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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중국고대의 지역차별

by 중은우시 2015. 1. 17.

글: 장소기(張小羈)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역차별은 대부분 식사하고 나서 한담을 나누는 거리이다. 어느 지방의 사람은 모두 사기꾼이라든지. 내가 저번에 어 사람을 만났는데, 인색해서 100위안을 끝까지 안내놓는다든지, 이런 이야기는 끝이없다. 사람들이 어느 지방 사람들을 조소하는 목적은 스스로 그걸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태가 좋지 않아져서 옛날만 못해서 그렇다고 여기지 말라. 기실 이런 습관은 진나라이전부터 있었다.

 

2천여년전의 춘추전국시대에 선진제가들의 글에도 여러 가지 특정지방을 조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으로 당시의 송(宋)나라(지금의 하남성경내)로 향한다.

 

 

 

선진시대의 우언가운데 멍청하고 웃기는 일이 있으면 대부눈 "송나라사람"이 저지른 일이다. 맹자,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등의 저작에 모두 그런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비록 이 몇몇 문파의 학술적 견해와 정치적 주장은 서로 다르지만, 송나라사람들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는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 즉 송나라사람은 멍청이라는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기로 하자.

 

<열자>에 이런 말이 있다. 송나라삶이 겨울에 햇볕이 비치자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따뜻함을 누리는 비법"을 국군에게 바치고자 한다. 그는 그렇게 하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송나라사람은 옷과 모자를 잘 만들었는데, 월나라로 가져가서 팔아서 큰 돈을 벌려고 했다. 그런데 월나라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있어서 옷과 모자가 필요없었다. 그래서 큰 손해를 본다; <한비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송나라사람이 이웃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비가 올 때 무너진 담장을 고치지 않았다. 그런데 집안에 도둑이 들었다. 그는 오히려 좋은 뜻에서 담장을 고치라고 한 이웃을 의심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바로 수주대토(守株待兎), 발묘조장(拔苗助長)같은 멍청한 일도 모두 송나라사람이 한 일이다. 송나라사람은 대부분 온통 멍청한 사람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설사 어느 분야의 기술에 정통하더라도, 중대한 문제에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멍청함은 여전하다.

 

송나라이외에 두번째로 지역편견을 당하는 억울한 나라는 정(鄭)나라이다(지금의 하남성 경내). 비록 법가의 대표이지만, 한비자는 우스개를 얘기하기 좋아했다. 그러나 법가의 우스개는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심원한 이치가 숨어 있다. 그러나 정나라사람에 대하여 한비자는 전혀 다르다. 무슨 이치있고 이치없고를 따지지 않고, 조소하는데 한도가 없다.

 

그가 쓴 글에 나오는 정나라사람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낸다. 적이 온다는 말을 듣자, 아직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어 기절한다. 적이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데 공포감을 못견딘 것이다. 그가 다시 살아나자, 마치 제2의 생명을 얻은 것같았다. 한 처는 남편의 옛 바지와 새 바지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새 바지에 구멍을 낸다. 완전히 똑같이 하기 위하여. 남편에게 주는 새 바지에 구멍은 낸 것은 그렇다고 치자. 이 처는 자라를 사와서는 강물에 넣고 물을 마시게 한다. 그러자 자라는 물 속으로 도망친다. 아 맞다. 여러분은 분명히 "정인매리(鄭人買履)", 와 "매독환주(買櫝還珠)"에 나오는 그 정나라사람도 알 것이다.

 

선진 제자의 글 속에 초나라사람, 제나라사람을 폄하하는 내용도 있지만('각구주검'의 초나라사람). 다만 숫자가 많지는 않다. 그리고 송,정 두 나라사람처럼 멸시하는 내용이 아니다. 어떤 때는 서로 다른 저작에서, 붙명히 한 가지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송나라사람'이 '정나라사람'으로 바뀐다. 이는 간접적으로 당시 전체 사회에서 이 두 나라사람의 '멍청함'에 대하여는 비교적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의 송나라경제는 특별히 약한 편이 아니었고, 문화수준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런 지역편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후세학자는 주로 정치적 악의때문으로 본다. 당시 그들 제후들은 명목상으로는 모두 주나라천자의 신하이지만, 그중 대다수는 모두 주나라의 왕실종친이거나 혹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의 공신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상왕조의 후예이다. 즉,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 이렇게 하여, 대다수의 주나라천자가 책봉한 이들 제후는 자연스럽게 송나라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차별로 나타난 것이다. 송나라와 이웃한 정나라도 똑같이 당한다.

