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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정위)

왕정위 다섯 자녀들의 인생결말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복녕객(福寧客)

 

뉴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노인아파트에 한 화교부부가 살고 있다. 미국이웃들은 아마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 두 노인이 중국인들이 보기에 아주 민감한 신분을 지니고 있을 줄은: 그들은 왕정위의 딸 왕문성(汪文惺)가 사위 하맹항(何孟恒)이다.

 

왕정위는 처인 진벽군과의 사이에 모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섯째가 요절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장수했다. 이들 자녀들은 대부분 지난 일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집안의 이야기와 개인 신세를 얘기하는 사람은 오로지 왕문성 부부 뿐이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바람에 필자는 여러번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고, 그들이 얘기하는 반세기동안의 집안과 나라의 풍운을 들을 수 있었다.

 

장녀는 농장에서 꽃을 판 적이 있다.

 

왕문성은 이미 95세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왕정위는 신해혁명 성공후 진벽군과 결혼한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황제제도를 무너뜨렸으니 건설의 재주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말했고, 부부 두 사람은 몇면 반청의 생사지교들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1913년 봄에 그 곳에서 아들은 낳고, 1914년 연말에 다시 둘째를 낳으니 바로 왕문성이다.

 

왕문성은 조산아이다. 태어나면서 체중이 1.3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아서, 의사는 그녀가 요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중에, 왕정위부부는 귀국하여 손중산을 돕고 원세개와의 싸움에 힘을 쏟으면서 딸을 보살피는 책임을 왕정위부부와 함께 프랑스로 유학갔던 방군영(方君瑛), 증성(曾醒)에게 맡긴다.

 

왕정위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은 방군영, 증성 이 몇 사람이다. 방군영은 중국 최초로 유럽에서 수학학위를 받은 여자이다. 증성은 방군영의 넷째 오빠의 미망인이다. 일본유학때, 동맹회에 가입한다. 그들 3명의 집안은 관계가 밀접했다. 왕정위의 장남은 이름이 "문영(文嬰)"인데 그것은 방군영('영'자의 발음이 같다)'을 기념하는 것이다. 왕문성의 이름은 바로 증성('성'의 발음이 같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의 보살핌 아래, 왕문성은 요절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나중에 놀라울 정도로 장수하고 지금도 신체가 건강하여, 지팡이를 집고 외출을 한다. 자주 중국계 사회의 각종 강좌, 전람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몸에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항상 <홍루몽> 한 권이 들어 있다. 그녀의 성격은 약간 겁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이다. 나이 팔순이 넘었을 때도 여전히 승마를 했다. 그녀보다 1살이 어린 남편 하맹항은 원래 몸이 더 좋았다. 92살때 후배들이 간절하게 권하고 강온의 모든 방법을 써서 비로소 스스로 자동차운전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금년에는 위에 수술을 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타게 된다.

 

1931년 일본이 '918사변'을 일으켜 전국인민을 일깨운다. 특히 열혈청년들을. 십여세의 왕문성은 바로 강소성 무석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학생들과 작은 기를 들고, 구호를 소리높여 외쳤다. 남경국민정부의 문앞으로 가서 청원을 하고 항일을 요구하고, 매국노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자신이 화를 내는 대상에 자신의 부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왕정위는 당시 국민정부의 행정원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1934년, 왕문성은 하맹항과 약혼한다. 1939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다. 항전승리후, 그들은 홍콩에서 30여년을 지낸다. 먼저 작은 화훼농장을 만든다. 하맹항은 금릉대학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다. 어떻게 식물이 뿌리내리게 하고, 가지를 자르고, 꽃을 피우게 하는지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 그들 둘은 그 시대를 회고하면 즐거움에 넘친다.

 

부부는 딸을 3명 낳는다. 처음에 왕문성은 집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농장일을 도왔다. 둘째딸이 크면서 나가서 재봉을 배운다. 이것은 옛 말의 "남경여직(男耕女織)"에 맞는 생활이다. 그러나, 현실은 험난했다. 농장은 매년 결손을 내서 결국 팔 수밖에 없게 된다. 하맹항은 소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홍콩 인구등기국에서 신분증발급업무를 처리하는 하급직원을 맡기도 한다. 저녁에는 영문소설을 번역하여 약간의 원고료를 받았다. 그리고 10개월간 실업자로 지내기도 한다; 왕문성은 나중에 홍콩교육사 교육훈련반을 졸업하고, 여러 사립, 공립학교에서 교사가 되어 가르치다가 1970년에 은퇴한다.

 

이 가정은 한때 곤란한 시기를 지내고, 하맹항이 홍콩대학 식물학과에 재직하게 되어 그의 전공과 맞는 일자리를 갖게 된다. 그때부터 안정되기 시작한다. 1981년 하맹항이 은퇴할 때, 3명의 딸은 이미 전후로 미국유학, 취업, 결혼을 한다. 그래서 두 노인은 미국으로 가서 정착한다. 긜고 이미 20년이 지났다.

