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욱기(王昱祺)
기원전221년, 초봄, 모든 것이 새롭게 나올 때이다. 진시황은 바램이 있었다. 바로 이 해의 봄에 제나라를 취하여 팔백년 제후혼전 국면을 끝내고 대통일제국을 개창하는 것이다.
제나라의 개국군주는 여상(呂尙) 즉 강자아(姜子牙)이다.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강자아를 제에 봉하니 그가 강태공(姜太公)이다.
제나라는 공상업이 흥하고, 어염(漁鹽)의 이익을 가지고 서주시기에 국세가 흥성하고, 영토는 계속 확대된다.
춘추시기에 제나라는 제환공등 몇몇 능력있는 국군의 통치하에, 전체 산동반도를 집어삼키고, 국력이 급증하여 일거에 첫손꼽히는 대국이 된다.
전국초기에 전씨(田氏)가 여씨(呂氏)를 대체한다. 국호는 바꾸지 않는다. 제나라는 기적처럼 평온하게 과도기를 넘긴다. 실력이 강인한 새로운 제나라가 동방의 해변에 우뚝 섰다.
전국중기에 제나라는 세 명의 위대한 국군을 배출한다.
제위왕 시기에, 제나라는 마릉지전,계릉지전에서 연속으로 위나라를 격패한다. 위나라를 패주의 신단에서 끌어내린다.
제선왕시기에 제나라는 남으로 초나라를 격패하고 서로 진나라를 격패한다. 북으로는 한때 연나라의 도성을 점령하기까지 한다.
제민왕시기에 제나라눈 전국제8웅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국세는 전성기에 이른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점령한 겨우 2년후에, 오국이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한다. 제나라는 한때 겨우 2개의 성읍만 남긴다. 극성(極盛)에서 극쇠(極衰)로 바뀌는데 겨우 몇년이 걸렸다.
그후 전단(田單)이 복국을 하고 제나라는 연나라의 손에서 대다수의 옛땅을 빼앗아 온디ㅏ .다만 전성기의 세력범위와 비교하면, 제나라의 국토면적은 절반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제나라는 오십여년전에 복국한 이래 국책이 크게 바뀐다.
군사력에서 말하자면, 제나라의 3 이웃나라 초(楚)나라와 조(趙)나라는 분명 제나라보다 위였다. 연나라는 약간 약하다. 그러나 제나라는 기껏해야 연나라군대를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었지, 절대로 연나라 본토를 침범할 힘은 없었다.
초, 조, 연과 제나라의 연원을 보면, 제나라는 이 세 개 나라와 옛원한 새원한이 적지 않았다. 완전히 화합하는 것은 아주 곤란했다.
그래서, 제나라도 원교근공의 국책을 쓴다. 서쪽의 진나라와 연합하여 중간의 삼진에 대응한다.
이 정책이 집행된 전깅, 제나라는 아예 조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진, 맥구, 고당등지가 차례로 함락되고, 동시에 연라나도 그 틈을 타서 남하하여 제나라의 요성을 점령한다.
같은 시기에 조나라는 서쪽전선에서 진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계속 퇴각했다.
복잡항 형세 속에서, 제나라와 조나라는 화해를 하고, 조나라는 일부 영토를 되돌려 준다. 동쪽전선의 제나라로부터 철병을 한 후, 전력으로 서쪽전선의 진나라와 싸운다. 진나라도 연나라와 손을 잡고 조나라에 대응한다.
즉, 진나라는 연나라 제나라와 연맹을 맺고, 동서 양쪽 방향에서 중간의 삼진(위,조,한)을 상대한 것이다.
초나라는 노나라를 멸망시키느라 바쁘고, 강동지구를 경영해야해서, 이 체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가끔 상징적으로 합종연횡에 참가하곤 했었다.
그후 제나라의 국책은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다. 근 오십년간, 제나라는 한번도 군대를 나라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제나라는 어염의 이점을 살려, 나라는 편안하고 백성은 안정되며, 태평성대를 누린다. 민간에서는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타며, 닭싸움과 개경주를 벌인다. 호화사치스러운 기풍이 넘쳐났다. 전국시대에 제후들과 용쟁호투하던 형세와는 전혀 달라졌다.
