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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정위)

왕정위의 논리와 운명

by 중은우시 2016. 5. 19.

글: 풍학영(馮學榮)


왕정위는 부정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부정적인 점은 인품이 아니라, 국면에 대한 오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왕정위라는 사람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길을 잘못 선택했다.


만일 왕정위를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기꺼이 노예가 되고자 했던 겁쟁이라고 한다면, 그가 청년시절 청나라 섭정왕을 암살하려 할 때, "인도성일쾌(引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의 호기로운 모습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만일 그렇게 왕정위를 이해하려고 하면 왕정위와 같은 위도에 있지 않게 된다.


사실상 1931년 "918사건"이 발발한 후, 왕정위는 강력하게 대일항전을 주장했었다. 왕정위는 장개석의 부대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북경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장학량에게 출병하여 항일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왕정위를 거절한다. 장학량이 내놓은 이유는, "너는 나에게 나의 장병들의 목숨을 희생하여 너희 남경정객의 애국명성을 얻으려 한다. 나는 안한다."


중경 배도시기에, 왕정위는 중경에 가만히 있으면 가장 안전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망국이 되면 왕정위는 프랑스와 관계가 있으므로 프랑스로 가서 말년을 보내면 된다. 그래서 왕정위가 남경으로 가서 정부를 조직하고 일본과 협력한 행위를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내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왕정위가 중경에 머물면 아무도 그를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남경으로 가면 매일 군통의 자객을 방비해야 한다. 그래서 왕정위의 개인안전을 놓고 말하자면, 중경은 남경보다 확실히 안정하다. 그래서 왕정위가 남경으로 간 것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내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하면서 특히 남경이 함락된 후, 왕정위와 '저조구락부'의 대표인물 예를 들어, 고종무, 주불해, 매사평, 호적등의 논리는 이러했다(맞다. 호적도 저조구락부의 일원이다):


1. 국력에 있어서 중화민국은 일본제국을 이기지 못한다.

2. 계속 싸우면, 중화민국은 망국할 수밖에 없다.

3. 설사 요행히 이긴다고 하더라도, 중국은 공산당의 천하가 된다.


왕정위와 그의 막료들은 공산당이 항전중에 급속히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좌시할 수 없다고 느낀다. 왕정위와 그의 막료들은 이런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왜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주어야 하는가?"


왕정위는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주전파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 장개석, 진성, 백숭희같은 류는 그저 표면적인 애국자이다.

2. 그들은 개인의 명예와 절개를 국가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나라가 망할지라도 욕을 얻어먹지 않으려 한다.

3. 나 왕정위는 국가를 중시하고, 개인의 명예와 절개는 그 다음으로 본다. 나는 진실된 말을 할 것이다.


왕정위와 저조구락부의 위의 몇 가지 견해는 거의 모두 정확했다. 단지 그중 가장 색심적인 하나가 잘못 계산되었다. 왕정위파는 미국이 중일전쟁에 개입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왕정위파는 핵심관점에서 형세를 오판한 것이다. 그리고 형세를 오판한 기초 위에서, 잘못된 의사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생을 망치게 된다.


1938년 여름-가을의 환절기에 왕정위파 인사인 매사평과 일본정부대표는 홍콩에서 담판을 한다. 일본정부대표는 "영토도 필요없고, 배상도 필요없다. 2년내에 철군한다"는 조건을 내놓는다. 매사평은 보배를 얻은 것처럼 급히 왕정위에게 알린다. 왕정위는 고민한 후에 출국을 결정하고, 중일평화회담을 호소한다.


그러나 왕정위파 인사들은 잘못했다. 왜냐하면 일본정부는 이때 이미 일본군벌의 괴뢰로 전락하여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때의 일본정부의 말은 이미 지켜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본군부에 제약을 받고 있었고, 그들이 한 약속은 모조리 군부에 의하여 뒤집혀 진다.


다만 왕정위는 일본정국의 내부사정을 몰랐다. 같은 해 겨울, 왕정위는 비밀리에 중경을 떠나, 월남 하노이로 간다. 12월 12일 일본수상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제3차고노에성명>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중친선(日中親善)

2. 공동으로 공산당을 막는다.

