답은 제왕의 '사망'시기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즉위후 즉시 지궁을 "예수'한다면, 일단 수십년 재위하게 되면 초기에 파놓은 구멍은 비바람의 침식을 받아 물구덩이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다시 쓰려면 물을 빼내야 하는게 아주 어렵다. 이렇게 습기있는 곳에 묘지를 쓰는 것은 역대제왕들이 가장 꺼리는 일이다.
이 시대의 여하한 사람이라도, 진시황과 한고조를 포함하여, 그들이 진정 지하묘실을 건조하려면 문학작품의 '허구'와 창작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런 공사기술의 특정한 한계를 초월하여 다른 방법으로 지궁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즉, '황장제주'라는 구조는 진시황릉공사에서 완전히 적용된 것이다. 누구의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성격이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시공을 초월한 환상의 능묘를 만든다는 것은 실현불가능이다. 누군가 이렇게 반박해서 말했다: "<사기>와 <한서>의 사료기재를 보면, 양한시기의 제왕능묘는 모두 수혈토갱+황장제주가 아닌가. 그리고 모두 생전에 "예수'하지 않았는가? 한무제를 예로 들면, 그의 무릉공사는 사망 52년전에 시작했고, 한나라때의 다른 제왕들도 생전에 능묘를 만든 확실힌 기록이 있다. 모든 이런 것들이 거짓이란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해줄 수있겠는가?"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확실히 날카롭다. 만일 대답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진시황이 능묘를 '예수'했다는 설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한고조 유방은 전쟁의 와중에 황제에 올랐다. 6년이후에야 함양에서 진정으로 황제보좌에 오른다. 다시 5년이 지나서 사망한다. 유방의 장릉은 아주 잘 만들었다. 배장묘도 아주 많다. 점유면적도 아주 넓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생전에 '예수'된 것이 아니다. 유방이 매장된 후, 고조능묘를 만든다. 이어서 전국 각군현과 그가 일찌기 순행했던 지방에서 백개가 넘는 한왕묘도 만들어진다. 여기에 거액의 돈을 들여서 민원이 비등한다. 그리하여 한문제는 죽기 전에, 천하에 조서를 내린다: "패릉에 묻고, 봉분(墳)을 만들지 말라. 이산위릉(以山爲陵)하라." 그러나, 산을 파는 공사도 비록 절약되기는 하지만 역시 시간의 많이 든다. 서한의 혜제, 경제, 무제, 선제등은 확실히 능묘를 '예수'한 기록이 있다. 다만 <한서>에서 묘사된 과정을 보면 반드시 생전에 진행해야하는 것은 부지선정, 재료분비, 지상침전건설등 사전공사들이었고 황장제주 자체의 건조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성제는 섬서성 부풍현에 능묘의 부지를 서정하고, 10년의 사전공사후, 다시 임동에 다시 묘지를 선택한다. 부지선정후 5년동안 먼저 한 일은, <한서.성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은 이러하다: 곽읍을 설치하고, 흙을 쌓아서 높이 만들며, 부역을 늘인다. 그리고 군국의 호걸 5천명을 창릉(昌陵)으로 이주시켜서 승상, 어사, 장군, 열후의 묘지를 선정하게 한다. 그리고 능에 침전과 사마문등을 만든다. 얼마후 지궁의 위치에서 지하수위가 너무 높다는 것을 발견하여, 만년을 거주할 곳이 아니라고 하여, 창릉의 건설이 전면중단된다. 한성제가 사망한 54일후, 부풍현의 원래 선정한 부지에 새로 판 수혈대묘에 묻힌다. 한경제는 즉위후 4년째 되던 해(기원전153년)에 양릉의 위치를 선정한다; 다음 해부터 규모가 아주 큰 양릉읍을 설치하고, 백성을 대량 이주시킨다. 기원전146년, 능에 덕양묘를 건립한다. 기원전113년, 양릉에 큰 불이 일어났다. 이는 일찌기 '예수'한 것은 목조궁전건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진시황이전에, 능묘범위는 봉토퇴 및 봉토꼭대기에 향당(享堂)을 설치하는 외에, 전체 능묘구역에는 다른 침전과 같은 대형건축이 없었다. 능묘구역의 부근에 대규모의 능읍을 건설할 필요도 없었다. 진시황은 최초의 봉건제왕이고, 하북형대에서 죽는다. 나중에 여산의 북록에 묻힌다. 봉토의 높이가 100미터에 달해서, 봉토의 꼭대기에 향당을 건설하는게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능묘의 북측에 있는 넓은 평지에 더욱 규모가 큰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궁전건축군을 만든 것이다. 진나라말기 농민반란군이 여산의 아래로 쳐들어오자, 이 건축군은 그저 기초공사만 마친 상태에서 전면적으로 중단된다. <독단>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썼다: "옛날에는 능묘에서 제사지내지 않았다. 진시황에 이르러 전조후침의 궁전건축군을 만들었고, 이는 진시황이 제정한 묘장제도인데, 진시황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한나라가 이어받아서 계승하게 된다."
