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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은 왜 사후에 철저히 청산당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12. 21.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여러해 전에, <<장거정대전(張居正大傳)>>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한가지 일은 시종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장거정이 그렇게 공을 많이 세웠는데, 왜 죽은 후에 그렇게 철저히 청산당하게 되었는가?

 

장거정은 명나라때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개혁가이다. 자는 숙대(叔大)이고 어릴때 이름은 백규(白圭), 호는 태악(太岳)이었다. 호광 강릉(지금의 호북성) 사람이다. 그리하여 장강릉(張江陵)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는 가정제, 융경제, 만력제의 세 황제를 거쳤고, 만년에는 명나라의 군사정치의 대사를 처리했다. 나라를 10년간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장거정의 최대공적은 개혁에 있다. 명나라왕조를 위하여 필생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그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일조편법"을 실시하여 명황조가 중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재상지걸(宰相之杰)"이라고 존경했다. 고인의 평가에 의하면, "장강릉은 필생의 지혜와 정력을 다하여 국가를 위하여 일했다"고 했는데, 아주 정확한 평가이다.

 

그런데, 만력10년(1582년) 7월 9일 음력 6월 20일, 장거정이 병사한다. 만력황제는 그를 위하여 조회를 그만두고(輟朝), 상주국(上柱國)에 추증하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장거정이 죽은 후 4일째 되는 날, 어사인 뇌사정(雷士幀)등 7명의 언관이 반성(潘晟)을 탄핵한다. 반성이라는 자는 장거정이 생전에 추천하여 관리가 된 자이다. 이때부터 장거정청산의 투쟁이 시작된다.

 

이때 어떤 자가 전임 수보(首輔, 재상) 고공(高拱)의 <<병상유언>>을 바친다(고공은 장거정과 환관인 풍보(馮保)에 의하여 수보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억울한 점을 호소하면서 장거정의 여러 잘못을 열거한다. 요왕비(遼王妃) 왕씨도 상소를 올려, 장거정이 요왕을 모함했고, 왕부를 빼앗았다고 말한다(장거정이 고향에서 거주하던 곳이 죄를 받은 요왕의 왕부였다). 사례태감 장성(張誠)등의 인물들도 들고 일어나서, 장거정의 죄를 공격했다. 바로, "담장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함께 미는 형국"이 되었다. 이때의 만력제 즉 명신종은 장거정을 스승으로 존경하였지만, 마침내 장거정에게 죄상을 덮어씌우게 된다. "친왕을 능멸하고, 언관을 억제하며, 황제의 총명을 막고, 정권을 농단하며, 황상의 은혜를 저버리고, 불충을 도모했다"는 등등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리하여, 만력황제는 마침내 장거정의 집안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관직을 박탈하며, 생전에 하사한 글을 모두 박탈하며, 죄상을 천하에 공포한다. 거의 부관참시를 할 뻔했다. 그의 아들과 동생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만력제가 장거정을 청산하게 된 사정은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다.

 

