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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주무왕(周武王)은 핼리혜성을 보았을까?

by 중은우시 2017. 3. 6.

글: 강효원(江曉原)


"무왕벌주(武王伐紂), 혜성출이수은인지병(彗星出而授殷人之柄)"


무왕벌주(주무왕이 은주왕을 정벌한 사건)는 비교적 많은 사서와 이론에서 중국역사상 최초의 '혁명(革命)으로 말하는 사건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하늘의 명을 바꾼다(改變天命)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하는 단어인, "개혁(改革)", "혁신(革新)", 혁제(革除)"의 "혁(革)"자는 모두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유가(儒家)에는 "탕무혁명(湯武革命)"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성탕(成湯)이 하걸(夏桀)을 멸망시킨 것은 기록이 너무 간단하여 이론적인 구조가 없다. 그래서 무왕벌주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론구성의 요점은 바로 "천명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다만, "천명"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바로 천상(天象)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왕벌주라는 이 '혁명'은 16개의 천상과 관련한 기록을 남긴다. 이들 기록에는 사실인 것도 있고, 허위인 것도 있다. 어떤 것은 현대천문학의 방법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두 주나라사람들과 그 후인들에게 무왕벌주의 이론구성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회남자. 병략훈>에 이런 기록이 있다: "무왕벌주(武王伐紂), ...혜성출이수은인지병(彗星出而授殷人之柄)" 후세에 전해진 성점학(星占學) 이론으로 보면, 이는 주무왕의 군사행동에 불리한 천상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혜성이 나타나고, 헤성의 자루(柄)가 동쪽에 있으면 서쪽을 쓸어버릴 수 있다." 즉, 주무왕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군할 때, 하늘에서 혜성이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빗자루와 같았다. 자루는 그들이 진격하려는 은나라사람들 쪽(동쪽)에 있다. 다만, 천문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기록은 혜성의 머리와 꼬리의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에 고귀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고인들이 기록한 천상은 '미신'용이다. 현대이 천문학자들처름 관측자료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약간의 정보도 아주 고귀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자금산천문대 대장 장옥철(張鈺哲)은 당시에 아주 희귀한 TQ-6형 전자계산기를 이용하여, 태양계 대행성의 헬리혜성궤도에 대한 이동을 계산하여, 헬리혜성의 3000년동안의 궤도변화추세를 모샤했다. 이 기초 위에서, 그는 중국역사서적에서 헬리혜성으로 볼 수 있는 각종 기록에 대하여 분석하고 고증했다. 장옥철의 연구에 따라 우리는 현재 알고 있다. 진시황7년(기원전240년)부터 1910년까지, 중국의 사서에는 29번의 헬리혜성 회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진시황7년이전에도 3번의 회귀기록이 있다. 당연히 헬리혜성의 출현을 기록했다는 것이 헬리혜성의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대중국인들은 이 32번의 기록이 하나의 혜성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헬리혜성의 '회귀'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옥철이 <천문학보> 1978년 제1기에 발표한 논문 <헬리혜성의 궤도변화의 추세와 그 고대역사>라는 논문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상세히 중국역사서정상 제1차헬리혜성의 기록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즉 기원전1075년의 그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그후 20년간 지속된 학술논쟁의 소재가 된다.


천문학자와 역사학자의 차이


장옥철은 논문에서 헬리혜성의 기원전1057년의 회귀와 앞에서 묘사한 <회남자.병략훈>의 "무왕벌주(武王伐紂), 혜성출이수은인지병(彗星出而授殷人之柄)"와의 관련성에 관하여 상세히 토론하고, 최후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설사 무왕벌주때 나타난 혜성이 헬리혜성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무왕벌주이 해는 바로 기원전1057년-1056년이다."


