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성명(姓名)을 얘기하자면 현재의 사람들은 이미 부친의 성을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남녀평등이 점차 강조되면서 현재는 일부 자녀들이 모친의 성을 따르기도 한다. 다만, 아마 여러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성권력은 인류모계사회와 부계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중국은 주왕조이전에는 모두 모친의 성을 따랐다. 그뿐아니라, 주왕조이전에는 여성만이 성권력을 지녔다. 남자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그리고 성(姓)과 명(名)의 위치가 현재와는 반대였다. 이름이 앞에 있고, 성이 뒤에 놓였다. 현재 외국인의 칭호와 같은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왜 성의 부수에 '여(女)'가 많이 붙는지. 그것은 바로 중국인이 최초에는 여성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고, 성의 원래 의미는 '여자가 낳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특징은 주왕조에 이르러 끝이 났다. 그리고 중국에서 문자는 바로 이 시기에 출현한다.
원래, 주왕조이전에 성씨(姓氏)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남자는 씨(氏), 여자는 "성(姓)'이었다. 그리고 귀족남자만이 씨를 가졌다. 평민남자는 이름만 가지고 씨는 없었다. 그리고 성의 작용은 통혼할 수있는지를 결정했다. 주왕조이전에 성이 같고 씨가 다르면 통혼할 수 없다. 그러나 씨가 같고 성이 다르면 통혼할 수 있다.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다. 중국은 주왕조이전에 혼인의 질을 상당히 중시 여겼다. 근친혼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후대의 건강을 유지하고자 했다.
현재는 칠천개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고시대에 중국에는 팔대성(八大姓)이 있었다: 희(姬), 요(姚), 규(嬀), 사(姒), 강(姜), 영(嬴), 길(姞), 운(妘).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성에는 모두 '여'자가 들어 있다. 이는 이들 성이 최초에 여성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다.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는 성이 '희(姬)'이고, 염제(炎帝)는 성이 강(姜)이다. 우리는 황제와 염제가 중화민족의 시조라고 얘기하는데, 원래 희성은 411개의 성으로 변화한다. <백가성>의 전체 성씨 504개 중에서 82%를 차지하는 것이다. 희성 잧는 현재의 백가성중 비교적 작은 성이지만, 희성이 변화하여 만들어진 성은 백가성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그중 역사상 유명한 오제(五帝), 소호, 전욱, 곡, 요, 순 및 하우, 상(商)족의 조상 설(契), 주(周)족의 조상 농신 후직(后稷)등이 있다. 주왕조의 천자도 황제의 후예이다.
염제의 성인 강을 보면, 강성은 나중에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성으로 변화한다. 여(呂), 사(謝), 제(齊), 고(高), 노(盧), 최(崔), 정(丁)성등이 그것이다. 그중 강자아(姜子牙)는 바로 염제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정태급(丁太伋(혹은 정공급(丁公伋) 내지 강급(姜伋)이라고 칭한다)은 바로 정(丁)성 일맥을 개창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고시대의 명인들은 많은 경우 한 글자인지를 알게 해준다. 예를 들어, 요, 순, 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성을 붙일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름 혹은 씨로 불렸다. 이것은 바로 왜 굴원과 초왕이 모두 같은 성인 미(羋)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현재 굴원의 성은 굴(屈)인데, 초왕의 성은 웅(熊)이라고 알고 있는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친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씨(氏)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그저 씨로 칭했다. 성권력은 여성만이 가진 것이었다. 하희(夏姬)는 춘추시대의 여성이다. 그녀는 성권력을 가지고 있다. 성이 희이다. 그리고 하(夏)는 그녀 남편의 씨(氏)이다. 이를 보면 춘추시기에 이르러 여성은 성을 가질 수 있는 권력이 있고, 다만 출가한 이후에는 반드시 씨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언제부터 부친의 성을 따르게 되었는가? 사실상 황제때부터 그러했다. 그저 이때는 그것을 씨라고 불렀을 뿐이다. 왜냐하면 황제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씨가 있었다. 그리고, 귀족남자들만 씨를 가질 권리가 있었다. 씨는 직위(職位), 봉지(封地)등에서 왔다. 천천히 현재의 성으로 바뀌어 간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 순, 우는 바로 그들의 씨이다. 굴원의 '굴'은 씨이다. 전승된 것은 남성이다. 다만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귀족남자들은 여전히 씨권만 가지고, 성권은 없었다. 여성만이 성을 가질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진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성씨는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부계사회는 철저히 모계사회를 대체한다. 그래서 중국 모계사회는 비록 황제시기에서부터 부계사회로의 과도기를 겪지만 이 과도기는 3000년가량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ㅇ후에 완전히 부계사회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최대의 표지는 바로 성씨권이다. 이 시기에 성씨는 구분되지 않고 남자를 표지로 한다. 남자들이 성명권(姓名權)을 갖고 여자들은 그저 성권(姓權)만 갖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남자는 성도 있고, 이름도 있고, 자(字)도 있고, 호(號)도 있다. 그것은 모두 봉건사회에 접어든 후의 남자들의 악취미이다. 그리고 성을 앞에 두고, 명, 자는 뒤에 둔다. 과거에 성명을 쓰던 순서를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여성은 왕왕 성만 있다. 마씨, 유씨등등. 가리키는 것은 바로 여성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여성은 이름도 갖고 심지어 호도 갖는다. 예를 들어 이청조(李淸照),그녀는 성도 있고 이름도 있다. 그리고 그녀는 호도 가졌다.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이다. 다만, 절대다수의 여성은 성만 가지고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도 없다. 출가전에는 부친의 성을 따르고, 출가이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른다. 민국시대에 이르러 출가한 여자는 이태태(李太太), 유부인(劉夫人)같이 불린다. 기실 이는 어떤 남자의 처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민국시대까지 여성들은 성권력이 무시되었다. 그리고 현재 전세계의 많은 국가와 지구에서 여성은 시집을 가고 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미국, 러시아, 유럽각국이 그러하다.일본의 경우에는 벌률로 여성이 출가하면 반드시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홍콩도 현재는 많은 여성들이 출가한 후에는 남편의 성으로 고친다.
그래서 중국에 있어서 진정한 부계사회시기는 진왕조에서 시작하는 봉건사회 2000여년의 기간이다. 중화민국부터는 엄격한 의미에서 부계사회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현재는 다시 남녀평등사회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현저한 특징은 바로 성권력이다. 현재 비록 대부분은 여전히 부친의 성을 따르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친의 성을 따르고 있다. 다만 미래의 사회가 부계사회일지 모계사회일지는 사회의 발전을 봐야 한다. 최소한 현재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저 남녀평등시기이다. 이 과도기가 얼마나 길지 다시 삼천년을 갈 것인가? 아마도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남성편향일지 여성편향일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의 표지는 바로 증기기관의 출현이고, 공업혁명의 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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