 

일찌기 장개석을 대신하여 총을 3발 맞다.

 

왕정위는 정계에서 부침이 심했다. 홀연 취임했다가 홀연 하야하고, 홀연 멀리 떠났다고 홀연 되돌아왔다. 그러한 것들이 자녀들의 운명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문성 부부가 겪은 국가일, 집안일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번복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두 노인이 말년에 가장 많은 정력을 투입한 것은 바로 왕정위에 관한 문물과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일이다. 그들은 왕정위는 20세기 상반기 중국정계의 풍운인물이고, 손중산 유언의 기초자이며 집행인이다. 말련의 행동은 '국인개왈가살(國人皆曰可殺)'이지만, 그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관련된 중요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해협양안으로부터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왔고, 깊이있게 연구되지 못했다. 왕정위의 후손으로서, 더더욱 많은 사건을 친히 겪고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상세하고 신뢰할만한 사료를 남길 책임이 있었다. 왕문성의 도움으로, 하맹항은 회고록을 썼다. 그리고 왕정위와 현대중국에 관한 원고를 쓰고 있다.

 

왕정위정권에서 공직을 맡았던 오빠 왕문영과 비교하자면, 그들은 직무를 맡지 않았었다. 회고는 그래서 더욱 초탈하고 객관적일 수 있다. 남동생, 여동생과 비교하자면 그들은 왕정위와 더 많이 접촉을 했기 때문에, 사료가 더욱 풍부하다.

 

두 노인이 먼저 언급하는 것은 '암살'이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왕정위의 일생은 암살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고. 첫번째는 1910년이다 그는 북경 은정교에서 폭약으로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옥중에서 그 "강개가연시(慷慨歌燕市), 종용작초수(從容作楚囚), 인도성일쾌(引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 그때 루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다만 두번째는 우리들이 겪을 수 있었다."

 

1935년 11월 1일, 국민당은 남경에서 제4기 6중전회를 개최한다. 개막식후 중앙위원이 사진을 함께 찍는데, 질서가 혼란했다. 의심이 많은 장개석은 임시로 사진촬영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왕정위에게도 출석하지 말도록 권한다. 왕정위는 1인자, 2인자가 모두 출석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참가한다. 사진촬영이 막 끝나자, 한 촬영기자가 돌연 권총을 꺼내들고, 근거리에서 몸을 왕정위에게 돌려 세 발을 쏜다. 한발은 왼족눈 바깥의 관골에 맞고, 한 발은 왼쪽팔을 관통하며, 한발은 등에서 제6,제7흉척추골에 맞는다. 바로 이 총탄이 이후로 왕정위의 몸에 남아 있다가 수시로 염증을 일으킨다. 결국은 왕정위가 사망하는 주요원인이 된다.

 

총성이 울리자, 사람들은 황급히 도망친다. 단지 국민당 원로 장계가 앞으로 뛰너아가 암살자를 끌어안는다. 장학량은 한 발로 권총을 차버린다. 왕정위의 처인 진벽군은 당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개석을 질책한다: "장선생, 당신이 조명(왕정위의 본명)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을 이렇게 독수를 쓰십니까?" 장개석은 얼굴이 벌개져서 뭐라고 대꾸를 하지 못한다.

 

조사를 거쳐, 암살자는 손봉명이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권리와 영토를 잃은데 격분하여 몇몇 사람들과 밀모하여 '매국화수(賣國禍首)인 장개석을 제거하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장개석이 나타나지 않아. 그들은 왕정위에게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하맹항은 왕정위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왕정위가 암살당하자, 그의 운전기사가 제일 먼저 차를 몰고 달려가서 하맹항을 데려간다. 하맹항은 회고한다: "왕정위는 구급차로 실려갈 때, 비록 혈육이 모호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그는 광동말로 말했다: '아걸(하맹항의 아명), 겁내지 마라. 나는 괜찮다. 그들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는 물었다: "왕정위는 장학량과 싸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장학량이 이번에는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두 노인은 말한다: "그렇습니다. 부친은 나중에 두 장씨(장계, 장학량)에게 멋진 지팡이를 보내어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장학량의 갈등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구명은 구명이고, 원칙상의 이견은 역시 원칙상의 이견입니다."

 

"하노이 왕정위암살"은 의문투성이이다.

 

왕정위가 세번째 암살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은 1939년 3월 20일 깊은 밤이다. 왕문성 부부는 이때 현장에서 친히 이를 겪는다.