장옥철의 이 결론은 과학적 각도에서 말하자면 공격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전제는 "설사 무왕벌주때 나타난 혜성이 헬리혜성이라 하더라도"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때 출현한 혜성이 헬리혜성인지 아닌지를 단정하지 않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장옥철은 "주무왕이 헬리혜성을 보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역사학자에게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조광현(趙光賢)은 장옥철이 논문을 발표한 다음 해(1979년), <역사연구> 잡지에 글을 실어서 장옥철의 작업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 설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기존이 다른 학설들 보다는 진실되고 믿을만하다." 그러나, 조광현의 소개에서, 장옥철의 "설사" 두 글자는 무시된다. 그 결과 문과학자들은 대부분 "천문학자 장옥철이 무왕벌주때 나타난 혜성은 헬리혜성이고, 그래서 무왕벌주는 기원전1057년에 있었다"라고 오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문과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천문학보>와 같은 순수한 이과잡지를 읽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연구>는 당연히 읽어본다. 그래서 조광현의 글은 부지불식간에 "정옥철의 결론"을 변형시키고, 금방 문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다. 그후 20년간, 비록 국내외학자들은 무왕벌주의 연대에 대하여 여전히 여러가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지만, 기원전1057년설은 천문학자의 권위를 빌리고, 게다가 자금산천문대대장의 명망도 가져서, 가장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는다. 한 문화학자의 말은 바로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1057년설은 우리가 가장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우리의 머리속에 심어져 있다." 


무왕벌주때 헬리혜성을 보았을까?


장옥철의 헬리혜성궤도변화에 대한 결론은 믿을만하다. 그래서 우리는 헬리혜성이 기원전1057년에 확실히 돌아왔다고 믿을 수 있다; 다만 무왕벌주의 연대는 원래 확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무왕벌주의 연대에 대하여 '고정된 입장을 견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무왕벌주시에 나타난 혜성이 헬리혜성인지 아닌지는 연도를 통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선문(盧仙文) 박사과 뉴위성(紐衛星) 박사는 청년천문학자의 총명과 재지를 발휘하여,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아냈다. 방법은 이렇다. 무왕벌주의 가능한 연도가 포함된 100년간, 헬리혜성이 출현할 확률을 계산해보았다. 1999년, 이들은 <천문학보>에 >고대혜성의 증거확인과 연대학>을 발표했고, 이 이슈에 대한 최종결론이 나온 셈이 되었다:


천문학에서 회귀주기가 200년이상인 혜성은 "장기주기혜성"으로 부르고, 이런 혜성은 무왕벌주의 연도를 확정하는데 도뭄이 되지 않으므로 우선 고려대상에서 제외한다. 주기가 200년보다 적으나 20년이상인 혜성은 "헬리형 혜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혜성은 우리 태양계에 이미 23개가 있다(헬리혜성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 1701-1900년의 혜성표를 이용하면 이 기간중에 혜성꼬리가 있는 혜성은 모두 80번 나타났다(彗星出而授殷人之柄). 그 중에서 헬리형 혜성은 6%를 차지한다. 만일 혜성의 등급을 3등급으로 한정하면(너무 어두운 혜성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가 없다), 이 비율은 다시 4%로 내려간다. 현재의 이론으로 말하자면, 근 4000년간 태양계에서 혜성이 나타난 수량은 균일하다. 그러므로 위 비율은 마찬가지로 무왕벌주의 논쟁대상인 연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


현재 이미 알고 있는 23개의 헬리형 혜성중에서 6개의 주기는 100년이상이다. 이것은 기원전1100년-1000년사이에 최소한 17개의 혜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중 어떤 혜성이 헬리혜성일 확률은 1/17도 되지 않는다. 다시 앞의 통계로 얻은 헬리형혜성은 4-6%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확률은 0.24%-0.35%이하로 줄어든다. 혹은 무왕벌주때 혜성이 헬리혜성일 확률은 0.3%가 되지 않는다. 주기가 100년이상인 혜성도 이 100년동안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 확률은 실제로 더욱 적을 것이다.


우리가 또 다른 7개의 천상기록을 통하여 얻어낸 무왕벌주의 연도는 기원전1044년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헬리혜성은 기원전1057년에 나타났으르모, 역으로 무왕벌주때 나타난 혜성이 헬리혜성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무왕벌주때 헬리혜성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