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소우(史小雨)
중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수많은 열혈남아들이 나타나서 집안과 나라를 지킨 바 있다. 그들의 불후의 사적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많은 걱괸여영웅들도 나타난 바 있다. 사료를 종합해보면 그중 뛰어난 여영웅은 10명으로 추릴 수 있다:
1. 부호(婦好)
중국역사상 최초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여영웅이다. 상(商)왕조이 무공은 상고종(商高宗) 무정(武丁)때 전성기에 이른다. 무정은 일련의 전쟁을 통하여 상왕조의 판도를 몇배 확대한다. 무정을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동서로 정벌에 나선 대장은 바로 그의 왕후인 부호였다.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해 여름, 북방변경에 전쟁이 발생하고, 쌍방은 대치하고 있었다. 부호는 스스로 나서서 병력을 이끌고 나가겠다고 한다. 무정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점을 치고서야 부호에게 병력을 이끌고 가도록 한다. 그 결과 대승을 거둔다. 그후 무정은 그녀를 총사령관으로 삼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동서로 정벌전쟁을 벌이며, 주위의 20여개의 방국(方國), 독립소국을 격파한다. 부호는 병력을 이끌고 싸움을 잘 했을 뿐아니라, 국가의 주요 제사를 주관하여, 자주 하늘에 제사지내고, 선조에 제사지내고 신천(神泉)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점복을 치는 관직도 맡는다. 상왕조는 미신을 믿는 국가였고, 소위 "국가의 대사는 제사(祀)와 전쟁(戎)이었다" 부호는 싸움을 잘 했을 뿐아니라 제사와 점을 치는 권력도 장악한다. 아마도 무정조차도 그녀를 약간 두려워했을 것이다.
2. 지소평(遲昭平)
서한(西漢)시대 농민의거의 건괵영웅이다. 지소평은 평원현 성남 사람이다. 생졸년은 고증할 수 없다. 지소평은 여모(呂母)가 반란을 일으킨 같은 해 가을, 수천을 하저중 현재의 평원성 서남에 모은 후 의거를 일으킨다. 관세에 항거하고, 아문을 소탕하며, 호신을 죽이고, 귀족을 약탈하며, 약한자들을 도왔다. 식량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준다. 이렇게 하여 한때 명성을 크게 떨친다. 이리하여 그녀는 여러 걸출한 농민의거지도자들 중에서 여성지도자가 된다. 국면이 바뀌면서 지황3년 즉 22년 여름, 지소평의 이원은 서이경(徐異卿)의 부대와 합하여 평원, 부평, 낙릉, 무체, 염산 등지에서 전투를 벌인다. 인원을 급속히 10만으로 늘어난다. 이 농민의거군은 군현을 공격하고, 탐관오리를 죽이며, 관아창고를 약탈하고, 지방감옥을 부수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무고한 백성들을 구해준다. 이는 왕망 통치집단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그들은 지방호족의 저택을 급습하고, 환관, 왕손, 공후에 타격을 가하며, 그들이 착취한 양식과 재물을 빼앗은 다음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하여 빈민들의 옹호를 받는다. 의거군의 횡행으로 왕망 통치집단은 정치적 기반이 흔들린다. 그리하여 지황4년, 23년 철저히 붕괴된다. 이렇게 지소평의 이름과 업적은 진한농민의거사에 이름을 남긴다.
3. 화목란(花木蘭)
화목란은 중국남북조시기에 전설적인 색채가 농후한 건괵영웅이다. 그녀가 부친을 대신하여 군대에 나간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고, 그녀의 이야기는 한편의 비장한 영웅서사시이다.
화목란(412년-502년)은 북위 송주(지금의 하남성 상구) 사람이다. 태무황제시기(424-452), 당시 북방유목민족 유연(柔然)이 계속 남하하여 변방을 괴롭혔다. 서한정권은 집집마다 1명의 남자를 전선으로 보내도록 명한다.