임치성은 치하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시수(時水)가 흐르고, 크고 작은 두 개 성이 교묘하게 연이어져 건설되었다. 성안의 건축물은 크고, 교통대도는 성북쪽의 궁전을 중심으로 하여, 종묘, 관서와 각급관리의 주택이 모두 궁전의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성내의 길거리의 양쪽에는 오래된 나무가 하늘높이 솟아 있다. 그러나 이때는 모두 얼음이 걸려 있었다.
비록 전화를 입었지만 이때의 임치는 흥성하고 인구도 많고 경제도 번성했다.
진나라는 이미 5국을 멸망시켰고, 남은 제나라는 외로웠다. 제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어느 대장을 보내어 제나라를 멸할 것인지에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만일 실력으로 논한다면, 최선의 선택은 의문의 여지없이 왕전과 왕분 부자이다. 왕전은 조, 초 두 나라를 멸망시켰고, 왕분은 위, 연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들은 모두 절대적인 실력이있고, 진군의 사상자도 최소한으로 하면서 제나라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 두 사람은 너무 강대했고, 하나하나가 공로가 너무 컸을 뿐아니라, 부자간이기 때문에, 진시황은 절대로 왕전과 왕분 부자를 쓰는 걸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원래 중용되던 이신은 초나라를 공격할 때 항연에게 패배하여 버림을 받았다.
군사를 총괄하는 태위 위료는 전략수준은 아마도 왕전과 왕분 부자볻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한번도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한 적이 없어서 그에게 병사를 지휘하게 맡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장수재목을 잘 발굴하는 국군이다. 이번에 그는 새로운 인물 몽염을 생각한다.
몽염은 기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신인은 아니다. 이신이 초나라를 공격할 때, 몽염은 바로 이신의 부장이었다. 그 전투에서 이신과 몽염은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이신군은 참패하고, 몽염은 큰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인마는 보전했다. 나중에 왕전이 다시 초나라를 공격할 때 몽염은 여전히 부장이었다. 진시황이 몽염을 배양하려는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진시황이 몽염을 기용하는 것은 완전히 전공때문만은 아니다.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몽염과 몽의(蒙毅) 형제가 진시황에 대한 충성심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관례를 거행하기 전부터 진시황을 따랐고 그 후에 삼대 장애물을 제거할 때도 두 형제는 계속 진시황의 곁을 지켰다.
각 세력의 균형을 이루는 각도에서 보자면 진시황은 다른 가족에서 발탁하여 왕씨가족을 견제해야 했다. 이 면에서도 몽씨는 최우선 후보였다.
몽염은 삼십만을 이끌고 전진하여 제나라로 진격한다. 그는 진시황의 동방육국통일의 염원을 달성시켜줄 수 있을까?
진시황에 그에게 준 병력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신임은 왕분보다 훨씬 위였다. 왕분이 위나라, 연나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겨우 15만가량의 병력을 주었다.
제나라는 제왕건(齊王建)이 상국 후승(后勝)의 말을 듣고 한, 조, 위, 초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 진나라가 매번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때마다 오히려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어 축하해주었다.
후승은 조나라의 곽개와 같은 인물이다. 진나라의 황금뇌물을받고, 제왕건에게 강한 진나라와 결맹을 맺으라고 권하고 열국제후를 지원하지 말라고 권한다.
몽염이 거병하자 후승을 기실 아주 후회한다. 곽개는 결국 받은 재산을 박탈당하고 도중에 죽어버린 최후가 매일 밤 후승의 꿈에 나타났다.
후승이 후회할 정도이니, 제왕건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때 그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속히 주력 20여만대군을 모아서, 서쪽 전선 고당(高唐)으로 군사를 보내어 진군을 방어한다.
고당은 제나라의 오도(五都)중 하나이다. 전략적으로 주로 조(趙)나라쪽의 공격을 방어하는 곳이다. 고당은 조나라의 영구(靈丘)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조나라는 항상 영구에 양초와 물자를 쌓아두며,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선박과 기구를 대량 건조해놓고 있다. 조나라는 역대 이래로 이 곳을 제나라를 돌파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전에 오국이 제나라를 칠 때(五國伐齊), 악의도 이곳에서 제나라본토에 상륙한다. 그러므로 서쪽방어선 고당지구를 수비하는 것은 제나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고당을 만일 잃으면, 오도중 하나의 도를 잃은 것일 뿐아니라, 그 뒤로는 그럴 듯한 방어선이 없다. 진나라군대는 옛날 오국벌제의 국면을 재연하게 될 것이다.