3. 경제합작


<제3차고노에성명>이 발표된 후 겨우 17일이 지난 12월 29일, 왕정위는 하노이에서 <염전(艶電)>을 발표하여 중일평화회담을 호소한다. <염전>을 얘기하자면 이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염전>은 대일투항을 호소한 것이 아니고, 괴뢰정부의 성립을 호소한 것도 아니다. <염전>의 전문은 비록 길지만 기실 단지 한 가지 내용이다: 중일평화회담을 호소하는 것. 즉, 소위 <염전>이라는 것은 그저 호소에 불과하고, 언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제3차고노에성명>이 발표된 후 1개월도 되지 않은 1939년 1월 5일, 고노에내각은 하야한다. 고노에 내각의 하야는 왕정위 및 그의 막료들로 하여금 하노이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일본의 후임정부가 <제3차고노에성명>에 따라 일처리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이 기간동안, 왕정위는 한 때 프랑스로 멀리 떠나서, 더 이상 국내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결정한다(왕정위는 일생중 매번 슬럼프가 있으면 프랑스로 가서 잠시 피하곤 했다)


문제는 '하노이왕정위암살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왕정위가 하노이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1939년 3월말, 국민당의 군통 우두머리 대립(戴笠)은 살수 전공주(陳恭澍)를 멀리 하노이가지 보내어 왕정위를 암살하려 하는데, 왕정위의 심복이자 친척인 증중명(曾仲鳴)을 왕정위인줄 알고 암살한다.


왕정위암살사건은 왕정위에게 타격이 컸다. 왕정위는 생각한다: 내가 중경을 떠나 국사에 대하여 의견을 내고, 중일평화회담을 호소하는 것은 내가 그저 의견을 발표한 것일 뿐인데, 그리고 결정권은 너 장개석에게 있으니 너는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받아들일지 않을지는 네가 마음대로 하면 된다. 다만 네가 나를 암살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나는 그저 의견을 발표했을 뿐이지 않느냐. 나는 무슨 실질적인 매국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네가 나를 암살하려는 것은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너의 이런 행동은 나로 하여금 적대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왕정위의 논리이다.


중경의 태도는 왕정위를 크게 자극한다. 왕정위는 반발을 결정하고 그는 망설이던 것을 긑내고, 과감하게 상해로 간다. 그 후에 남경으로 간다. 그리고 국민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왕정위는 이렇게 생각했다. 친일의 중화민국이라도 있는게,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보다는 낫다.


왕정위가 정부를 조직하고, 국호, 국가, 국휘는 모조리 국민정부의 것을 그대로 썼다. 이것들은 왕정위파와의 담판을 통해서 일본측이 차례로 타협한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국기였다. 왕정위는 청천백일기를 그대로 쓸 것을 고집했다. 다만 일본측은 이렇게 생각한다: 전선의 일본군은 여전히 청천백일기 아래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청천백일기를 채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왕정위의 태도는 강경했다. 일본측은 결국 타협한다. 단지 청천백일기에 "화평반공구국"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이다. 이는 중화민국의 명분을 유지하는 것이고, 왕정위는 이미 그가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냈다.


일본제국은 확실히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길 희망했다. 다만 전제는 중화민국이 만주국과 공산당방어를 위한 군대주둔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중화민국이 일본제국에 대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절대적인 협력의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지위는 식민지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다. 이때 일본의 요구는 이미 77사변 이전과 비교하여 많이 늘어났다. 1937년 11월 일본이 도덕만(陶德曼)을 통하여 제안했던 7개항 평화조건과 비교하면, 국민당이 망설이면서 평화회담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다만 합작기간동안 일본측은 왕정위가 시키는대로 다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외유내강형이고, 자그마한 것도 모두 다투었고, 심지어 약간 얻어내면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일본측의 적지 않은 인사들은 당초 합작대상을 고를 때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왕정위라는 협력자는 솜안에 가시를 숨기고 있어서,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왕정위는 1944년에 병사한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결말이다. 만일 그가 1년뒤에 죽었다면, 그는 남경군사법정의 피고석에 서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화대로 끌려가서 총살당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성격으로 봐서 그는 옥중에서 자결할 수도 있다. 만일 그 개인을 고려하여 사후제갈량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왕정위는 당초 중경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는 길을 잘못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왕정위가 길을 잘못 선택했다고 하여, 장개석이 길을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개석은 길을 잘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박을 잘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