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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삼국연의

<삼국연의>의 일기토방식은 진짜인가?

by 중은우시 2016. 5. 1.

글: 대상공회(大象公會)


<삼국연의>의 문학적 묘사에는 과장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무장일기토"라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었다.

청나라때의 고증대가는 사적, 필기에 기재된 무장의 일기토에 관하여 정리한 바 있다. 왕완정(王阮亭)이 <지북우담(池北偶談)>에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렇게 결론내렸다: "예로부터 정말 장수들이 싸우는 일이 있었다. 모조리 패관들의 헛소리만은 아니다." 비록 그가 찾은 사례가 많지는 않았고, 모두 합쳐서 20여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간적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었다. 최초에 발생한 것은 기원전7세기 춘추시대이고, 가장 늦은 것은 숭정연간이었으며, 명나라장수가 농민군을 토벌할 때 일어난 일기토의 고사이다.

조익(趙翼)이 찾아낸 첫번째 투장(鬪將)의 사례는 영웅기개가 넘치는 것이다. <좌전>에 기록된 것인데, 노국공자 계성자가 군대를 이끌고 거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상대의 우두머리인 거나를 생포한 후, "우리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쁜 것이지, 병사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라는 이유를 들어 도전을 제기한다. 그리고 좌우에 인원을 병풍처럼 둘러싸게 하고 서로 싸웠다(相搏)" 아쉽게도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좌전>의 판본에는 이 일대일대결의 기록이 없다. 볼 수 있는 기록은 그저 이 거나가 계성자에게 1년내에 2번 붙잡혔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확실하게 일대일대결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한서>에 나온다. 당사자는 바로 서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이다. 자연히 이 요청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유방이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지혜로 싸울지언정, 힘으로 싸울 수 없다>"라고 교묘하게 회피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국역사이래 최초의 일대일대결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조익이 고증한 첫번째 일대일대결이 성사된 것은 당대문헌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일대일대결이다. 바로 삼국시대에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 일대일대결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즉 여포가 곽사에게 제안한 대결이다. 그의 무력수치는 확실히 곽사보다 낫다. 다만 삼국연의에서처럼 과장하거나 파생작품이 나오는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저 "창으로 곽사를 찔렀고"(以矛刺中), 곽사가 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곽사는 부하에 의해 구출된다.

군벌혼전의 삼국시대는 역사상 무장들의 일대일대결의 첫번째 황금기였다. 우리는 비록 <삼국지>같은 정사의 기록에서 "삼영전여포"라든지 "관우투황충"같은 장면을 볼 수는 없지만, 손책과 태사자의 신정령에서의 대전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의 대장 안량은 정말 관우가 "말을 몰아 안량을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찌르고 그의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이것은 아마도 <삼국연의>독자들에게는 가장 의외로 여겨질만한 정사의 기록일 것이다.

삼국시대 이외에 우리가 잘 아는 여러 명의 당,송의 장수들도 일기토로 상대방 장수의 수급을 벤 기록을 남겼다. 거기에는 항금명장 악비도 포함된다. 수,당교체기에 이런 인재가 가장 많았다. 위지경덕, 진숙보와 설인귀는 모두 이런 용장이다. 그중 진숙보에 관한 기록이 가장 과장되어 있다. 매번 적측의 장수가 나와서 힘을 자랑하면, 진왕은 진숙보를 보내어 "만명의 무리가 보는 가운데 찔렀다". 이런 말이 비록 정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마도 문학적 성분이 들어간 것일 것이다.

 비록 무장의 일대일대결이 전쟁사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방이 '지혜로 싸우자"는 명목으로 요청을 거절한 유명한 고사도 있고, 대다수의 일대일을 제안하는 경우에는 상대방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온다. 그 상대방이 한족이든 아니면 변방의 이민족이든. 예를 들어, 수나라의 두영정이 돌궐의 칸에게 각각 장수 1명을 보내어 일대일로 대결하여 승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을 때, 쓴 이유는 바로 "사병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다. 돌궐칸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를 보면 일대일대결에는 무슨 '문화적 차이'는 없었던 것같다.

재미있는 것은 조익이 '적인(賊人)' 유천근(劉千斤)이 승려 혜통(惠通)의 일대일대결 제안을 받아들인 이야기도 적고 있다. 싸우는 방식은 진짜 킬과 창으로 하는 대결과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의 대결은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병기를 담요로 싸고, 재를 묻혀서 싸우는 것이다. 몸에 흰색이 많은 자가 지는 방식"이었다. 이 일대일대결의 결과 유천근이 지고, 그는 부하를 이끌고 조정에 투항한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점은 이 고사는 문인의 필기에 기록된 것이어서 정사만큼 신뢰도가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아마도 무장의 일대일대결중에서 가장 문아한 장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