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천여년이래 진시황릉의 범위에 관한 사료는 아주 많았고, 아주 명확하다. 예를 들어, <양경도리기(兩京道里記)>에는 진시황릉의 "내원주오리(內院周五里), 외원주십일리(外院周十一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목(都穆)의 <여산기(驪山記)>에도, "진시황릉은 내원의 둘레가 오리, 외원의 둘레가 십이리(十二里)이다. 그 부지는 모두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족립선육(足立善六)의 <장안사적고(長安史迹考)>라는 책에서는 일찌기 "실측을 통하여 능의 높이가 25장, 잔존하는 높이 수척의 둘레담장(周垣)이 있는데 그 길이는 2300척, 남북2700척, 계산하면 그 주위는 만척에 달한다" 1962년 제8기 <고고>잡지에 발표된 <진시황릉조사보고>자료를 보면, 역시 "진시황릉 내성장(內城墻)의 장기(墻基)는 보존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동서길이가 578미터, 남북길이가 684.6미터, 외성은 동서974미터, 남북2173미터이다"라는 능원면적자료가 있다. 진시황릉의 내성 외성의 길이와 형성은 한나라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런 숫자를 얻은 것은 모두 현장에서 실측한 것이다.
"둘레의 담장이 존재하고, 그 부지가 모두 존재한다"는 상황하에서 실측한 숫자를 보면, 진시황릉의 능원부분의 위치는 원래 아주 분명했다. 높이 쌓은 봉토무덤이외에 내외 두 개의 성벽이 있고, 그 외에 유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대에 진시황릉의 내외성의 평면길이의 실측자료를 보면, 시간이 이를수록 보존되어 있던 유적은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정확할 것이다. 관련기록도 더욱 상세하다. 그러므로 논쟁이 더 적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상황은 급격히 바뀐다. 진시황릉 내성이 면적을 원래보다 1배나 늘여버린 것이다. 평면도 거의 정방형의 "口"모양에서 좁고긴 "口"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내성은 다시 "L"자형의 성벽으로 분할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능원은 더 이상 원래의 여러 사료기록에 나오는 "回" 모양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규칙없이 분할되고 대칭이 아닌 능묘평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전세계제왕능을 건설하면서 이런 사례는 절대로 찾아볼 수가 없다.
진시황의 능의 내성의 평면길이와 형상은 당대의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변경되었다. 진시황능원 자체의 길이와 형상은 원래 장방형의 둘레십일리"의 길이와 모양에서 정방형의 '둘레육십리"의 길이와 모양으로 바뀐다. 보라. 1981년 4월 20일 <인민일보>가 보도한 뉴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고학자들의 조사와 탐측결과, 능원 및 그 부속매장구역의 범위는 동서,남북 각각 15리(7.5킬로미터), 총면적 225평방리(56.25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고 되었다. 이 뉴스글의 놀라운 점은 세계를 향해서 시정공고를 냈다는 것이다 진시황릉의 범위는 원래의 둘레길이개념이 아니라, 능원점유부지의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것인 일종의 돌파이고 혁신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객관적인 실제검증을 버텨낼 수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는 엉터리이다.
"고고학자의 조사와 탐측결과"라는 몇 글자를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미는 것은 원래 이는 고고학적인 원칙에 맞게 신뢰할만한 기술과 과학적인 방법으로 힘든 과정의 업무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얻은 결론이라는 취지이다. 그러나, 소위 '조사탐측'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낙양산(洛陽鏟, 도굴에 쓰는 도구)을 가지고 진행한 탐측이 아닌가? 설마 겨우 보통의 약양산만을 가지고 정확하게 56.25평방킬로미터의 진시황릉의 점유면적을 계산해냈다는 말인가? 설마 이런 도구 하나를 가지고 지하의 모든 문물의 연대, 주인이 모두 진시황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진시황릉에 대하여 한 조사와 탐측이 정말 과학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병마용갱의 '성격규정'에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만일 이번 '조사와 탐측'은 그저 과학적인 단어에 불과하고 실질적인고고학적 '성격규정'의 역할이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다.