그러나, 화목란의 부친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전쟁터에 나갈 수가 없었다. 집안의 남동생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리하여, 화목란이 부친을 대신하여 군대에 나가기로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수년에 걸친 군대생활이 시작된다. 변방으로 가서 싸우는 것은 남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화목란은 신분을 숨기고 남자들과 함께 적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화목란은 결국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고, 십수년후에 개선한다. 황제는 그녀의 공로가 크기 때문에 그녀에게 관직을 내리려고 한다. 그러나, 화목란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에 효도를 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천여년동안 화목란은 중국인에게 존경받는 여성이다. 그녀는 용감하면서도 순박하기 때문이다.
4. 번리화(樊梨花)
번리화는 중국고대의 건괵영웅중 한 명이다. 화목란, 목계영(穆桂英)과 비교하면, 그녀에게는 신화적인 색채가 더 농후하다. <설당>, <설가장>에서 설인귀가 서부정벌할 때의 이야기를 하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 반역정신이 풍부하고 대담하게 이상적인 애정을 추구하는 고대의 여자를 언급하게 된다. 이야기의 시대는 당나라 정관연간이다. 즉 당태종 이세민이 당나라황제의 보좌에 오른 이후이고, 현재의 감숙성 무위를 중심으로한 서량국등 일부 서북소국이 당왕조의 통치를 받고자 하지 않아 당왕조에 무력으로 대항한다. 이에 대하여 당태종 이세민은 설인귀를 보내어 토벌하려 한다. 번리화에 관한 전설은 모두 이 역사적 배경하에서 발생한다.
5. 평양공주(平陽公主)
당고조 이연의 셋째 딸이다. 즉 이연의 정실부인인 두씨의 아끼는 딸이기도 하다. 그녀는 진정한 건괵영웅이다. 재능, 학식 담량이 모두 그녀의 남자형제들에 못지 않다. 이연은 자신의 셋째 딸을 무장 시소(柴紹)에게 시집보낸다. 이 시소는 당왕조 능연각24공신중 14번째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모략이 출중하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의 부대를 이기는데 능했다. 설거, 유무주, 왕세충, 두건덕등을 토벌하는데 모두 공을 세운다. 당왕조가 마지막 적수인 양사도(梁師都)를 물리칠 때 그가 총사령관이었다. 이연이 거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공주는 도처에 연락하여 수나라에 항거하는 반란군을 모집한다. 이 나이 젊은 여자가 뛰어난 담량과 재능으로 3개월여의 시간만에 4,5개의 강호에서 상당한 규모를 지닌 반란군을 끌어모은다. 평양공주가 이끄는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연이어 호현, 주지, 무공, 시평등을 점령한다. 이 여자가 총사령관인 반란군은 군기가 아주 엄했다. 평양공주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집행했고, 전체 군대는 군기가 확실했다. 난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던 시대에 이 군대는 사람들의 옹호를 받는다. 백성들은 평양공주를 "이낭자(李娘子)"라고 불렀고, 그녀의 부대를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불렀다. 평양공주의 이 당시 주요 임무는 이씨의 본산인 산서를 지키는 것이고, 그녀가 지킨 곳은 바로 낭자관(娘子關)이다. 낭자관은 지금의 산서성 평정현 동북의 면산(綿山)에 있다. 산서를 출입하는 인후와 같은 곳이고, 원래의 이름은 위택관(葦澤關)이었다. 평양공주가 수만의 '낭자군'을 이끌고 이곳을 지켰기 때문에 이름이 낭자관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6. 양홍옥(梁紅玉)
