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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장평지전(長平之戰): 백기(白起)와 조괄(趙括)

by 중은우시 2016. 8. 12.

글: 리야Leon(狸爺Leon)





백기는 삼십여년간 진(秦)나라 장수로 있으면서, 70여개의 성을 공성하면서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후세인들은 그를 진나라의 왕전, 조나라의 염파, 이목보다 앞자리에 놓아 전국4대명장중 첫번째로 꼽았다. 그러나, 백기에게는 자랑스럽지 못한 이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얻은 "인도(人屠)" 즉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다. <사기.백기왕전열전>의 시작부분에 사마천은 우리에게 백기의 살인효율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소왕14년, 백기는 좌경장으로 한,위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이24만명을 참수한다; 소왕34년,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적군 13만명을 참살한다; 같은 해 백기는 조나라장수 가언(賈偃)과 대치하면서 2만의 조나라병사를 강물에 익사시킨; 소왕43년, 백기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5만명을 참살한다. 이 기간동안 백기는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영도를 쳐들어갔다. 얼마나 많은 초나라사람들도 백기의 칼아래 목숨을 잃었는지는 사료의 기재가 없다.


백기의 이름은 당시에 사신(死神)의 대명사였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지나간 곳은 풀한포기 살아남지 못했다. 새조차도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진나라 천하통일의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고, 그의 뒤에는 백만의 원혼이 소리없이 곡을 하고 있었다. 백기는 전적이 혁혁하나 최종적으로 소양왕에 의하여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당한다.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이 모든 것은 장평지전에서부터 얘기를 해야 한다.


진소양왕45년(기원전263년), 백기는 진나라군대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하여 야왕(野王)을 점령하여, 상당군(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와 한나라의 수도를 잇는 유일한 통로를 막아버린다. 상당군은 이미 진나라의 주머니 속에 들어온 셈이다. 한왕은 상당군을 계속 갖지 못할 바에는 아예 진나라에 넘겨주고 철군을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소식은 상당군에 전해진다. 태수인 풍정(馮亭)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성을 조나라에 바치자. 그렇게 하면 진나라는 반드시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조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와 맞설 수도 있고, 물러나서 스스로를 지킬 수도 있다.


풍정이 상당군을 바친다는 소식은 금방 조나라군주의 귀에도 들어간다. 이때 조나라의 국군은 조효성왕이었다. 효성왕의 할아버지인 조무령왕은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추진하여 조나라가 일약 진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군사강국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효성왕의 부친인 조혜문왕은 비록 조무령왕같은 담량과 기백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기용해서, 군주와 신하가 한마음이었다. 인상여, 염파, 조사등 충신들의 보좌하에, 조나라는 진나라에 대항하면서 밀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효성왕은 두 명의 선왕과 비교하여 차이가 컸다. 상당군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효성왕은 인상여를 불러서 물어보지도 않고, 염파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그저 자신의 외할아버지(혜문왕의 외숙이다) 조표(趙豹)와 자기의 숙부인 조승(趙勝)에게 물어본다.


조표는 상당군을 받았을 때의 위험을 지적하며, 만일 진나라와 조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승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전국4공자중 하나인 평원군 조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당군의 17개 성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고, 설사 싸운다고 하더라도 진나라에 백기가 있다면 조나라에도 염파가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효성왕은 조승의 건의를 받아, 풍정을 화양군(華陽君)에 봉하고 상당군을 받아들인다.


진소양왕은 이 일을 알고난 후 대노한다. 즉시 대장 왕흘(王龁)을 파견하여 상당군을 공격하게 한다. 상당군의 백성은 속속 조나라로 도망친다. 조나라의 대장 염파는 명을 받아 병력을 장평(長平)으로 이끌고 나가 진나라군대를 막는다. 기세등등한 진나라군대를 상대하면서 조나라군대는 첫전투에 장수와 병사를 잃는다. 염파는 즉시 전략을 조정하여 공격위주에서 수비위주로 바꾼다. 진나라군대의 도전에도 장평을 사수하며 나가싸우지 않았다.


이렇게 수비하다보니 3년이 되었다. 장평은 조나라에서 가깝고 진나라에서는 멀다. 조나라군대는 장평에서 군량미가 산처럼 높이 쌓여 쌀의 산을 이루고 있었으나, 진나라군대의 양초보급은 금방 문제가 나타난다. 염파는 이 점을 파악하고 진나라군대와 소모전을 펼친 것이다.


염파의 계책이 곧 성공할 때가 되었는데, 효성왕은 기다리지를 못했다. 효성왕은 암중으로 심복을 사신으로 진나라에 파견하여 평화협상을 벌인다. 그 결과 진나라의 국상 범수는 기회를 잡아 대거 선전공세를 펼친다. 이렇게 되자 원래 병력을 출동시켜 조나라를 도우려던 여러 나라들은 모두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진나라는 전방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후방에서 수단을 쓴다. 범수는 사람을 보내어 큰 돈을 들여 조나라에서 선전활동을 벌인다: 첫째, 염파는 이미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 둘째,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실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이다. 염파가 아니다.효성왕은 본래 염파가 지키기만 하고 전투를 벌이지 않는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유언비어가 퍼지자 결국 계책에 빠져들고 만다.