제나라의 고당지구의 방어배치는 임시성이거나 황급히 준비한 것이 아니다. 수십년의 건설을 거쳐 이미 상당히 완비되었다. 부근에 있는 또 하나의 오도중 하나인 평륙(平陸)에서 신속히 지원군을 파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나라의 고당지구방어는 아주 견고하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몽염이 제나라를 공격하는 기점은 바로 고당의 건너편에 있는 영구에 두었다. 이곳에는 도하도구와 양초물자가 풍부하다. 그리고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가장 짧은 길이다. 만일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제나라를 공격하면, 길이 더 멀 뿐아니라, 설사 이들 무기와 물자를 옮긴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2,3개월은 더 필요하다.
그래서 몽염은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곳을 찾기보다는, 최소한 그도 이곳에서 시험적인 공격을 해보았다. 하다가 안되면 그때 새로운 공격포인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봄에서 한여름까지 몽염이 여러가지 방법을 쓰면서 제나라군대와 3개월여를 대치했는제, 제나라의 이 마지노선 앞에서 진나라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고,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몽염은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배후에는 빅보스 진시황이 있다. 중요한 순간에는 그를 도와줄 것이다.
진시황은 몽염에게 지원군을 보내준다. 또 다른 방향에서 제나라의 도성 임치를 위협하여 몽염에게 전략적인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미묘한 순간에 진나라의 최고장수 왕전은 관직을 사직한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사직한다. 군대내와 조정에서의 일체의 직위에서 물러났을 뿐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가 소년시대에 자랐던 빈양(頻陽)으로 가서 더 이상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자태를 보인다.
왕전과 진시황의 관계는 한신과 유방의 관계와 비슷하다. 당시에는 아직 '토사구팽, 조진궁장(兎死狗烹, 鳥盡弓藏)"이라는 말은 없었고, 더더구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의 방식도 없었다. 왕전과 한신의 서로 다른 최후를 보면 왕전의 판단력이 얼마나 기민했는지 알 수 있다.
왕전은 자신의 병권을 철저히 포기한다. 그리고 아들 왕분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 이신의 교훈이 있으므로, 진시황은 가볍게 누군가를 장수로 임명하지 못했다. 그는 왕분에게 진군 부대를 이끌고 몽염을 지원하도록 결정한다.
당시에 왕분은 도둉과 대군의 연,조의 잔여세력을 평정한 후, 자신은 함양으로 돌아왔고, 수만명의 병마는 북방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수와 병사가 분리시키는 것은 진시황이 잘 쓰는 것이고 극히 실용적인 관리방식이다. 이는 '배주석병권'과 유사하다.
몽명이 돌파구를 마련하게 해주기 위하여, 진시황은 왕분에게 다시 연,조의 옛 땅으로 가서, 5만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또 다른 방향에서 황하를 건너게 하여 제나라의 도성 임치를 위협하게 한다. 제나라군대를 고당에서 철수해서 임치를 지원가면, 몽염은 다시 군대를 지휘하여 항하를 건너 일거에 제나라군대의 주력을 격패시키는 것이다.
왕분은 명을 받은 후 연,조의 옛땅으로 가서 인마를 모은다. 부상자와 남아서 지킬 자들을 빼고나니 왕분의 부대의 인원수는 5만에 미치지 못했다. 이 인마로 임치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진시황의 의도는 왕분으로 하여금 화력을 유인하여 삼십만 몽염군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왕분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는데 파죽지세로 무인지경처럼 제수(濟水)를 건너 병력이 임치성 아래에 도착한다.
임치는 전국시기의 초대형 성이다. 7만호, 50만인구를 보유했다. 임치에는 근 10만에 달하는 수비군이 있었다. 설사 이미 일부를 서쪽전선에 보냈다고 해도 여전히 6만명이 넘었다. 임치는 수십년간 크게 발전하여, 양초는 산처럼 쌓여 있고, 차마는 도로를 메웠으며, 관현은 하늘에 울려퍼볐다. 예전보다도 더욱 번성했다.