양홍옥(1102-1153). 송나라의 저명한 항금(抗金) 여영웅. 남편은 항금명장 한세충(韓世忠)이다. 회안 북진방 사람이고 원적은 지주(池州)이다. 지금의 안휘성 귀지현이다. 조부와 부친은 모두 무장출신이어서 양홍옥은 어려서부터 부친과 오빠들을 따라 무술을 익힌다. 양홍옥이 금나라병사를 물리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건염4년 봄, 금나라군대가 항주에서 노략질을 한 후 북으로 돌아간다. 한세충의 부대는 이미 긴급출동하여, 운하를 따라 수륙양안으로 나란히 전진했다. 앞다투어 경구 일대의 금산, 초산을 점영하고 김올술의 귀로를 차단한다. 그날 김올술은 한세충에게 전서(戰書)를 보내어, 다음 날 개전하기로 약정한다. 다음 날 새벽, 양홍옥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치미팔보금주금봉관을 쓰고, 쇄자황금갑을 걸치고, 반룡백옥대를 매고, 중군의 누선에 앚아서 전투를 지휘한다. 가장 격렬할 때, 양홍옥은 친히 북을 쳐서 사기를 돋군다. 그러자 송나라군사들은 사기가 백배아혀, 첫날 전투에서 금나라군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김올술의 군대는 황천탕 안에 갇혀 있게 된다. 한세충은 양홍옥의 계모를 써서, 적군보다 10배나 적은병력으로 8천의 송나라군대가 10만의 금나라군대와 싸운다. 그리고 송군은 금군을 48일간이나 포위한다. 그렇게 하여 명성을 천하에 떨친다. 황천탕의 일전으로 금나라군대는 간담이 서늘해저, 다시는 장강을 건너 남침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한세충과 악비, 장준이 함께 3로대군으로 북벌할 때, 양홍옥은 여병을 훈련시켜 큰 공을 세운다. 악비가 죽은 후, 한세충은 분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양홍옥과 항주 서호로 가서 은거한다. 1151년 한세충이 병사하고, 2년도 되지 않아 양홍옥도 우울하게 죽는다. 부부는 소제 영암산 아래에 합장된다.
7. 진량옥(秦良玉)
진량옥은 명나라 말기 전공이 탁월한 여성군사지도자, 민족영웅, 군사가이다. 중국역사상, 정식으로 황제로부터 여잔군으로 책봉된 건괵영웅이다. 일찌기, "백간병(白杆兵)"을 통솔하여, 평파(平播), 원료(援遼), 평사(平奢), 근왕(勤王), 항청(抗淸), 토역(討逆, 장헌충)등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여러공로를 세워서 대명주국광록대부, 태자태보, 태자태부, 소보, 사천초토사, 중군도독부좌도독, 진동장군, 사천총병관, 충정후, 일폼고명부인에 봉해진다. 사후에 남명조정에서는 시호를 추서하는데, "충정(忠貞)"
8. 당새아(唐賽兒)
명나라때 농민의거의 지도자이다. 명나라초기 당새아가 이끄는 농민의거는 명나라 영락18년(1420년)에 발생한다. 의거의 중심은 산동성 익도 일대이다. 당새아(생졸년미상)는 산동 포대 사람인 임삼(林三)의 처이고, 글을 약간 알았다. 영락연간, 명나라는 북경을 건설하면서, 회통하를 만들었으며, 몽골을 정벌한다. 그 자금이 많이 들었다. 산동은 부담이 가장 큰 지역중 하나였다. 게다가 매년 가뭄이 들어, 농민들은 나무껍질, 풀뿌리를 먹었고, 처를 팔고 자식도 팔았다. 노인과 아이들은 길거리를 떠돌고,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당새아는 18년 이월에 유신, 빈홍, 동언승등과 수백명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킨다. 익도의 사석붕채를 점거하고 금방 수만명으로 불어난다. 명나라 청주위지휘 고봉은 병력을 이끌고 진압하러 왔다가 맞아죽는다. 명성조 주체는 안원후 유승을 총병관으로 하여, 도지휘첨사 유충을 보좌하게 하여 경영의 5천명을 이끌고 밤을 새워 산동으로 가도록 한다. 사석붕채를 포위한다. 당새아는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며 채안에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으며, 급도(汲道)로 도망치려고 한다고 말한다. 유승은 그 말을 믿고 많은 병사들을 보내어 급도를 지킨다. 농민군은 밤을 새워 포위망을 돌파하며 유충을 죽인다. 계속 전투를 벌이면서 안구, 제성등지로 간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숫자가 많고, 산동도지휘 위청, 오산위지휘동지 왕진의 급습을 받아 삼월에 실패로 끝난다. 명나라조정은 당새아를 수색하여 체포하기 위하여, 산동, 북경등지의 수만명의 부녀를 체포한다. 그러나 당새아등은 안전하게 도망쳐서 행방을 모른다. 현지인들은 그녀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석붕채를 당새채라고 부른다.