진한시기의 능묘 '예수'는 왜 먼저 지면건축물부터 시작했을까? 이것은 중국고대에 사망자를 아주 존경했다. <주례.중용>에는 "경기소존(敬其所尊), 애기소친(愛其所親),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사망여사존(事亡如事存)" 윗사람을 존경하고, 친족을 사랑하며, 죽은 사람을 모시는 것을 산 사람일 때와 같이 한다. 능묘의 궁전건축은 생전의 궁전건축의 충실한 재현이다. 그들의 건축등급, 규모, 구조, 재료, 장식은 거의 차이가 없다. 만일 생전에 목재를 준비해놓지 않으면, 모든 것을 영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건설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능묘를 몇년만에 완공하거나 몇십년이 걸려서 완공된 주요 원인이다. 진한시기의 제왕이 능묘를 '예수'한 목적은 바로 사전에 지면의 궁전건축을 완공하는 것이다. 일단 제왕이 '붕어'하면, 혹은 제왕이 위독하면, 즉시 사전에 선정한 위치에 인력을 모아서 급히 땅을 파고, '황장제주'를 쌓아서 묘실을 만들고 제왕을 매장하고 봉토를 올린다. 그렇게 해서 후계자의 융중한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제왕이 죽고나서 먼저 지하묘실을 만들고, 그 후에 다시 지상건축물을 만든다면, 정식의 제사활동은 언제까지 미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기.조세가>에서 말한 "숙후15년(기원전355년), 수릉을 만들기 시작하다." 도대체 어떤 능묘를 '예수'한단 말인가> 조나라의 국군이 숙후는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상산(지금의 하북성 곡양현)에 자신의 능묘를 '예수'한다. 숙후의 신분으로 보아, 그의 묘장은 '제후오월'의 등급에 해당한다. 만일 평지에 갱을 파서 묘를 만들면, 5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곡양지역은 모든 지역이 단단한 암석으로 되어 있다. 아래로 파서 수혈을 만들기에는 시공여건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조나라는 야철업이 발달하여, 여러 강철공구가 있었다. 그리하여 산에서 돌을 파낼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숙후가 능료믈 '예수하는 유일한 선택방법일 것이다. 관련 사료기재를 보면, 숙후의 아들인 조무령왕은 생전에 이런 방식으로 부근의 산에 자신의 유사한 '수릉'을 '예수'했다.
돌을 파내서 만든 지궁의 장점은 명확하다; 하나는 시공기술이 아주 간단하다.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하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고대제왕의 능묘 '예수'에 가장 신뢰할만하고 가장 효과적인 기술적 보장이 가능하다. 둘은 지궁 자체의 건설에 동원되는 인력과 재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간단하고, 특수한 건축재료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공사의 난이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장례을 간이하게 하는 정신에 부합한다. 셋은 가장 은폐된 시공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묘문을 봉쇄하고 돌로 쌓아놓으면 묘실은 완전히 산에 융합되어, 후세인들이 입구를 발견하기 어렵다. 수천년이래, 이런 능묘를 찾아내고 도굴할 확률은 아주 낮았다. 돌을 깨서 지궁을 만드는데 단점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하나, 돌을 파내는 효율이 아주 낮다. 그래서 공기가 길어진다. 빨리 시공할 수가 없다. 둘, 대용량의 내부공간이 형성되므로 지궁에 남아있는 공기가 너무 많다. 여기에 암석에 물이 참투되는 작용을 해서 오히려 시체를 보존하는데 불리하다.
돌을 파서 동굴을 만드는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크게 바닥을 아래로 파내려가서 각종 벽돌, 돌등 건축재료를 이용하여, 인공적인 방식으로 상부의 거대한 하중을 견디고 전체지하공간의 묘실구조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능묘 "예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지궁의 대용적, 대규모의 덮개공사를 하는 시공기술이다. 이런 대용적 대규모의 지궁을 건설하려면 반드시 신뢰할 수 있고, 새로운 형태의 아치형구조를 갖추어야한다. 혹은 돔형 덮개와 관련된 기술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중국고대건축기술사>의 관련자료를 보면, 아치형구조는 방형묘실의 건축에 적절하지 않다. 아치형 구조는 서한말기에야 겨우 나타난다. 황제릉의 건설에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아치형묘는 삼국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돌판으로 아치형덮개를 만드는 능묘는 송나라이후이다.
