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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삼국연의

<삼국연의>는 왜 석정(石亭)전투를 언급하지 않는가?

by 중은우시 2016. 7. 16.

글: 정정(丁丁)


삼국시대에 석정전투는 기실 아주 유명한 전투이다. 그리고 아주 멋진 전투이다. 당시 오(吳)나라의 총사령관인 육손은 주항, 전종, 주연등 저명한 장수를 이끌고 위나라의 조휴가 총사령관으로 가목, 주령, 왕릉이 이끄는 십만대군을 물리치고, 1만여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았다. 위나라의 총사령관인 조휴는 최종적으로 화병으로 죽었다. 당시, 육손이 만일 과감하게 주항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조위정권의 수도를 바로 취하고, 조위정권을 와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휘황하고 멋지며 보기 좋은 전투가 <삼국연의>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그뿐아니라, 동오와 조위간에 발생한 강릉전투에 대하여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전쟁을 잘 묘사하는 것이 장점인 <삼국연의>에서 왜 석정전투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삼국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작자가 석정전투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주요한 원인은 작자가 이릉지전의 참열(慘烈)함을 돋보이게 하고, 유비가 이릉지전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영광스러운 패배라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손오정권의 주요 장수가 모두 이릉지전에서 희생시켰다. 그래서 나중의 이릉전투에서 계속 써나갈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릉지전에서 희생된 손오의 많은 장수들은 석정전투의 진실한 역사에서 핵심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이릉지전에서, 작자는 촉한을 편들었기 때문에 최소한 5개 방면에서 고쳐 썼다:


첫째, 동오대장 감녕은 <삼국연의>에서 이릉지전에서 촉국의 만장(蠻將, 오랑캐출신 장수) 사마가(沙摩柯)에게 사살되었다고 적었으나, 진실한 감녕은 기실 이릉지전전에 병사했다. <삼국지>에서 감녕은 220년에 병사하는데, 이릉지전은 221년에 발발한다.


둘째, 손오의 주연, 반장등 저명한 장수는 <삼국지>의 이릉지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전사하지 않았다. 이릉전투이후의 강릉전투에서 주연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위측의 조진, 하후상, 장합등 고급장수들이 이끄는 대군과 6개월이상 혼자서 막아낸다. 조위대군은 결국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난다. 이렇게 하여 화하에 명성을 떨친다. 관우가 일으킨 강릉전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리고 주연은 스스로를 보전하였으니 관우보다 더 뛰어난 것같다. 다만 <삼국연의>에서 주연, 반장은 모두 전사한다. 이렇게 해버리니, 이어지는 동오와 조위간에 발생한 강릉전투를 써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핵심인물인 주연을 이미 이릉전투에서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관우가 화하에 명성을 떨치는 이릉지전을 일으켰다는 것만 알지 동오와 조위간에도 참열한 강릉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 이후의 석정전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석정전투에서 주연은 여전히 동오의 핵심장수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셋째, 촉한정권의 대장 부사인과 미방이 손오에 투항한 것은 <삼국지>의 사실이다. 다만 나중에 그들은 촉한으로 도망쳐 돌아가지도 않았고, 마충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두 사람은 손오에 투항한 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자 마충을 죽이고 촉한으로 도망쳐 돌아갔으나 유비가 처형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두 명의 대장인 범강과 당달도 마찬가지로 촉한정권으로 도망쳐 돌아가지 않았다.


넷째, 동오의 총사령관은 철군하고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하거나 심지어 촉한정권을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진실한 역사는 육손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한 것이다: 하나는 손유연맹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오는 단독으로 존재해나갈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조위가 자신이 아직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해올까 겁을 냈다. 어쨌든 이릉지전은 비록 손오의 대승으로 끝나지만 손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연의>의 작자는 제갈량의 재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육손은 제갈량이 파놓은 팔진도에 빠져 방향을 잃어서 공격할 수 없었다고 완전히 헛소리를 적어 놓았다.


다섯째, 쌍방군대는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은 출동시킬 수가 없었다. <삼국연의>에서 유비는 70만대군, 동오는 20만대군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실제로 과장이 너무 심한 것이다. 당시 촉한의 전체 인구가 백만가량인데, 노인고 어린아이를 빼고 나머지를 다 합쳐야 70만이 되지  않는다. 동오는 한번도 그렇게 많은 군대를 내보낸 적이 없었다. 설사 적벽대전이라고 하더라도 3만에 불과했다. <삼국지>에는 유비가 10만을 출병시키고, 동오는 약 6만을 출병시켰다고 적었는데, 비교적 신뢰도가 높다.


그래서, <삼국연의>에서 왜 동오의 활동이 아주 평범한지, 심지어 강릉전투와 석정전투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작자가 유비르 끌어올리기 위하여 동오의 많은 저명한 장수를 이릉전투에서 희생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발생하는 강릉전투, 석정전투등 저명한 전투에 핵심지휘관들은 바로 이들 소설이 희생시킨 장수들이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무리 <삼국연의>라고 신화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