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처음 즉위한 후 천치여산(穿治驪山)했고, 천하를 병합하고나서 천하의 무리 70여만명을 보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진시황이 등극하자 즉시 자신의 능묘를 "예수(預修, 미리 만들다)"했다고 말한다. 기실, 이는 완전히 역사에 어긋나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진시황이 집권한 37년동안의 수십만명이 모두 진시황 한 사람을 위해서 능묘를 만들기 위해서 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진시황릉의 규모가 확실히 아주 크다면, 그의 부친 진장양왕릉, 그의 조부인 진효문왕릉등의 규모도 그의 묘보다 크게 작을 이유가 없다. 진나라의 국군은 생전에 능묘를 "예수(미리만드는" 전통이 없었다. 진시황이 즉위할 때는 그저 한 제후국의 국군일 뿐이었다. 그는 진장양왕, 진효문왕등 '국군'과 같은 등급과 지위였다. 실제로 큰 차이가 없다. 만일 재상이 능묘공사의 책임자라면, 여불위는 2대의 진왕 재상을 지냈으므로 그는 분명이 이 두명의 '국군'늠묘 건설과정에서 가장 실권을 가진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나라는 능묘를 "예수"하는 선례가 없다. 그래서 부친 진양양왕이 사망한 후, 능묘를 건설하는 중임은 의문의 여지없이 진시황이 어깨에 지워진다. 조부인 진효문왕은 겨우 며칠간 '국군'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능묘공사도 마찬가지로 진시황이 완성해야 했다. 증조부 진소왕은 아들보다 3일먼저 죽었기 때문에, 진소왕의 능묘도 실제로는 진시황이 완공해야 했다. 진시황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모인 하태후(夏太后)화양태후(華陽太后)사망한다. 곧이어 자신의 생모도 감천궁에서 사망한다. 이들 윗대의 어른들이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면서 규정에 따라 장례등급, 제도, 규모에 맞추어 그들의 능묘를 긴급히 마련해야만 했다. 그들이 '입토위안(入土爲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진시황의 가장 우선되고,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사정이었다. "모초설태후고사(茅焦說太后故事)"에서 알 수 있듯이 진시황은 효자이다. "효를 근본으로 하는" 후배, 후인들 중에서 조상의 묘를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감히 천하의 금기를 어기면서 자신의 능묘부터 만든단 말인가?
기실, 여하한 왕조에서건 여하한 황제가 재위할 때이건, 거의 매해 능묘를 만드는 일이 있었다. 제왕 자체가 바로 처첩이 많아서, 삼궁육원 혹은 칠십이빈비가 있다. 위로는 태조, 태황, 황백, 황숙, 국구, 국척의 주맥, 지맥이 있고; 아래로는 황형, 황제, 황자, 황녀, 황질, 황손의 지계가 있다. 만일 왕위에 봉해진 사람까지 한다면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칠고팔구, 삼질육생과 공주부마가 있다. 자연히 왕실의 방대하고 복잡한 체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널리 번성하게 되면 확실히 요원지세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방대한 왕족구성원이 하나하나 죽을 때마다 모두 제도에 따라 그들의 능묘를 건설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진시황이 집권한 수십년동안, 건조한 능묘만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고 수로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의 능묘에 수십만명이 수십년동안 만들었다면 그 많은 왕족구성원들의 능묘는 누가 만들고 언제 만든단 말인가?
진시황은 웅재대략, 근정유위의 법치를 숭상하는 사업형의 군주였다. <사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집권한 시기에, "천하의 일은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없이 모두 황제가 결정했다." <태산각석>에도 "숙흥야매(夙興夜寐)"라는 말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가 workholic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병린은 <진정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시황은 병풍 앞에서 천하 일을 처리했다. 자제들은 서인으로 하고, 후궁들은 누구도 간섭하지 못했다. 진황은 혼자서 아방궁에서 일어났다. 동남동녀 삼천을 서복에게 준 것을 제외하고는 잘못한 것이 없다."
진시황에 있어서, 그는 오로지 나라를 건설하고, 제후육국이 남긴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에 있어서 황제의 최대바램이 장생불사이고, 불사약을 찾는 것인데, 누가 감히 그 뜻을 거슬려 능묘를 짓자고 할 수가 있겠는가?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시황은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죽음에 관한 일을 언급하지 못했다." 기원전210년 칠월, 진시황이 동순 도중에 병이 위독해지자, 아무도 나서서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를 보면 그의 생전에, 누군가 나서서 그에게 '죽음'과 관련된 일을 아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시황이 즉위했을 때는 겨우 13살의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일은 재상 여불위가 처리했다. 여불위의 정치이념은 극히 개명하다. 국가의 군정전략의 총설계사로서, 중대공사의 총지휘자로서 특히 능묘건설의 과정에서 그는 근검절약을 주장했고, 후장에 반대했었다.