9. 왕총아(王聰兒)
왕총아(1777-1798). 호북 양양(현재의 호북성 양번) 사람. 강호예인출신. 백련교의 난에 참가한 후, 그녀는 일찌기 군총지휘관을 맡았다 즉 팔로의군통수였다. 꽃처럼 아름답고, 덕행은 고상하고, 무예는 고강하며, 용기와 지모가 있는 여영웅이었다.
가경원년(1796년) 백련교 총교사의 신분으로 청나라말기의 저명한 농민의거를 지휘한다. 백련교의 난. 10여만을 이끌고 호북, 사천, 섬서, 하남의 4개 성을 종횡했고, 2년여간 용맹하게 싸웠다. 비록 최종적으로 의거가 실패하여 자살로 끝냈지만, 그녀가 이끈 의거군이 청나라통치자에게 준 타격은 침중했다. 청왕조 통치가 전성기에서 몰락기로 바뀌는 전환점이 된다. 중국농민전쟁상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0. 풍완정(馮婉貞)
풍완정은 청나라 함풍연간때의 사람이고, 북경 사장(謝莊)의 사람이다. 조적은 산동이다. 침략에 항거한 민족영웅이다.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도처에서 노략질을 했다. 19살의 풍완정은 부친 풍삼보(馮三保)와 함께, 민단을 이끌고 영국프랑스연합군을 막아낸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당시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저지르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런 폭력행위는 교외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원명원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장이다. 사장에는 무예에 정통한 풍삼보가 있었다. 그에게는 18살의 딸 풍완정도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육하에 무예를 익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는데, 모두 정통했다. 풍완정은 부친에게 말한다: 적은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대도장모의 장점을 활용하여, 적에게 다가가서 싸우면, 서양인들의 총과 대포는 제 역할을 못할 것이다. 풍완정은 청년들을 이끌고 마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울창한 수풀 속에 숨는다.
오후4시경, 사장에서 한번 실패한 영국프랑스연합군은 대포를 가지고 온다. 이번에 온 사람은 약 600명이었다. 적이 숲의 곁으로 왔을 때, 풍완정은 대돌ㄹ 휘두르며 용맹하게 앞장선다. 청년들을 이끌고 연합군을 향하여 돌격한다. 연합군은 돌연한 습격을 받자 아주 놀라고 당황하여 대오가 즉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들은 총을 쏘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쏠 수가 없었다. 그저 총에 붙어 있는 칼을 빼서 청년들과 격투를 벌여야 했다. 풍완정은 사람을 이끌고, 대도, 장모를 휘두르며 용맹하게 적을 베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버티지 못하고, 속속 패퇴한다. 교활한 적은 이 백병전의 곤경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서양총으로 사격을 한다. 풍완정은 적의 궤계(詭計)를 눈치챘고, 사장의 청년을 이끌고 계속 압박하여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서양총을 시종 쏠 수 없게 만든다. 이번 전투는 황혼까지 이어졌는데, 용맹한 사장의 청년들은 영국프랑스연합군 100여명을 죽인다. 나머지 적은 부득이 총과 대포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이번 타격을 받은 후, 다시 사장으로 오지 봇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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