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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고대 10대 미남의 최후는?

by 중은우시 2016. 11. 3.

글: 임염청추(林炎淸秋)


1. 반안(潘安)



반안용모복원도



"모비반안(貌比潘安)"은 중국인의 남자의 외모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반안은 서진(西晋)의 유명한 문학가이며 중국고대제일미남으로 불린다. 그는 유학가문에서 태어났고, 소년시기에는 부친을 따라 하남, 산동, 하북등지에서 살았고, 청년시기에는 낙양의 태학에서 공부한다. 20살때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반안이 수레를 타고 외출하러 나갈 때 여자들이 그를 보면, 그의 수레에 과일을 던져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리하여 반안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과일이 수레에 가득했다. 이것이 바로 "척과영거(擲果盈車)"고사의 유래이다. 당시의 추녀황후 가남풍(賈南風)은 조정대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태자를 모해하고자 한다. 태자가 술에 취했을 때, 태자로 하여금 글을 하나 쓰게 하고, 나중에 다시 반안으로 하여금 모반의 뜻이 담긴 문장으로 고쳐쓰게 한다. 나중에 가황후가 몰락하고, 사마륜이 정변을 일으켜 궁으로 들어와서 가황후의 일당을 모조리 죽일 때 반안은 낙양에서 피살된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이다. 그는 줄을 잘못서서 최후가 비참했다.


2. 난릉왕(蘭陵王)


고장공(高長恭)의 부친은 북제(北齊)의 문양제(文襄帝) 고징(高澄)이다. 난릉왕은 고장공의 작위이다. 난릉왕의 준미함은 여러 책에 묘사되어 있다. <북제서>, <북사>에서는 그에 대하여, "모유심장(貌柔心壯), 음용겸미(音容兼美)"라고 하였다. <난릉충무왕비>에서는 그에 대하여, "풍조개상(風調開爽), 기채소철(器彩韶澈)"이라고 적었다. <구당서. 음악지>에서는 그에 대하여, "재무이면미(才武而面美)"라고 적었고, <수당가화>에서는 그에 대하여 "백류미부인(白類美婦人)"이라고 적었다. 그의 모친은 신분이 미천해서 역사에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난릉왕은 항상 조용하게 지냈다. 전란의 시대에 왕후장상의 자제는 모두 전쟁터에 나서야 했다. 용모가 준수하여 겉으로 보기에 부드러워보이는 것은 그에게 큰 장애였다. 그리하여, 난릉왕은 사람을 시켜 무섭게 생긴 가면을 만들게 한다. 날카롭고 무섭게 생긴 가면을 만들어서 매번 출전할 때마다 얼굴에 쓰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적군을 겁주고 아군의 기세를 올려 주었다. 난릉왕은 비록 생긴 모습은 부드럽고 아름다웠지만, 북조시기에 문무를 겸비하고 지용을 모두 갖춘 명장이었다. 그는 "담량과 용기가 있어, 전투에 능했다" "삼군중 가장 용감했으며 백전백승했다" 그는 전투를 잘하여 연전연승하며 전공을 세웠다. 일상생활에서 난릉왕은 관후하고 인자했다. 그러디보니 군대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난릉왕의 비극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나무가 너무 빼어나면 바람에 꺽이는 법이다. 공로가 너무 높아서 황제를 덮을 정도가 되면 화가 미치게 되어 있다. 결국 북제후주 고위의 질투로 무평4년(573년) 고위에 의하여 사사된다.


3. 송옥(宋玉)


송옥의 미모는 세상사람들이 다 알았다. 그는 초나라 굴원의 제자로, 초사부의 대가이며, 유명한 풍류재자이다. 당시에 대부를 지냈다. 그의 작품에는 <풍부>, <고당부>, <신녀부>, <등도자호색부>, <대초왕문>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신녀부>이다. 인간과 신이 서로 사랑하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후인들에 여러번 무대에 올렸다. "송옥의 성취는 비록 굴원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는 굴원의 시가예술을 직접 계승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사물을 묘사하는데 세밀하고 정치했으며 서정과 사경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켰다. 초사와 한부의 사이에 서로 이어주는 작용을 했다. 후인들은 굴송을 나란히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보아도 송옥의 문학사상에서의 지위를 엿볼 수 있다." 역사상 유명한 고사인 "하리파인(下里巴人)" "양춘백설(陽春白雪)", "곡고화과(曲高和寡)", "송옥동장(宋玉東墻)"등의 고사는 모두 그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전222년 초나라가 멸망하고 송옥도 사망한다. 향년 76세이다.