 

비록 아주 이른 시기이지만, 맹자는 초나라사람을 "남만갈설지인(南蠻蝎舌之人)"이라고 부른다. 남방사람은 왕왕 북방사람을 "과자(侉子)"라고 부른다. '남북지쟁'의 최고조는 1천여년전의 송나라때 발생하였다. 북송말기의 소백온(邵伯溫)의 <소씨견문록> 권1의 기재에 따르면; "조종이 개국한 이래 기용한 장군, 재상은 모두 북쪽사람이다. 송태조는 돌에 새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세자손은 남쪽 선비를 재상으로 삼지 말라'"

 

섬서출신의 일대명상 구준은 '남방하국(南方下國), 불의다관사(不宜多冠士)". 심지어 장원을 선발하면서 마지막으로 확정할 때 남방출신의 고생(考生)을 산동 평도출신의 고생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그리고 이 일을 자랑하고 다녔다: "다시 중원을 위하여 장원 한 명을 만들어 냈다." 조정에서의 남북지쟁으로 조정에서 한 때는 "선발해서 쓰는 인재는 많은 경우 북쪽사람이다" "남방의 사대부는 침륜(沉淪)한 자가 많았다"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송진종때, 황제는 강서인 왕흠약(王欽若)을 재상으로 삼고자 했다. 하북출신의 재상 왕단(王旦)은 그의 합작파트너가 남방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조종조에 남방인이 국가를 다스린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극력 반대한다. 왕단이 나이들어 은퇴한 후에 왕흠약은 비로소 재상이 되고, 남방인이 재상이 되는 선구자가 된다.

 

왕흠약은 이에 대하여 원한을 가진다: 왕단이 막아서, "내가 재상이 되는데 10년이 늦어졌다" 다만 이 왕흠약은 간상(奸相)이었고, 남방인의 명예를 더욱 떨어뜨리게 된다.

 

저명한 왕안석 변법때는 더욱 재미있어진다. 변법을 주장한 것은 모두 남방대신이다. 보수적인 사람은 모두 북방대신이다. 당시 산서에 있던 사마광등. 우리는 이들 대신들의 대표적인 어록을 보도록 하자.

 

사마광은 왕안석을 이렇게 질책한다: "심술사복주(心術似福州)" 일거에 복건인을 전부 욕해버렸다. 도시 민인(閩人. 복건인)은 교활하고 음험하며, 초나라사람은 가볍다고 했다. 현재 두 재상이 모두 민인(증공량, 진욱)이고 두 참정은 모두 초인(왕안석, 당개)이니, 반드시 그들의 고향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것이다. 국가가 이렇게 되면 풍속이 어찌 순후해지겠는가?"

 

변법을 주장하지 않는 지식인 유지(劉摯)가 있다. 송신종이 그에게 왕안석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왕안석은 너를 칭찬했는데, 너는 모르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유지는 자신은 하북사람이고,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송나라때 사서에 북방습속에 관한 기록은 "질박충직(質朴忠直)", "경한충용(勁悍忠勇)", "근가색(勤稼穡)"이다. 남방에 대하여는 이렇다. 양절(兩浙)에 대하여 "진취(進取)에 능하고, 이익을 도모하는데 급하며, 기기지교출(奇技之巧出)이다", 광남(廣南)에 대하여, "민성경한(民性輕悍)", 강동(江東)에 대하여, "속습교취(俗習驕脆)", 소주(蘇州)에 대하여, "교사호치(驕奢好侈)", 장사(長沙)에 대하여, "백성들이 소송을 좋아하여,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으며 사천 영주(榮州)에 대하여, "성명이 전도되고, 예법을 모른다."

 

북송때 대신들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하는 것은 장강 아래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북송때 남방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항주도 관리들이 유배가는 곳이었다. 채경, 소동파는 모두 항주에 쫓겨간 적이 있다. 여기에서 한 마디 덧붙일 것이 있다. 북송,남송의 교체기에 하남인들이 대거 송나라황실을 따라 남으로 이주한다. 이 하남인들 중에는 황족, 고관, 명사, 거상, 부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송수도 임안(지금의 항주)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고, 항주일들이 감히 차별하지 못했고, 하남말을 배운다. 그래서 오늘날 항주의 방언에는 북방어의 특색이 섞여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지는 각자 생각해보기 바란다.

 

청나라 건륭제때 아주 유명한 학자 두광내(竇光鼐)는 절강향시(일설에는 복건향시)를 주재할 때, "남만무설지인(南蠻鵡舌之人)"을 시험제옥으로 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시험생들의 공분을 산다.

 

두광내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시를 한 수 지어서, 시험생들에게 읽도록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풍파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 시는 후세에 널리 제로(齊魯, 지금의 산동) 일대에 유전되는 <별만시(別蠻詩)>이다. 그 뜻은 남방의 오랑캐를 구분하는 시이고, 이 시가 남방의 학자들에게 준 살상력은 원자폭탄급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관각거관구기경(館閣居官久寄京)

조신승총출중성(朝臣承寵出重城)

산심소사심승서(散心蕭寺心僧敍)

한희화헌향효행(閑戱花軒向曉行)

정절자친최촌초(情切慈親催寸草)

평포붕배벽표평(平抛朋輩劈飄萍)

생신성세시서사(生身盛世詩書史)

만맥맹민모관명(蠻貊氓民慕關名)

 

시의 매 구의 성모는 완전히 같다(첫구는 G, 둘째구는 CH, 셋째구는 S, 넷째구는 H, 다섯째구는 Q, 여섯째구는 P, 일곱째구는 SH, 여덟째구는 M). 권설음과 절치음이 많다. 요구령(繞口令)과 마찬가지로, 많은 남방인들은 읽어내려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일은 제로지방에서는 미담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바로 제로의 사람들이 '남만'의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증명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어느 집단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