여불위는 <여씨춘추>라는 법전의 성격을 지닌 대작에서 조정권력자에게 이렇게 일깨운다: "자고아래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능묘가 없다. 그래서 큰 묘는 파헤쳐지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에서 서로 앞다투어 도굴하려 하니 어찌 비극이 아니겠는가. 송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동총이 파헤쳐지고, 제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장공총이 파헤쳐졌다. 나라가 안정되어 있을 때도 이러한데, 몇 대가 지나서 나라가 망한 다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확실히, 여불위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모든 제왕의 능묘는 하나도 후인들에게 발굴되고 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살마들에게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백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례를 거창하게 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말 것을 권하는 사람인 여불위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이나 스타일에 맞지 않게 진나라의 국군을 위하여 호화롭고 거대한 능묘를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그는 진시황이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었던 중보(仲父)였었다.
그렇다면, 진실한 진시황릉은 도대체 얼마나 큰 규모였을까? 1962년 제8기 <고고> 잡지에 발표하 섬서성 문관회의 <진시황릉조사간보>에서 이런 내용을 볼 수 있다: 현장에서 내성원, 외성원의 유적을 찾을 수있고, 이는 이미 완성된 공사라는 것을 증명한다. 작은 면적의 범위내에서, 기와, 홍소토(紅燒土), 회신(灰燼)의 유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미 완공되었다가 불에탄 지면의 목조구조건축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곳에서는 항토기지와 기와가 발견되는데, 다만 홍소토, 회신은 없다. 이는 기초를 닦고 재료를 준비했지만 목조구조건축을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봉토의 북측에 큰 면적의 항토대기유적이 있다. 그러나 기와 ,홍소토, 회신은 없다. 이는 능의 묵쪽에 대형궁전을 위치시키려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항토기반을 만든 후, 대규모건축시공을 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전면적으로 공사중단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에 능안의 그 거대한 봉토는 진시황릉에서 종적을 찾을 수 있는 전부이다.
장구령의 <진시황릉>이라는 시에서 "도역여뢰분(徒役如雷奔)"이라는 말이 있다. 능을 만들기 위한 인원이 여산에 운집했다. <한서.고조본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유방은 "정장(亭長)으로 현에서 사람을 여산으로 보내는데, 가는 도중에 많이 도망쳤다." 이것은 진시황의 생전에 발생한 일이 아니다. 한나라때 학자인 응초(應劭)는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은 여산에 묻혔다. 그래서 군국(郡國)에서 사람을 여산으로 보내어 만든다." <한서.경포전>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경포는 여산으로 사람을 보내는데, 여산의 무리가 수십만명이었다." 이는 충분히 설명해준다. 하나는 진시황의 생전 수십년의 시간동안 아예 수십만명의 형도(刑徒)를 모아서 여산에 자신의 능묘를 '예수'한 일은 없는 것이다. 둘은 진시황의 사훙 유방, 경포등은 현지 민공을 데리고 여산으로 가는 것이 주요 임무였고, 그것은 지궁의 흙을 파내고, 파낸 흙으로 봉토를 쌓는 것이거나 혹은 지면건축물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셋째는 반란군의 공격으로 공사는 부득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궁, 봉토, 내외성원 및 극히 일부의 지면건축물을 완성한 외에 다른 공사는 아예 진행되지 못하였다.
진시황릉은 "미완성"공사이다. 많은 건축재료는 통일적으로 제작되지도 못했고, 할 수 없이 인근 군현에서 기존의 재료를 모아서 시급한 일을 해결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능네에서 출토된 '등궁수(登宮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있는데, 임동현 북쪽교외의 진나라때 민간소묘의 벽돌과 완전히 같다; 진시황시기에 이미 지양현의 건치를 취소했는데, 능안에서 일종의 '지양공규(芷陽工葵)'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이 발견된다. 이는 당시에 민간에 남아있던 벽돌일 것이다. 진시황릉 건축의 공기가 급박하여 조정에서는 천하에 명을 내린다; 무릇 기한을 넘겨 여산에 도착하는 자들은 일률적으로 참하겠다고. 그리하여 민공들이 속속 도망치자 유방은 '스스로 도착해도 죽겠다"고 생각되어 부득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리게 된다. 경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무리를 이끌고 강중으로 가서 도적이 된다." 여산공사가 없었더라면 농민의 반란도 없었을 것이고, 진나라도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진시황이 즉위하자마자 여산공사를 시작하였더라면, 농민은 역시 도망치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진나라는 일찌감치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산공사는 진왕조를 멸망시킨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중국은 은상 시절부터 명청 시대까지, 3000여년동안 제왕은 500여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명확한 제왕릉은 겨우 100여개이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대다수의 제왕능은 생전에 "예수"를 진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고종 이치는 낙양에서 죽는데, 그의 장지를 낙양으로 할지, 장안으로 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당현종은 40여년간 재위하였는데, 생전에 능묘를 "예수"한 바 없다. 원나라때의 제왕은 모두 사후에 깊이 묻고 능묘를 만들지 않았다; 북송제왕릉은 하나도 "예수"한 것이 없다; 명나라때는 영락제의 장릉, 가정제의 영릉, 만력제의 정릉을 생전에 "예수"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왕릉 예를 들어, 인종의 헌릉, 선종의 경릉, 영종의 유릉, 헌종의 무릉, 효종의 태릉, 무종의 강릉, 목종의 소릉, 희종의 덕릉, 숭정의 사릉등은 모두 사후에 만들어졌다. 청나라때 순치의 효릉, 광서의 숭릉은 생전에 "예수"한 것이 아니다. 