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진황한무(秦皇漢武), 즉 진시황과 한무제는 역대제왕중 비견할 자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세(二世)만에 망했고", 한나라는 사백년간 존속한다. 두 왕조의 성패득실은 이 두 명의 제왕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통일전에 진나라는 중국의 서북쪽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그의 웅재대략으로 중국통일을 완성한다. 통일을 완성한 후, 진시황은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긴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문자, 화폐, 도량형의 개혁에 있지 않다. 통일된 국가에서 이런 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완전히 필요한 것이다. 다만 국가안전과 국가발전에서 진시황은 두 가지 정책을 결정한다: 남북분할(南北分割), 동향발전(東向發展).
남북분할은 바로 장성을 쌓는 것이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유목지구와 농경지구를 가로막아서 서로 분리시켜, 왕조의 생존공간을 안정시켰다. 장성을 쌓는 것은 당연히 필요했다. 다만 공사가 너무나 방대했고, 국력이 지탱해주질 못해서 결국 백성의 원망을 낳게 된다. 국가안전을 위한 공사가 오히려 국가를 해치는 공사로 되었다. 사실과 바램이 거꾸로 간 것이다.
동향발전은 바로 새로운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다. 당초의 진나라와 상대적으로 진왕조의 새로운 강역은 주로 동부였다. 육국의 국정은 아주 복잡했고, 정치적 불안정요소는 군사상의 승리로 소멸되지 않았다. 새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진시황이 못본척 할 수는 없었다.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의 6차에 걸친 출순에서, 동순이 4차이다. 여기서 알 수 있다. 진시황의 정치적 안목은 예민했다.
<사기>는 한인이 쓴 것이고, 진시황의 동순 목적에 대하여 여러가지 거짓의 요소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간단하게 진시황이 동방의 봉래산을 믿고, 장생불사의 약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단순화시키기도 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생각했다. 진시황의 제1차 순유는 낭야까지 간다. "제나라사람인 미불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바다의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이름이 봉래, 방장, 영주이고, 신선이 거주한다. 재계하고 동남동녀를 보내어 구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불에게 동남동녀 수천명을 붙여서 파견하여, 바다로 가서 신선에게 선약을 구하게 했다."
이처럼 방대한 진용을 보면 그의 커다란 결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선은 찾지 못했다. 선약도 얻지 못한다. 왜 실패했을까? 당시의 과학기술로 선인선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찾는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출순, 신선을 찾는 것을 자신이 하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두 가지 방식은 기실 한 가지가 같았다: "향동(向東)!" 동쪽으로이다.
사람을 많이 동원하는 것은 거의 개인의 소비목적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시황의 업적이 아니다. 진시황의 새로운 강역의 정치적 숨은 우환에 대한 인식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여러번 동순을 하고,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숨은 우환을 찾아내어 제거하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여전히 진나라를 다스리는 사고의 틀에서 진왕조를 다스렸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남북분할, 동향발전의 두 가지 전략이 쌍관제하(雙管齊下)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힘이 부쳐서, 왕조가 붕괴된다. 진시황 진이세 부자는 기실 '돌맹이를 두드리며' 건너던 '강'의 가운데에서 망한다.
진왕조의 탐색 및 성공과 실패는 한왕조에게 전철이 된다. 한왕조의 성공은 전왕조의 여러가지 탐색과 큰 관련이 있다. 한무제의 치국전략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서부개발'에 있다. 그는 게속 사람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고, 대거 서부정벌을 벌이며 몇차레 서순(西巡)을 한다. 그중 6번은 안정군(지금의 영하성 고원 일대)을 순시한 것이다. 의미가 큰 것은 한무제가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일찌기 신선을 찾고 선약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한 경로는 진시황과 전혀 반대였다: 동부의 봉래(蓬萊)가 아니라, 서부의 곤륜(崑崙)이었다.
특정의 역사조건하에서, 제왕이 신선과 선약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혼군(昏君)'만이 완전히 빠지는 정도에 달한다. '폭군'의 표찰을 걷어내면, 진시황과 한무제의 정치지혜와 원대한 지향은 절대로 '혼군'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말년의 한무제는 이렇게 곽광에게 말한다: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모두 요망한 말일 뿐이다."
진정한 정치가는 천하인의 웃음거리가 될 수 없고,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놀았으며,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천하인들을 데리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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