조사는 조나라에서 염파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대장이고, 일찌기 알(閼)에서 진나라군대를 대파한 바 있다. 조괄은 조사의 아들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없었고, 병법을 논하면 옳은 말만 했다고 하며, 조사도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사는 자신의 아들이 지상담병은 괜찮으나 진정 전투를 벌이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상여도 일지기 효성왕에게 조괄을 기용하지 말도록 권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는다. 항간에는 이미 소문이 돌고 있다. 진나라가 조괄을 두려워한다고. 이렇게 하여 조나라 전체 국민의 희망을 등에 업고 조괄이 전투에 나서게 된다. 오십만대군을 이끌고 죽음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진나라쪽에서 대장 백기는 이미 삼군총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조괄이 부임하자마자 진나라군대에 대한 맹령한 공격을 진행한다. 자신만만한 조괄을 상대하면서 진나라군대는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이며 거짓으로 조나라군대에 연이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암중으로 정예부대 2개부대를 보내어 조나라군대의 식량보급선을 끊는다. 승리에 취해서 조괄은 냉정하지 못했다. 진나라군대의 포위망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데도 계쏙하여 출격했다. 결국 식량이 끊어진 조나라의 대군은 진나라군대에 의하여 둘로 나뉘게 되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를 보살필 수 없게 된다. 조괄은 어쩔 수 없이 보루를 쌓고 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조나라의 대군이 포위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소양왕은 전국의 장정을 장평으로 보낸다. 그리고 전투참여인원은 모두 관직을 1등급 올려준다. 그리고 친히 전선으로 나가서 조나라의 지원병을 막아낸다.


구월이 되자, 조나라군대는 이미 식량이 끊긴지 46일이 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나라군대는 여러번 진나라군대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는 얻지 못했다. 나중에 조괄은 친히 전투에 나서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으려 한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다. 남은 40만 조나라병사는 진나라에 투항한다.


후인들이 조괄을 얘기할 때면 항상 그의 지상담병의 이야기를 꺼낸다. 마치 조괄과 조사를 "부친은 영웅인데 아들은 망나니"의 전형적인 사례처럼 얘기한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있다: 조괄이 위험을 무릅쓰고 출병한 것이 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효성왕이 조괄로 하여금 염파를 대체하게 한 것은 바로 염파의 소모전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조나라군대가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괄은 어쨌든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군대의 식량보급이 46일이나 끊긴 상태에서 조나라군대내에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조괄의 지휘하여 진나라군대와 생사의 전투를 벌였다. 이는 조괄이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록에 따르면, 조나라군대는 장평지전때 진나라군대에 이십만의 병력손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진나라군대의 대부분 사망은 후반에 일어났다. 이는 조괄이 군대를 이끌고 싸울 때 아주 강한 임전지휘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위난의 순간에 국면을 역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가 상대한 백기는 일찌기 양군대치전에 이 피끓는 젊은이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데리고 놀았던 것이다.


이런 논리로 추리해보면, 원래 조괄은 그저 조효성왕을 대신하여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일 뿐이다. 자세히 생각해보자. 조괄의 모친은 일찌기 효성왕에게 조괄을 기용하지 말라고 권한다. 그때의 조괄모친은 혹시 이미 멍청한 조왕이 자기 아들을 핍박해서 군대를 이끌고 죽으러가게 할 것을 안 것은 아닐까? 전체 장평지전의 실패요인을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조효셩왕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상당군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할 때 그는 현명한 신하를 부르지 않고 그저 친족의 의견만을 들었다; 전쟁초기에 그는 전투를 벌이면서 평화협상도 시도한다. 신하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평화협상을 위한 사신을 보낸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요한 순간에 장수를 바꾼다. 젊은 조괄로 노장 염파를 대체하게 한다. 의도는 일거에 진나라를 격파하겠다는 것이지만 그저 노나라 오십만대군의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만일 조괄이 정말 잘못을 범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임명을 받을 때 대왕의 앞에서 무릎을 꿀고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전투는 정말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염파 어르신이 싸워야 합니다."


총사령관 조괄은 전사했지만, 조나라의 병사들도 좋은 결말은 없었다. 백기는 상당군의 백성이 진나라에 불복하고, 조나라의 사람들은 성격이 자주 바뀌어 남겨두면 화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참초제근(풀을 뽑을 때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전체 전국역사상 최대규모의 일방적인 도살이 벌어진다. 사십만의 투항병은 모조리 갱살당한다. 공포적인 분위기를 퍼트리기 위하여, 백기는 그저 이백여명의 조나라 미성년자를 만겨, 그들을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죽은 자들이 체험한 공포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한 것이다.


이때 백기는 원래 이 기세를 살려 직접 한단으로 쳐들어가서 조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후방에 사건이 벌어져서 부득이 회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결국 백기가 자살하게 되는 도화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