"조사와 탐측"의 방법을 통하여, 정확하게 토지를 획정할 수 있고, 그것이 예전 진시황의 능원점유지역이며 더 많지도 더 적지도 않다고 할 수 있다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 "56.25평방킬로미터"는 여하한 고고발굴보고서나 학술논문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과학적인 논증을 거치지 않았다. 진용관(秦傭館)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고고학자들이 모두 70여만개의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만일 뚫은 토지를 연결시킨다면 지구를 두바퀴나 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천문학적인 '탐측'의 총길이에 사람들은 그저 이 숫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렇게 큰 노력을 들여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설마 틀릴 리가 있겠는가? 고고학자에 대한 신뢰에서 그들은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진실된 것이 아니다. 2007년 11월 24일, 악남(岳南) 선생은 글을 발표한다. 진용관의 정학화(程學華) 선생은 그에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거기에서는 단지 10만개의 구멍을 뚫었을 뿐이라고. 2009년에 출판된 <원중일전(袁仲一傳)>의 76페이지에는 구멍을 뚫은 수량이 실제로는 겨우 5만개라고 밝히고 있다. 어떤 때는 70만개를 뚫었다고 하다가, 어떨 때는 10만개를 뚫었다고 하고, 다시 어떤 때는 5만개를 뚫었다고 하다니. 같은 통계숫자가 어찌 이렇게 세 가지의 다른 내용으로 표시된단 말인가? 구멍을 뚫은 수량에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진용고고팀이 실제업무에서 많은 허위와 부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구멍을 몇개 뚫었느냐는 것 자체가 불분명한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구멍을 뚫는 방법으로는 근본적으로 어떤 실질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릉고고팀은 대외에 정식발표한 자료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수십년동안, 고고학자들은 낙양산을 이용하여 근 6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진시황릉구역에 70여만개의 구멍을 뚫었다. 과학적인 성격규정범위가 없으므로 결과에서 효과는 미미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계속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최소한 200년의 시간을 들여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를 보면, 당초 그런 "5-70만개의 구멍을 뚫었다는" 것은 바로 "56.25만평방킬로미터"라는 진시황릉구역이라는 주장이, 단지 진용고고팀의 꿈과 같은 '구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일종의 진정한 고고학과는 관련없는 선전과 포장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허구의 상황이 8년간 지속되면서 원중일 선생이 쓴 <진시황릉고고기요>라는 글에서, "56.25평방킬로미터"진릉구역이라는 말이 참신한 면목으로 대중에게 나타났다. 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릉은 원래 2중의 담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미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이 되고 마치 이미 학술계의 정설이 된 것같다. 중산왕릉의 동판조역도(銅版兆域圖)가 나타난 이후, 진시황릉에 몇 개의 담장이 있는지에 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조역도상에 새겨진 2중 회(回)자형의 담장을 문자로는 단지 "내궁원(內宮垣)', '중궁원(中宮垣)'이라고 쓰여 있다. 이를 가지고 추리해보면, 반드시 '외궁원(外宮垣)'이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주석으로 이렇게 썼다. "섭신민(聶新民)이라는 선생이 원중일 선생과 얘기를 나눌 때, 하나의 대담한 가설을 내놓는다; 진시황릉의 외곽지역에 분명히 또 하나의 외성원이 있을 것이라고. 진병마용갱의 동쪽 천여미터지점에 쌍궐항토(雙闕夯土)의 대기(臺基)가 있는데, 아마도 그것이 외성원의 동문인 것같다는 것이다. 원중일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이어간다. "현재의 고고자료에는 외성원의 항토담장이 나오지 않는다. 소위 쌍궐항토대기라는 것은 현재로서 완전히 긍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문제는 확실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일, 진시황릉의 봉토 정점을 기준으로 하면, 동서남북의 4방향으로 각각 3,750미터가 연장되어, 남으로는 여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신풍원(新豊源)에 이르고, 동으로는 어지수(魚池水)에 이르고, 서로는 조배호촌(趙背戶村) 서쪽의 고하도(古河道)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7.5킬로미터인 자연병풍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자연병풍은 아마도 진시황릉의 외곽경계일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일종의 추측이고, 추가적인 확인과 검증이 필요하다. 진시황릉의 범위는 도대체 얼마나 넓을까? 만일 진시황릉의 외성항토담장 밖에 확실히 자연병풍이 있다면, 이런 주장은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 이 글자들을 보면 명백하다. <인민일보>에서 말한 "56.25평방킬로미터"의 능원구역이라는 것은 진용고고팀의 "조사와 탐측"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그 70만개의 구멍과도 당연히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기실, 원중일이 "진시황릉 봉토의 정점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3,750미터를 연장하면 남으로는 여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신풍원(新豊源)에 이르고, 동으로는 어지수(魚池水)에 이르고, 서로는 조배호촌(趙背戶村) 서쪽의 고하도(古河道)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7.5킬로미터인 자연병풍이 형성되는 것이다"는 가설의 유일한 근거는 "섭신민이 대왕진에 존재하는 진시황릉 외성원의 동문궐유적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6.25평방킬로미터"와 "동문궐유적지"의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있고, 하나라도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원중일 선생은 <진시황릉고고발견과 연구>라는 책에서 실사구시적으로 말한 바 있다: "섬서 고풍기공장 부근에 두 개의 남북으로 대칭인 고토퇴(高土堆)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능원의 동궐문(東闕門)일 것이라고 한다. 상세하게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토대(土臺)의 성격에 대하여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 책은 2002년 12월 섬서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것이다. 즉 현재까지 소위 "진릉 동궐문유적지"라는 핵심문제는 일종의 '추측,가설"의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원중일은 자기가 쓴 이 <기요>가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왕진의 그 "진릉동궐문유적지"와 소위 세번째 담장유적지에 대하여 확인이나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서둘러서 여러 "추측, 가설, 가능성"같은 류의 말만 가지고, 미정상태인 "56.25평방킬로미ㅣ터"라는 주장을 하룻밤만에 완전히 변질되어 '확정적'인 "56.25평방킬로미터"의 능원점유면적이라는 고고학적 결론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2006년 2월 28일 <서안일보>는 이런 글을 싣는다. "원중일이 말하기를, 진시황릉의 면적으로 현재 알고 있는 것은 56.25평방킬로미터이다" 장문립은 <진용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진시황릉 능운의 면적은 56.25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중에 과학적인 현장검증을 거친 결과 대왕진의 그 흙무더기는 아예 항토대기가 아니라, 지하의 두 개의 한묘(漢墓)의 봉토(封土)였다. 이에 대하여 원중일 선생은 또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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