4. 한자고(韓子高)


한자고는 남북조때 진(陳)왕조의 사람이다. 원래의 이름은 만자(蠻子)이다. 그는 출신이 한미하여 대대로 신발을 만드는 일을 했다. "당시 자고의 나이 16살이었는데 아직 총각이었고, 용모는 아름다워서 깨끗하고 하앴다. 이마는 넓고 머리카락은 윤기가 있어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다" 진천(陳蒨)은 한만자를 자신의 시종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한자고'로 바꿔준다. 한자고는 성격이 온순하여 성섬성의껏 주인을 모신다. 진천은 황위를 계승한 후, 한자고를 우군장군에 봉한다. 천가원년, 다시 작위를 내린다. 천가2년, 원외산기상시, 장무장군, 성주자사로 승진시킨다. 다시 가절(假節)을 내리고, 정의장군, 동양태수의 지위도 준다. 나중에 진폐제가 즉위한 후, 한자고는 직위가 너무 높아서 결국 모반으로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 당시 나이 겨우 30살이었으니, 젊은나이에 죽은 것이다.


5. 모용충(慕容冲)


서연(西燕)의 국군(國君)으로 선비족이다. 그는 경성지색(傾城之色)을 가졌다고 한다. 오호십육국시기에 경국경성의 제일미남자이다. "도교에서는 그가 봉황성군에게 잘못을 하여 인간세상으로 내려보내진 것이라고 하였고, 불교에서는 그를 수라옥면, 백의승설, 검지장안이라고 하였다." 태원9년(384년), 모용충은 하동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한다. 모용충은 병력을 이끌고 그의 형인 모용홍(慕容泓)에게 의탁한다. 얼마후 모용홍이 서연을 건립하고, 같은 해 육월, 고개, 숙근숭등이 모용홍을 죽이고, 모용충은 황태제로 세워서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한다. 태원10년(385년), 모용충은 아방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갱시로 고친다. 태원11년(386년), 선비족은 모두 모용충에 불만이 많았다. 나중에 그는 좌장군 한연(韓延)에게 피살된다. 죽은 후에 위황제(威皇帝)의 시호를 받는다.


6. 독고신(獨孤信)


본명은 독고여원(獨孤如願)이고, 역시 선비족이다. 보기에 선비족은 미남을 많이 배출한 듯하다. 서위(西魏)시대 북주(北周)의 장수이다. 독고신은 용모가 준수하고 의표가 당당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서위가 건립된 후, 독고신은 위대장군, 도독삼형주제군사, 대도독, 형주자사등의 관직을 받는다. 군영에서는 "독고랑(獨孤郞)"이라는 미칭을 듣는다. 풍도가 뛰어날 뿐아니라 정치적인 수완도 좋았고, 군사적인 재능도 있었다. 정치적인 업적이 출중하여 역사상의 개국공신들과 마찬가지로 독고신은 일생동안 전공이 탁월하였으나 최후를 선종(善終)하지는 못했다. 서위 말년, 그는 배척을 받아, 북주가 개국될 때 진공 우문호의 핍박을 받아 집안에서 음독자결한다. 그때 나이 55세이다.