만력11년 3월, 신종은 장거정의 상주국, 태사를 박탈하고, 다시 문총공이라는 시호를 박탈하고, 그의 아들인 금의위지휘 장간수(張簡修)를 서민으로 만들어버린다. 만력12년4월, 다시 조서를 내려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하고, 사례태감 장성, 형부우시랑 구순(邱橓), 금의위, 급사중등이 명을 받아 가산몰수하러 나섰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장성과 구순인데, 이들은 모두 장거정의 정적이었다. 그들은 악독했고, 사사로이 보복을 하려 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장거정의 집은 멀리 강릉에 있었다. 4월에 조서가 도착했고, 현지정부 즉 형주부(荊州府), 강릉현(江陵縣)의 관리들이 직접 장거정의 집을 봉쇄했다. 예전에는 이들은 "장씨집은 마치 조정처럼" 받들어모시고 아부했었는데, 세월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장씨집안의 자녀들은 모두 먹을 것 하나도 없고, 마실 물 한 사발 없는 빈 방으로 쫓겨났고, 문밖을 나설 수 없도록 했다. 5월 5일이 되어서, 구순등 흠차대신이 뒤늦게 도착했다.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수십명이 굶어죽어 있었다. 그 후에 다시 수색하고, 고문하며, 할 것은 다 했다. 그러나, 구순등은 여전히 불만이었고, 심하게 고문하며 다그쳤다. 장씨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집밖에 숨겨둔 "2백만냥"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장거정의 장남인 장경수(張敬修)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한다. 장무수(張懋修)는 우물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죽지를 않아, 다행히 목숨은 보전한다. 장경수가 자결하기 전에 혈서를 한통 남긴다. 천자에 이르는 긴 글인데, 읽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다: "오호라 하늘의 도리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호생지덕을 잃어버렸는가.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라. 헛되이 온몸을 바쳐 충성을 다했구나" 마지막으로 "구시랑"을 "살아있는 염라대왕"이라고 적고, "...어찌 사람을 이리도 혹독하게 모함하는가. 삼척동자라도 모두 긍휼이 여길 일이로다. 이제 어쩔 수 없어, 죽음으로써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장거정에게는 모두 6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 장경수, 장사수(張嗣修), 장무수, 장간수, 장윤수(張允修), 장정수(張靜修)였다. 장남 장경수가 자결한 후, 그의 처인 고씨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였고, 몇차례 목을 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차비(茶匕)로 자기의 눈을 찔러 왼쪽눈을 실명하였다. 이때, 장경수의 아들인 장중휘(張重輝)는 겨우 5살이었다. 나중에 고씨가 길렀는데, 27살이 못되어 죽었다. 장사수, 장무수등은 역시 사람이 드물고 장독이 있는 곳으로 유배를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또 한명의 아들인 장윤수는 집안이 망하고 사람들이 죽고, 큰형이 죽고, 일가사람들이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여러차례 죽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거의 미치광이가 된다. 그는 일찌기 옷을 몽땅 벗고, 맨발로 악독한 태양아래에서 부친의 유고와 부친이 아이들에게 내린 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만이 나중에 80세까지 산다. 장헌충이 형주성을 공격할 때 장윤수는 절식(絶食)하여 죽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것이 장무수라고도 한다.

 

장거정이 청산된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장거정이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고, 업무처리가 너무 엄했었다"고 한다. 장거정은 원칙을 정한 다음에 과감하게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같은 시기의 해서(海瑞)는 그에 대하여 "나라를 위하여는 온갖 머리를 짜내지만, 자기의 일신을 위하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주 맞는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장거정이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과거시험부정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인 장경수와 장무수의 진사시험답안지는 다른 사람이 대리작성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외에 장거정은 집안노비인 유칠(遊七)을 방종하게 두어, 매관매직하고, 세력을 부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구체적인 점을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런 일이 혹시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청산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장거정을 청산한 가장 주요한 의사결정자는 바로 만력제이다. 장거정은 10년간 나라를 다스렸는데, 바로 만력제가 나이어릴 때이다. 장거정은 "진주지위(震主之威, 임금을 떨게 만들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독점했는데, 원래 만력제에 속한 권력들이었다. 장거정은 국사에 힘을 쓰면서 대권을 장악했는데, 만력제의 마음 속에는 일종의 "주상을 능멸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만력제가 장거정을 청산하게 된데에는

 