 

1938년 12월, 왕정위 부부는 왕문성, 하맹항등을 데리고, 전시 배도(陪都)인 중경을 나와, 곤명을 거쳐 월남의 하노이로 간다. 장개석은 사람을 보내어 왕정위에게 여권을 보내주고 그에게 멀리 유럽으로 갈 것을 권한다; 동시에 다시 대립으로 하여금 심복부하인 진공주(陳恭澍)로 하여금 사람을 데리고 하노이로 가서 암살하게 한다. 그날 깊은 밤, 암살자는 뒷담을 넘어 왕정위의 거처로 들어온다. 사전에 왕정위의 침실로 판단한 곳을 덥친다. 그리고 도끼로 방문을 내려찍고, 실내로 총을 마구 쏘아댄다. 그러나 결국 죽은 것은 왕정위가 아니고 그와 정이 형제같았던 비서 증중명(曾仲鳴)이다. 증중명은 증성의 10째동생으로, 그의 처는 방군영의 11째 여동생이다.

 

이번 해외에서의 암살은 국내에도 많이 보도되었다. 행동조장 진공주도 장편의 회고록을 발표한 바 있다. 다만 각종 묘사는 서로간에 차이가 아주 크다. 진공주는 말한다. 행동조는 단지 왕정위를 향하여 3발만 쏘았다고. 그러나 어떤 사료에서는 "자동소총으로 맹렬하게 사격을 가했고, 증중명의 몸에는 총탄을 잔뜩 맞았다. 방군벽도 4발을 맞았다." 비록 경위에 대한 주장은 서로 다르지만, 공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암살자가 실수한 것은 방군벽이 막 하노이에 도착했으므로 왕정위가 자신의 침실을 양보하고, 그래서 그들이 대신 죽게 되었다고.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공인'된 사료를 왕문성 부분는 단호히 부인한다.

 

사료에서 그들이 거처한 곳이 "고랑가 27호"라고 되어 있는데, 하맹항은 지적한다. 그들이 거처한 곳은 고랑가25호이지 27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은 서로 이웃하고, 매층이 서로 연결된 3층짜리 양옥건물이라고 한다. 당시, 왕정위는 몇 곳의 거처를 옮겨다닌 후 이 곳으로 왔다. 왕문성과 하맹항도 이 서양건물에서 결혼한다. 두 노인은 그들이 그린 주택의 지도를 그려 보인다: 2층건물의 1층과 2층은 모두 거실, 식당이 있다. 친척, 운전기사, 간호사, 요리사등 십여명이 살았다. 27호 3층의 도로에 면한 전방(前房)은 전체 서양건물에서 가장 정돈된 방이다. 그래서 원래 신방으로 쓰려고 했고, 가구도 새로 배치했다. 후방(後房)에는 이미 고인이 된 손중산의 조수인 주집신의 딸과 증중명 부부의 장남이었다. 25호의 3층 도로에 면한 전방은 왕정위 부부의 침실이다. 후방에 사는 것은 바로 신혼의 허니문을 보내던 왕문성 부부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왕정위 부부는 너희가 말하는 '가장 정돈된' 27호 3층 전방에는 거처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않았다. 그들은 한번도 27호 3층 전방에 거처한 적이 없다. 이사간 후 계속 25호의 3층 전방에서 살았고 한번도 옮긴 적이 없다. 왕정위는 글을 쓸 때도 자신의 침실에서 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증중명 부부가 들어와 살기 전에, 이 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는가?" 그들은 말했다: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저 손님을 만날 때 사용했을 뿐이다."

 

이것은 필자로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당시의 암살행동조는 건너편의 건물을 빌렸고, 꼭대기층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그렇다면 암살자는 밖에서 감시하면 분명히 이 거리 건너편의 좌우 두 방을 볼 수 있지 않았겠는가?" 두 노인은 대답한다: "이 서양건물의 앞에는 아무런 건물도 없다. 이웃한 건물은 우측에 있다. 만일 그들이 그 곳에서 관찰했다면, 그저 측면에서 27호의 앞에 있는 이 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고한다: 1939년 3월 20일 저녁, 모두 11시경에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탕탕탕' 하는 총소리에 놀라서 깬다. 하맹헝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선다. 왕정위도 문을 열고 져다보았다.

 

하맹헝은 느낌이 좋지 않아 장인에게 말한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나오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보겠습니다." 그는 처도 장인장모의 방으로 밀어넣었다.

 

하맹헝은 신발도 신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그가 계단을 따라 몇 걸음 내려가자, '탕탕'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는 확신했다. 총소리이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복도에 불이 켜져 있었다. 2층의 뒤에 있는 두 건물이 통하는 문앞에서 돌연 손이 하나 나오더니 벽의 전등 스위치를 찾는다. 졸지에 등이 모조리 꺼진다. 하맹헝은 깜짝 놀라서 즉시 몸을 돌려 25호 전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꽉 걸어잠근다. 4명은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건물밖에서 총소리가 크게 나더니 발걸음 소리,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맹항은 조용히 베란로 나가서 쳐다본다. 건너편 십자로의 가로등아래에 한 사람이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즉시 몸을 피하여 발견되지 않도록 한다.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맹헝은 다시 문을 나서서 살펴본다. 그는 27호 전방의 문을 연다. 그리고 침대곁어로 간다. 손을 뻗자 바닥에는 짙게 선혈이 만져졌다.