7. 자도(子都)


공손자도(公孫子都)는 춘추시대 제일미남자이다. 정(鄭)나라 사람으로 귀족출신이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다: "산유부소(山有扶蘇), 습유하화(隰有荷花), 불견자도(不見子都), 내견광차(乃見狂且)" 당시에 '자도'는 미남의 대명사였다. 여러 여자들의 백마탄 왕자였고, 꿈속의 정인이었다. 정나라가 허(許)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영고숙(潁考叔)은 자기편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그러자 의심의 눈초리는 공손자도를 향한다. 그만이 영고숙을 쏠 기회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장공은 매우 화가나서 공손자도를 죽이고자 했으나, 신하들에 의해 제지당한다. 나중에 영고숙의 장례식때 정장공은 수레의 거원(車轅)을 무덤에 배장하겠다고 한다. 춘추시대에 전차 1대는 지금의 명차 1대와 비슷하다. 부장품으로 들어간다면 아깝지 않을 수 없다. 전공이 혁혁하다고 자부하는 자도는 불만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장공에게 왜 수레를 자신에게 하사하지 않는지묻는다. 그러자 화가난 정장공은 화살 하나를 공손자도의 면전에 던진다. 바로 영고숙을 죽인 그 화살이다. 생각지 못하게, 공손자도는 이 일로 인하여 자결한다. 군주에게 비판을 받았다고 하여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속이 너무 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 위개(衛玠)


진(晋)왕조 제일의 미남자이다. 서진 진무제 태강7년(286년)에 태어났고, 부친 위항(衛恒)은 상서랑으로 저명한 서예가이다. 위개는 풍채가 아주 좋아서 사람들이 그를 앙모했다. "간살위개(看殺衛玠)는 역사상 저명한 사건이다. <진서.위개전>, <세설신어>등 고서적에 모두 기록이 있다. 위진 남북조때는 미남이 많이 나타났는데, 위개는 독특한 병적인 아름다움으로 세상사람들의 추종을 받았다. 매번 수레를 타고 나가면, 낙양의 주민들이 모조리 나와서 이 완벽한 인물을 구경했다. 매번 교통이 마비되곤 했던 것이다. 나중에 위개는 수도 남경으로 옮기는데, 원래는 고향에서의 소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남경성에는 그의 팬이 더욱 많았다. 자주 나타나서 위개를 둘러싸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위개는 원래 병이 많고 약했다. 이런 환경에 놓이니 심신이 피로하여 버틸 수가 없어서, 불행히도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팬들도 금도를 지켜야 한다. 우상에게 스트레스가 되도록 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9. 송문공(宋文公)


춘추시대 송나라의 국군이다. 이전에 그는 송나라의 공자포(公子鮑)에 불과했다. 그가 군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한 여인의 도움때문이다. 이 여인은 바로 송문종의 계조모이다. 중년에 과부가 된 왕희(송양공의 비)는 영준한 공자포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그와 사통하고 싶어했다." 공자포는 당연히 거절한다. 그래서 왕희는 온갖 방법을 써서 그에게 잘보이려 했고, 소공(송문공의 형)을 죽이고 공자포를 왕에 올린다. <좌전>에는 그가 "나랏사람들을 예로 대했다"고 적었다. <사기>에서는 그에 대하여 "현명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명군인 셈이다. 기원전589년(송문공22년) 팔월, 송문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송공공이 계위한다. 아마도 자연사한 것같다.


10. 혜강(嵇康)


"죽림칠현"의 영수인물이다. 삼국시기 위나라말기의 저명한 사상가이다. 혜강은 중국고대 소년미남작가이며, 시인이고 현학(玄學)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용모가 아주 영준했다. "용장봉장(龍章鳳姿), 천질자연(天質自然)". 역사에서 혜강에 대하여, "키가 칠척팔촌이며 풍자가 아주 빼어났다. 한번은 그가 숲 속에서 약을 캐고 있는데, 촌민들은 신선이 하범한 것으로 여겼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멋지게 생겼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씨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혜강은 중산대부를 지낸다. 사마소는 혜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데, 혜강은 그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사고, 원한을 맺는다. 262년, 사마소는 명을 내려 혜강을 사형에 처한다. 죽기 전에 수천수만명이 나와서 그를 배웅했다. 혜강은 마지막으로 <광릉산>을 연주하고 담담하게 목을 빼내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때 그의 나이 39살이다. 남경 서선교 남조묘에서 출토된 혜강화상전은 혜강이 자리아 앉아서 금을 타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기우가 헌엉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