진한시기에 황제릉을 "예수"한 기록을 보면, 일부 지상건축물을 생전에 "예수"하는 것이지, 수혈토갱의 지궁부분은 모두 '임위(臨危, 병이 위중하여 죽기 직전일 때)"에 비로로 건설했다. 대형 아치형구조물에 관한 기술이 완전히 성숙된 이후에야 제왕은 생전에 능묘를 "예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되면 지상의 침전건축부분과 지하묘실부분은 각각 나눠서 진행할 수 았고, 동시에 시공할 수도 있으며 전체적인 공사가 준공된 후에 통행이 가능한 묘도를 남기고 관을 놓아둘 위치를 확보해두면 언제든지 주인이 들어와서 묻히도록 할 수가 있다. 일단 능묘를 만들었던 제왕이 쫓겨나면 후대의 제왕이 이용할 수도 있다. 서태후는 청나라 광서34년(1908년)에 사망한다. 그녀의 무덤은 28년이전에 이미 준공되었다. 이 기나긴 매장을 기다리는 기간동안 5번에 나누어 지궁에 계속 순장할 기진이보를 옮겨놓았다. 이를 보면 다 지어놓은 무덤은 언제든지 열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일부 고고학자들은 <사기>의 진시황릉에 관한 문자기재를 시종 경전으로 받들고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진시황릉고고논증의 중요근거로 삼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시황릉의 지궁 내부는 "천삼천(穿三泉), 하동이치곽(下銅而致槨), 궁관백관(宮觀百官), 기기진괴(奇器珍怪), 사장만지(徙臧滿之), 영장작기노시(令匠作機弩矢), 유소천근자첩사지(有所穿近者輒射之), 이수은위백천강하대해(以水銀爲百川江河大海), 기상관수(機相灌輸), 상구천문(上具天文), 하구지리(下具地理)"의 구조와 배치를 지녔다고 한다. 지궁의 하부에 지하의 3중 지하수를 지나고, 이를 보면 지궁은 지표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게 도대체 얼마나 깊이 있을까? 호북대야 동녹산의 전국시대 동광의 깊이는 50미터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진시황릉의 지궁이 지표에서 최소한 이것보다는 낮은 깊이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으로 진시황릉의 지궁을 추산한 결과 지표에서의 깊이가 500미터 내지 1500미터 사이라고까지 하였다.
전국시대 동록산 광산 수직갱(竪井)의 깊이를 가지고 진시황릉 지궁의 깊이를 추산하는 것은 아주 비과학적이다. 동록산의 광산은 경사지형에 있으므로, 물의 침수와 위협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지형의 고도차를 이용한 수정은 효과적인 자연통풍효과가 있다. 진시황릉은 산앞의 완만한 언덕지형에 있다. 만일 지하로 수직갱을 판다면 지하의 작업면의 수직갱높이는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효과적인 공기대류가 일어날 수 없다. 지하시공에 필요한 공기의 양을 공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광정(鑛井)업무수칙>을 보면 알 수 있다. 갱 아래의 사람은 1사람이 1시간에 5.1입방미터의 공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갱아래의 이산화탄소함량이 0.5%를 초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산소농도가 20%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지하작업인원은 생리균형을 잃어서 파괴될 것이다. 한 사람이 14평방미터의 공기가 없는 공간에 머문다면 20시간을 넘을 수가 없다. 넘으면 계속 살아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지하공간내에서의 생존에 항거할 수 없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입자물리학자들은 진시황릉의 지궁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여러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지하공사의 설계와 시공에 관련하여 일찌감치 역사계, 고고학계 자체의 전통적인 연구분야를 넘어섰다. 왜 입자물리학의 과학자들이 수백미터 천미터이상의 지궁심도를 얘기하는가? 이는 국외에서는 지하 2000여미터에 이르는 광정이나 핵시설이 기실 아주 많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는 전체 지하철도를 지면에서 100미터 이하로 한다. 만일 진사황이 뭐든지 할 수 있었다면, 능묘의 지궁을 아주 깊이, 아주 깊이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념으로 소위 "진시황릉은 아주 깊다", "진시황릉은 "아주 깊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등으로 지궁을 묘사한 문자자료가 있다. 진용고고학자들의 저작에서도 "이심이극(已深已極)", "극심불가입(極深不可入)"이라는 글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진시황릉의 지궁위치가 그 어떤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깊어서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국과 문화 > 진시황릉의 허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시황릉의 허실(6): '수은이상'은 외부오염때문이다. (0) | 2018.02.07 |
---|---|
진시황릉의 허실(5): 묘장을 만드는데는 반드시 지하수를 막아야 한다. (0) | 2018.02.07 |
진시황릉의 허실(4): 진시황릉은 아치형 구조였을까? (0) | 2018.02.07 |
진시황릉의 허실(2): 진시황의 능묘 "예수(預修)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0) | 2018.02.06 |
진시황릉의 허실(1): 진시황릉은 얼마나 큰가? (0) | 2018.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