제왕릉은 즉위한 다음해부터 '예수'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 문인들에게 역사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예를 들어 진장성, 진아방궁, 진시황릉등의 거대하고 화려한 시공장면을 묘사한다. 경심동백, 읍감귀신하도록 문학창작상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허구를 가미한다. 이것은 그들이 잘하는 일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라, 그러면 문인의 붓끝에서 어떤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글나 누가 <사기>에 쓰여진 것을 모조리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크게 실수하는 것이다. 일본의 족립희륙(足立喜六) 선생은 그가 쓴 <장안사적고>에서 정곡을 찔러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국역사상, 많은 진시황릉에 관한 문자기록은 "혹은 과장되고 혹은 상상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지면에 마음껏 펼쳐졌는데 이는 고대문인의 악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인은 당연히 사마천등 대문학가를 포함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만일 풍부한 상상력이 없어서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조그만치의 상상력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원래 진정한 문학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중국고대 제왕릉의 "예수"는 학술계에서 계속 관심을 갖던 이슈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제왕릉을 "예수"한다는 견해는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매체에서도 제왕릉의 "예수"에 관한 보도글이 있다. 너무 많아서 천지에 깔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이는 일종의 표면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왕릉 "예수"에 관한 문제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추가로 고고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설마 중국역사상 모든 제왕릉이 생전에 "예수"된 것인가? 확실히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능묘를 "예수"하는 현상은 어떤 때 나타나는가? 가장 먼저 "예수"한 것은 어떤 능묘인가? 어떤 제왕이 능묘를 "예수"한 바 있는가. 어떤 제왕이 능묘를 "예수"하지 않았는가? 어뜬 능묘는 "예수"할 수 있고 어떤 능묘는 "예수"할 수 없는가? 설사 같은 능묘가운데에서도 어떤 부분은 "예수"해놓을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예수"해놓을 수 없는가?
실제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중에서 이 문제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연구하면서 이렇게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가? 그 주요한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역대왕조의 "제왕"능묘는 대부분 건축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데, 특히 지궁의 핵심부분을 만든 장인은 대부분 거기서 살아나오지를 못했다. 외부에서 능안의 구조와 배치에 관한 고도의 기밀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진정한 기술적 자료가 남아서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보는 제왕능묘, 특히 지궁에 대한 정교한 묘사는 이률적으로 문인의 극단적인 '과장,상상'의 산물이다. 여러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는 이런 류의 문자를 '경전문헌(經典文獻)'으로 본다. 고대제왕릉 건축의 주요근거로는 보지 않는다. 이런 악숭 '순환발효'를 거쳐서 역사상 많은 진실하게 지하에 깊이 묻혀 있는 공사의 진상은 왕왕 곡해되고, 차단되고 나아거 일부 사람들이 역사를 '소설화' 하는 재료로 쓰인다.
능묘의 공사는 어쨌든 건축과학분야이다. 건축학자들의 일이다. 문인의 붓에서 창작된 건축은 허구이다. 그 허구는 여하한 조건의 구속이나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학자들이 만들어낸 건축은 실재하는 것이고 그 건축의 전 과정은 항상 객관적인 실제상황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건축의 형성과 변화는 모두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모두 자신의 발전법칙이 있다. 누구든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능묘건설에서, 지궁의 형식, 규모, 구조, 재료, 시공방법을 당시사회의 생산과 공사기술의 최고한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역대건축기술의 발전수준을 반영하지 않은 권위있는 저작에서는 이로 인하여 문인의 건축"상상"에 대하여 재대로된 '반격'무기를 갖지 못했었다. 현재 <중국고대건축기술사>는 이미 세상에 나왔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런 류의 기술적인 의문점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특별히 강조할 것은 건축학자의 마음 속의 제왕릉 "예수"는 곳곳에서 '공사시공'을 출발점으로 한다. 누가 제왕릉을 둘러싸고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어떤 책에서 말했든지 간에 그리고 제왕릉의 건축과정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건 간에, 당시의 공사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당시의 기술로 불가능한 것은 일률적으로 버려야 한다. 과거에 많은 건축에 관련한 고고문제에서,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건축학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극히 비정상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공사기술이 가능한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고, 속속 제왕릉건조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맹목적으로 떠든다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건축상의 일은 건축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업종이 다르면 잘 모르는 법이다. 건축은 기술과학분야이고, 엄격하고 정밀한 공사와 계산이 전제로 된다. 이것은 문인들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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