 

두 노인은 나중에 사건의 윤곽을 이렇게 그려냈다: "아마도 3,4명의 암살자가 후원의 담장을 넘어서 들어왔고, 호위 1명이 소리를 듣고 나가서 보았다가 총격을 당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뒤따라나온 호위인데, 몸을 숙이고 자동차의 뒤에 숨었다. 그래도 총에 맞는다. 암살자는 2층으로 올라가서, 손전등으로 방문을 나가 전등을 끄고 즉시 총을 한바탕 갈긴다; 3층 증중명과 주집신의 딸이 나와서 보는데, 암살자는 이미 다가왔다. 그들은 급히 함게 전방으로 되돌아간다(즉, 증중명 부부가 거처하던 방), 그리고 방문을 잠근다. 암살자는 날카로운 도끼로 문에 구멍을 내고 총을 집어넣어 마구 갈긴다. 주집신의 딸은 문옆의 사각지대에 웅크리고 있어서 화를 면한다. 총알은 증, 방의 몸에 박힌다. 암살자는 원래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신발, 장갑되 쓰지 않은 두 줄을 총알을 남긴다.

 

"왕정위에게는 호위가 있지 않았는가. 그들은 무기가 없었는가?" 내가 물었다. 하맹헝이 대답한다. "손에 무기는 없었다. 당시 월남은 프랑스식민지이고, 프랑스당국은 프랑스인외에는 총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왕문성 부부는 말한다: "증중명은 왕정위를 대신하여 죽었다. 이 사건은 왕정위에게 큰 충격을 준다. 증중명은 왕정위를 '넷째형'이라고 불러왔고, 두사람은 사제관계이며 친구관계였다. 그가 16살때 왕정위를 따라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국민당 4차대회때 후보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된다. 나중에 행정원 비서장, 철도부 차장,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부비서장 등의 직위를 지낸다.

 

하맹헝은 맣란다. 많은 문제는 해석되지 않는다: "국민당의 1인자가 사람을 시켜 국외에서 2인자를 암살하게 하다니 그 임무는 보통이 아닌 중요한 것이다. 분명히 확실히 해야 했다. 파견된 사람은 부흥사의 고수라고 들었다. 잠복, 감시만 며칠을 했는데, 이렇게 엉망으로 일을 처리하다니. 그 헛점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들은 자동차를 사서 문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관찰했지만 망원경은 사지 않았다. 아예 우리 각자가 거처하는 곳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우리가 27호에 거처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하맹헝은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진공주는 행동조 구성원 당영걸을 잘 알았다. 이전에 천진에 파견된 바 있는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성패가 중요한 사건의 정찰업무를 그에게 맡긴다. 행동이 실패하고 진공주는 '군법재판에 회부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중경에 돌아간 후 실수는 그저 지나가버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통에서 중용된다.

 

다섯 자녀의 행방

 

왕문성 부부는 필자에게 많은 내부사정을 얘기했다: 왕정위가 중경을 떠난 경과, 왕정위가 죽을 때의 구체적인 사정, 왕정위의 많은 시사를 쓰게 된 연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왕정위의 5명 자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알려진 여러가지 잘못된 정보를 시정하는 것이다:

 

장남 왕문영, 1913년생, 일찌기 독일에 유학하여 정치경제를 공부한다. 나중에 왕정위 정권의 군사위원회 제2청에서 군수처장을 맡는다. 현재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 살고 있다.

장녀 왕문성, 1914년생, 일찌기 강소성립교육학원에서 공부하고, 홍콩의 여러 소학교에서 교사를 지낸다. 은퇴후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다.

차녀 왕문빈(汪文彬), 1920년생, 일찌기 인도네시아정부 의약부서의 고급관리를 지내고 인도내시아에서 수녀가 된다.

삼녀 왕문순(汪文恂), 1922년생, 일찌기 부친의 원고를 정리해준다. 홍콩대학 교육학과 교수를 지내고 2002년 병사한다.

차남 왕문제(汪文悌), 1929년생, 남경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함. 홍콩에서 교량건설에 종사하고, 여러번 대륙으로 돌아가서 합작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필자는 왕문성의 거쳐의 벽에서 2대인들이 합작으로 쓴 서화작품을 본다. 왕문성은 촌의 어린아이가 나귀를 끄는 것을 그렸고; 하맹헝은 산의 그림자와 나무의 색을 그린다; 위에는 왕정위가 손으로 쓴 오언고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