첫째, 일종의 강렬한 반역심리가 작용했다고 본다. 장거정은 만력제의 스승이다. 어려서부터, 만력제는 장거정의 엄격한 구속을 받았다. 실제로, 만력제는 장거정을 매우 무서워했다. 그가 즉위한 이후에도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는 심리적으로 장거정을 무서워했다. 당시, 태감인 풍보가 명을 받아 만력제의 일을 처리했는데, 만일 만력제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풍보는 바로 자성태후(慈聖太后)에게 보고했다. 자성태후는 이런 말을 자주했다. "만일 장선생이 알면, 너 어쩔 거냐?" 이로써 볼 때 만력제가 장거정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수보(首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 황제의 일에도 그는 관여했다. 예를 들어, 만력7년, 만력제는 호부에 광록사어선에 쓰기 위하여 10만금을 내달라고 했다. 장거정은 상소를 올려서 "호부의 재정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 현재 운영하기도 빠듯합니다. 일단 사방에서 홍수나 가뭄이 들거나, 변방에서 의외의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한다. 그는 심지어 만력제에게 "일체의 필요없는 비용"을 줄이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 결과, 10만냥의 은자를 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궁중의 상원절의 등불행사, 꽃등비용도 모두 폐지되었다. 이후, 장거정은 자경궁, 자녕궁의 중건도 중지시키고, 무영전의 중건도 중지시켰다. 황제의 비용까지도 아끼도록 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비록 국가를 위하여 근검절약한다는 출발점은 좋았지만, 만력제로서는 기분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황제의 입장에서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장거정은 만년에 권력이 집중되어 황제조차도 무시했다. 부친이 사망하였는데도, 그는 부친을 위하여 수효(守孝)하지 않고, 상복을 입고 일을 처리했다. 당시로서는 이는 아주 불경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의 이런 행위(奪情, 형식은 황제가 탈정의 조서를 내려 수효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었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장을 치거나, 강등시키거나 심지어 유배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1년후, 장거정은 휴가를 신청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부친을 안장하겠다고 했다. 한번 떠나서 3개월이 걸렸다. 장거정은 시종과 호위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방관리들은 교외까지 마중나오고 교외까지 따라나왔다. 그리고 각종 부의금등을 받았다. 강릉성은 온 도시가 떠들썩했고, 장례식도 유례없이 성대했다. 그가 북경으로 돌아올 때, 황제와 양궁태후는 모두 사람을 교외까지 보내서 맞이했다. 그 예의는 이미 은총의 개념을 벗어났다. 황제는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당연히 만력제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장거정의 만년의 관리임용과 승진발탁이었다. 대부분 그의 개인적인 선호도에 따랐고,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황제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는 만력제도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고, 마음 속에 그림자가 있었다. 자연히 어떤 동작을 취하기 어려웠다. 장거정이 죽자, 비록 만력제가 겉으로는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금방 눈물을 닦고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십여년간의 불만과 원한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그의 첫번째 움직임은 바로 장거정이 임용한 관리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원한을 푸는 것이라면 뭐든지 했다. 그래서, 장거정 일가는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장거정이 청산을 당할 때, 만력제가 재위하는 동안에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겨우 우신행(于愼行)이라는 대신이 사건처리를 맡은 구순에게 편지를 하나 보냈다. 천자에 이르는 긴 글이었다. 그중의 한 마디 말은 생각할 점이 많다. "예전에 그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모든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칭공하고 그의 과오는 감히 말하지도 못하더니, 이제 그가 쫓겨나고 나니, 모든 조정에서 그의 죄를 찾고자 하고 그의 공을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 두가지는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다" 사실 역사상 관료사회에서 이런 일이 한 두개이겠는가.

 

재미있는 일은 우신행은 당시 장거정이 선정한 황제의 스승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탈정"사건때 장거정에게 밉보여 배척을 당했었다. 바로 이 사람만이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공개적으로 장거정을 위하여 말을 해주었다. 이후 명나라의 두 황제는 "점진적"으로 장거정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이는 바로 천계2년(1622년)의 명희종과 숭정3년(1630년)의 명사종이다. 그리고 이때, 장거정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신들 예를 들어, 예부시랑 나유의, 좌도어사 추원표등은 모두 장거정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심지어 장거정에 의하여 두 다리가 잘려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인 원한은 뒤로 하고, 정의를 세우려 하였으니 정치적인 품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후세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장거정 일가는 청산되었다. 그의 가산은 몰수되고, 겨우 80노모에게 빈집 한칸과 밭 천무를 주었는데, '황제의 커다란 은전'이었다. 물수된 재물은 모두 합쳐 110대였는데, 모두 북경으로 운송해 갔다. 그러나, 실제로 값나가는 물건은 없었다. 태감인 풍보의 집에서 몰수한 재산에 훨씬 못미쳤다. 이 점에 대하여 만력제도 약간은 실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