급하게 서두르면 왕분이 아예 임치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제왕건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며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두 곳에서 진나라군대를 막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유효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진나라군대와 소모전을 벌이면 언젠가는 양초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둘은 바로 고당에서 군대를 빼내오는 것이다. 임치에서
합쳐서 방어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인원으로 먼저 왕분의 군대를 섬멸시킨다. 그러면 몽염의 군대도 물러날 것이다.
제왕건이 망설이고 있을 때 왕분이 사자를 보내와서 그에게 세번째 선택을 얘기한다.
왕분은 그의 부친의 풍모를 닮았다. 유화책이 가능하면 굳이 강경책을 쓰지 않는다. 당초 왕전이 조나라를 멸망시킬 때, 먼저 이간계로 조나라사람들이 이목을 교체하게 하였다. 이번에 왕분에게 기회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만들어 낸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제왕건에게 약속한다. 제왕건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 그는 진시황이 제왕건에게 오백리땅을 봉지로 내려서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게 해주겠다고 보장한다.
왕분이 내놓은 조건을 보고 현재 천하의 대세가 이미 진나라로 기울었으므로 제왕건은 타협한다. 지금 진나라는 동방육국중 오개국을 멸망시켰고, 시골마을의 아이들 조차도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는 대세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항은 그저 진나라통일의 시기를 늦추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왕분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제왕건이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이런 명분이 있다면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임치성을 열고 투항한다. 왕분은 후승을 죽이고, 제왕건을 감금한 후 진시황의 처분을 기다린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으뜸의 공로는 다시 왕분에게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이렇다. 그들은 항상 역사의 주인공이고 촛점이다. 왕분은 연, 위, 제의 삼국을 멸망시킨다.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그대로 진시황 휘하의 제일공신이다.
그러나, 제나라를 멸망시키는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당을 지키던 제나라군대는 제왕건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심이 흐트러진다.
몽염군은 그 소식을 듣자 사기가 크게 오른다.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자 반수이상의 제나라군대는 저항을 포기한다. 몽염은 마침내 고당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다만, 제나라를 멸망시킨 최고의 공로는 분명 몽염의 것이 아니다. 설사 진시황의 뜻이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궤적은 그저 "반은 사람이 하는 대로 반은 하늘이 하는대로..."이다.
얼마 후, 진시황의 조서가 내려온다. 오백리 봉지는 없다. 그냥 제왕건을 태행산 아래의 공성(共城)으로 유배보낸다.
태행산 공성 부근의 야외에 띠집이 몇 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왕건의 유배지이다. 죽음으로 맹세하고 제왕건을 따르는 환관과 부하는 여전히 수십명이었다.
진시황의 제왕건에 대한 대우는 그의 식구 3명을 먹여살리는 것이었다. 하루에 단지 쌀 1말을 주었다. 한 말의 쌀은 어느 정도인가? 염파(廉頗)는 한끼에 한 말의 쌀에다가 10근의 고기를 먹었다. 1 말의 쌀을 수십명에게 먹으라고 하면, 겨우 희멀건 죽을 끓여서 먹어도 부족할 정도이다. 그리고 양식공급을 책임지는 관리는 제 때 제공해주지도 않았다. 제왕건이 잘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 제왕도 서말의 쌀을 위해 허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1개월후, 제왕건이 거주하던 산지 부근에는 들토끼조차도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제왕건에게는 아들 1명만 있었다. 그가 만년에 얻은 아들이다. 이때 아직은 유아였다. 어느날 밤, 유아는 배가 고파서 울게 된다. 제왕건은 처연하게 일어나 앉아서, 띠집의 사방의 소나무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임치에서는 얼마나 부귀했는가. 지금은 시골의 산에 쳐박혀 있다. 후회막급이고 울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며칠이 흐른 후에 제왕건은 띠집의 벽을 등지고 앉았는데, 자신이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 것같이 느낀다. 그곳에는 몇 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자 제왕건은 모호한 가운데 확실히 보게 된다. 몇 개 방향에서 자기를 향하여 손을 흔드는 사람은 바로 한왕안, 위왕가, 조왕천, 연왕희, 초왕부추이다.
제왕건은 마침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하늘을 우러러 진시황에게 저주를 내린다: "과인은 죄가 없는데도 죽음을 당했다. 너도 병이 없이 폭사할 것이다. 과인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10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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