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

중은우시 2014. 10. 2. 00:49

글: 선병선(宣炳善)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진행된 제38회세계유산대회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3개국이 공동으로 신청한 실크로드(비단길) "장안-천산" 주랑도로망이 성공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길은 최초에 서한(西漢)의 장건(張騫)이 열었고, 중국과 중부아시아, 서부아시아 및 아프리카, 유럽등지와 비단등 화물을 운송하는 교통로였다. 기실, 당시 장안에서 출발하여 서역으로 가려면 남북의 두 길이 있었는데 각각 천산(天山)의 남쪽과 북쪽에 있다. 북쪽길은 옥문관(玉門關)을 지나 서쪽으로 가며, 남쪽길은 양관(陽關)을 지나 서쪽으로 간다. <한서>권96 <서역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문,양관에서 서역으로 가는데 두 길이 있다: 선선(善鄯, 지금의 신강 약강일대), 방남산(傍南山, 지금의 알긴산 곤륜산)에서 하(河, 알긴산 곤륜산 북쪽의 여러 강을 가리킴)를 돌아 서쪽으로 가면 사차(莎車, 지금의 신강 사차)로 가는 길이 남쪽길이다. 남쪽길은 서쪽으로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을 넘으면 대월지(大月氏), 안식(安食)이다. 차사전왕정(車師前王庭, 지금의 신강 투루판 서쪽)에서 북산(北山, 지금의 천산)을 따라 하(河, 지금의 탑리목하를 가리킴)를 돌아 서쪽으로 가면 소륵(疏勒, 지금의 신강 카슈카르)에 이른다. 북쪽길을 서쪽으로 총령을 넘으면, 대완(大宛, 지금의 費爾干納), 강거(康居, 지금의 발카시호와 아랄해의 사이), 엄채(奄蔡, 지금의 아랄해에서 카스피해의 사이), 언기(焉耆)에 이른다."

 

옥문관과 양관은 장건이 서역을 다녀온 후 한무제가 설립했고, 문헌에서는 합쳐서 "양관(兩關)"이라고 부른다. 옥문관은 천산의 북족에 있고, 양관은 천산의 남쪽에 있다. 중원의 전통적인 문화관념상 산의 남쪽을 양(陽)이라 하고, 산의 북쪽을 음(陰)이라 한다. 남쪽의 관을 양관이라고 명명한다면, 북쪽의 관은 '음관(陰關)'이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완전한 음양배치도가 이루어진다. 다만, 북쪽의 관은 '음관'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옥문관'이라고 불렀다.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좀더 분석을 해봐야 한다.

 

기실, "옥문관"은 바로 "음관"을 아름답게 표현한 칭호이다. 한나라때, 음양오행사상이 대거 성행한다. 고힐강 선생은 <한대학술사략>이라는 책에서 상세히 기술했다. 한나라때 서역지방에는 서왕모(西王母) 신앙이 있었다. 서왕모는 '음'을 나타내고, 동왕공(東王公)은 '양'을 나타낸다. 한나라때 마포화(麻布畵) 혹은 백화(帛畵)에 복희와 여와가 인신사미(人身蛇尾)로 교합하는 그림이 있다. 복희는 양을 표시하고 여와는 음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옥문관과 양관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고, 그 명명도 서한의 음양사상이 드러난다. 이 관을 '음'이라고 하지 않고 '옥(玉)'이라고 명명한 것은 은회(隱晦)의 문화적 의의가 있다. 즉, 옥(玉)은 피사(避邪)의 공능이 있다. 한나라때 귀족이 사망하면, 왕왕 몸에 옥을 놓아 두었다. 죽은 자에게 금루옥의(金縷玉衣)를 입힌 것은 바로 옥의 피사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침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후세의 문헌에서 '옥문관'은 '사문관(死門關)' 혹은 '귀문관(鬼門關)'의 대칭이 된다. 왕왕 전쟁,사망과 관련이 있다. <후한서> 권47 <반초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간 후, 반초도 서역에 사신으로 간다. 그리고 서역에서 31년간이나 생활했다. 이미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반초는 조정에 글을 올려 중원에 돌아가기를 청구하는데, 반초가 한 한마디는 '신은 주천군에 가기를 감히 원하지 않지만, 다만 원컨대 살아서 옥문관을 들어가게 해주시옵소서'이다. 이는 한화제를 감동시키고, 그리하여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살아서 옥문관을 들어가다(生入玉門關)'의 뜻은 바로 살아있을 때 옥문관이라는 인간세상의 귀문관을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당나라대의 변새시(邊塞詩)에서 옥문관은 이런 상징적인 의미가 명백히 보편화된다. 당나라때 대숙륜(戴淑倫)의 <새상곡>에는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가정치만음산(漢家旌幟滿陰山), 불견호아필마환(不遣胡兒匹馬還), 원득차신장보국(願得此身長報國), 하수생입옥문관(何須生入玉門關)". 이 시는 반초의 '생입옥문관'의 전고를 사용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는 굳은 신심을 드러냈다. 여러분이 잘 알고있는 당나라시인 왕지환(王之渙)의 <양주사(凉州詞)>는 이러하다: 황하원산백운간(黃河遠上白雲間), 일편고성만인산(一片孤城萬仞山), 강적하수원양류(羌笛何須怨楊柳), 춘풍부도옥문관(春風不到玉門關)". 시구에 나오는 '옥문관'은 봄바람도 불어오지못하는 사적(死寂)의 관이다. 이 시는 <악부시집>권22에는 이렇게 나온다: 황사직산백운간(黃沙直上白雲間), 일편고성만인산(一片孤城萬仞山), 강적하수원양류(羌笛何須怨楊柳), 춘광부도옥문관(春光不到玉門關)". 옥문관은 황사가 하늘을 가린 황량한 광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변새시인 잠참(岑參)의 <옥문관개장군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옥문관성형차고(玉門關城迥且孤), 황사만리자초고(黃沙萬里自草枯), 남린견융북접호(南隣犬戎北接胡), 장군도래비불우(將軍到來備不虞)" 여기의 황사, 고초는 모두 죽음을 투영하고 있다.

 

옥문관의 '사적(死寂)'과 비교하면 양관은 훨씬 '양광(陽光)'스럽다. 고대시문에서도 양관을 언급할 때면 호방(豪放)한 기운을 드러낸다. 기껏해야 상감(傷感) 정도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시인 왕유의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盡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이 마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거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옥문관과 양관이라는 이 음양'쌍관'은 웅재대략의 한무제에 의하여 명명된 후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문화적 상징의미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