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대신 인상여는 당시의 위대한 외교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처한 시대는 기실 이미 전국말기로 진(秦)나라가 가장 강대하고, 조나라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다만, 인상여가 외교적으로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말의 함으로 그리고 그의 지혜와 담량을 가지고 조나라의 지도자인 조혜문왕(趙惠文王)이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고, 국가의 영토를 조그만치도 잃지 않았으며, 국보 화씨벽을 잃지도 않고 완벽귀조(完璧歸趙)하게 하였고, 민지회맹(澠池會盟)을 맺었다. 두 번의 외교에서 조나라는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인상여는 이로 인하여 상경(上卿)이 된다. 직위는 비록 조나라의 대장 염파(廉頗)와 동급이지만, 서열은 염파보다 앞섰다. 그래서 염파의 불만을 불러왔고, 인상여를 모욕주려고 생각하게 된다. 인상야는 그 소식을 들은 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거나, 염파만 만나면 멀리 피하곤 했다. 그러자 인상여 주변의 사람들은 불만을 느낀다. 인상여는 그들에게 염파를 피하는 원인을 설명했다: "진왕이 위세가 대단하지만, 나는 조정에서 감히 욕할 수 있고, 그의 신하들을 모욕줄 수 있다. 나 인상여가 비록 무능하지만 설마 염파장군을 겁내겠는가?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명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공존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래서 이렇게 참고 양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위급함을 앞세우기 때문이고, 개인의 사사로운 은원은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염파는 그의 말을 전해듣고 크게 감동한다. 그리하여 부형청죄한다. 이를 통해서 "장상화(將相和)"(장군과 재상의 사이가 좋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당시에 상대적으로 약소한 조나라의 인상여가 조왕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진왕의 앞에서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설마 인상여는 정말 죽는게 두렵지 않았단 말인가? 진왕이 정말 자신의 영토 안에서 닭잡을 힘도 없는 인상여를 겁냈단 말인가? 당연히 우리는 현재의 관점에서 인상여가 진왕을 겁내지 않은 것은 주로 3가지 방면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일찌감치 자신의 생사는 도외시했다. 둘째는 진왕의 면전에서, 오보이내면 진왕을 암살할 수 있다. 죽기살기로 싸운다면. 셋째는 그는 진왕이 일개 수행인원과 싸우려 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 생각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당시의 장면이 아주 위험하지만, 어쨌든 공개된 외교장소이므로 진황은 이로 인하여 천하에 욕먹을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상여는 진왕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여 인상여는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약소한 조나라가 외교상으로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염파는 진왕을 겁낼지 몰라도, 나는 진왕이 겁나지 않는다.
기실 이상의 분석에서의 원인은 모두 표면적인 것이다. 헛소리이다. 진왕이 인상여를 죽이지 않은 근본원인은 그가 거기에서 그를 죽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진나라가 강대하지만, 당시의 천하는 아직 진나라에 귀속되지 않았다. 외교관 1명을 죽이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하물며, 근본적인 원인은 조나라가 상대적으로 약소하기는 하지만, 조나라는 여전히 비교적 강대한 국가였다. 특히 염파같은 장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몇 번에 걸친 군사대결에서 염파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상여의 두번에 걸친 외교상의 위대한 승리는 염파가 이끄는 대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염파를 피했던 것은 당연히 그의 외교승리는 완전히 염파의 군사능력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부하에게 말한 그 말은 기실 염파의 귀에 전해지라고 한 말이다. 염파에게 나 인상여는 진왕도 두렵지 않다. 진왕의 면전에서도 외교상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완전히 조나라가 당신같은 위대한 장군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결하면 외교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고이래로, 약국에는 외교가 없다. 외교로 위대한 성취를 얻고자 한다면, 외교관으로서 강대한 적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강대한 군사력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냉병기시대에,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탁월한 군사지휘관을 가져야 강적으로 하여금 겁먹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외교수단으로 국가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마찬가지로 강대한 군사력이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떠난 외교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인상여가 진왕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가 진왕의 앞에서 위대한 외교승리를 거두고 역사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뒤에 염파같은 위대한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상여가 아무리 지혜롭더라도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게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헛수고였을 것이다. 그저 목숨만 잃게 되었을 것이다. 외교적인 승리를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염파의 이후에 인상여의 전설은 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한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필자는 중국당대의 여외교관 기인 부영(傅瑩)이 한 말이 생각난다: "장군이 말일 검을 뽑지 않았더라면, 외교관에만 의존해서는 섬을 회수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진정 외교와 군사의 관계의 실질을 꿰뚫어 본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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