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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진(秦)나라와 서융(西戎)과는 무슨 원한이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6. 8. 15.

글: 리아Leon(狸爺Leon)


진나라와 견융(犬戎)의 첫번째 충돌은 서주(西周)말, 동주(東周)초에 발생한다. 이전에 우리가 주유왕(周幽王)이 포사의 웃음한번을 얻기 위하여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의 사건을 벌이다가 서주는 견융에게 멸망당한다. 동주의 군주인 주평왕(周平王)이 군주가 된 다음 해에 견융이 다시 침입해왔다. 주평왕은 막아낼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천도(遷都)해야했다. 이 기간동안 진시황의 선조인 진양공(秦襄公)이 심시도세(審時度勢)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친히 병력을 이끌고 주평왕을 호송하여, 희(姬)성 주천자의 혈맥을 이어가게 해준다. 주평왕은 보답할 것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견융의 땅을 진양공에게 분봉해주겠다고 허락한다.


"견융의 사람은 신용이 없다. 여러번 우리를 공격했다. 만일 네가 그들을 이길 수 있다면, 견융의 땅은 너의 것이다." 이는 주왕이 진양공에게 한 약속이다. 기실 이때의 주왕실은 세력이 약해서, 토지를 제후에게 분봉해줄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주평왕 자신이 바로 견융을 당해내지 못해서 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백지약속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평왕이 진양공에게 한 약속은 진양공에게 별장의 등기권리증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별장을 한 무리의 무뢰배들이 점거하고 있는데, 네가 그들을 몰아낼 능력만 있다면 이 별장은 네 것이 되는 것이다.


등기권리증을 받은 후, 진양공은 매년 견융을 상대로 전투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때의 진나라는 아직 굴기하기 전이었고, 견융의 군대는 대부분 전투에 능했다. 진양공은 죽을 때까지 견융을 물리칠 수 없었다. 이후 진나라의 국군은 대부분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목공(秦穆公)이 즉위하고나서야 진나라는 비로소 견융을 칠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진나라와 견융의 충돌이다. 진목공이 일찌기 5장의 양피로 초나라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어왔는데, 백리해등의 보좌를 받고, 진문공(晋文公)의 도움도 받아, 진목공시기의 진나라는 급속히 굴기한다. 진목공 말년에 이르러, 이미 견융과 일전을 겨룰 실력을 갖추게 된다.


진목공이 견융과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사람은 바로 융왕의 한 사신이다. 그 사신의 이름은 유여(由余)이다. 원래는 중원 사람인데, 나중에 범죄를 저질러 견융으로 도망쳐서 융왕에게 중용된다. 유여를 융왕이 진나라에 파견한 것은 아마도 연례적으로 무슨 교류회같은데 참가하는 것이었다. 쌍방의 우호를 표시하는 것이다. 진목공은 이 오랑캐의 사신에게 진나라의 강성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진나라 궁전을 보여준다. 원래 진목공은 유여가 진나라궁전을 보고 크게 찬탄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생각도 못하게 유여는 전혀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다. "우리 진나라 궁전을 보니 장관이라고 느껴지지 않느냐?" 그러자 유여가 대답한다: "당연히 장관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사는 만일 귀신에게 하라고 하면 귀신이 힘들어 죽을 것이고, 만일 백성에게 하라고 하면 천하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진목공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견융의 사신이 이런 말을 내뱉을 줄은. 그래서 멸시하는 마음은 완전히 거둔다. 이어서 그와 같이 지내면서 진목공은 유여가 대단한 인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뒤에서 신하들에게 말한다: "적국에 인재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위험이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유여를 진나에 남기고 귀국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유여는 견융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진목공은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융왕에게 많은 미녀를 보낸다. 이들 미녀는 모두 진목공이 신경을 써서 고른 것이다(친히 골랐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출 뿐아니라, 하나하나 청순하고 활발했다. 융왕은 이렇게 많은 이국의 특색있는 미녀를 얻자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놀고, 밤이면 미녀들을 끼고 놀았다.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때 진목공은 간첩을 보낸다. 견융에 유여가 적에게 투항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게다가 유여가 귀국하는 날짜가 자꾸 미뤄지자 융왕은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한동안이 시간이 흐른 후 진목공은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보고, 유여를 풀어주어 귀국하게 한다. 유여가 떠나기 전에 진목공은 거짓이지만 만류하는 모습을 보인다. 선생은 나와 함께 있어주면 안되겠는가. 그러나 유여는 자신은 융왕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진목공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 "그러지 않아도 너는 일찌감치 우리 사람이 되어 있다."


유여가 귀국한 후에 보니, 자신이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융왕은 미녀들만 끼고 정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융왕에게 간언한다. 융왕에게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유여의 말을 들은체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유여는 방법이 없자 진나라로 도망쳐서 진목공에 의탁한다. 진목공은 당연히 아주 기뻐하며 유여에게 많은 미녀와 재물을 하사한다. 그리고 그에게 고관이 직을 내린다. 마챈내 3년후, 유여가 계책을 내서 일거에 견융을 멸망시키고 융왕을 죽인다. 그리고 견융의 12국의 땅을 진나라가 병합한다. 


진나라와 융족의 제3차대전은 진소양왕(秦昭襄王) 시대에 일어난다. 이때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은 상국(相國) 위염(魏冉)과 선태후(宣太后)였다. 즉 그 이름도 유명한 미팔자(芈八子, <미월전>의 미월)이다. 진나라역사상 태후는 개인생활에서 모두 꺠끗하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태후는 바로 진소양왕시기의 선태후와 진왕영정시기의 태후 조희(趙姬)이다. 간단히 말해서 선태후는 대단한 여자이다. 아마도 그래서 후세에 드라마나 작품에서 그녀를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일찌기 의거(義渠)의 융왕과 삽십년간 사통한다.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그녀는 융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는다. 나중에 그녀는 다시 융왕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융왕을 유인하여 살해한다. 이렇게 하여 의거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진나라에 집어먹힌다. 이 이야기는 TV드라마같은 것에서 많이 얘기되었다.


의거를 멸망시킨 후, 견융은 더 이상 강대한 종족으로 중원국가와 싸우지 못하게 된다.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견융의 옛 부족들이 강력한 진나라에 고개를 숙이고 신하로 들어온다. 그렇게 하여 견융은 화하민족의 일부로 들어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