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정위)

왕정위 섭정왕암살사건의 진면목

by 중은우시 2011. 1. 18.

 

: 아억(阿憶)

 

 

 

역사자료를 읽으면, 항상 발견하게 된다. 사건의 여러 방향으로 발전하고, 환경은 여러가지가 하나로 교차하는 영상과 같다. 역사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두 세 폭의 분리된 화폭을 보게 되고, 화면은 단순화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두 가지 방법이며, 그 차이는 아주 크다. 전자는 진실하지만 군더더기가 많고 장황하며, 후자는 알아듣기 쉽지만 엉성하다.

 

예를 들어, 왕정위의 섭정왕암살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화면은 아주 단순하다:

 

북경, 십찰해와 후해를 잇는 은정교의 아래. 시간은 불명; 필명을 정위로 하는 영준한 소년이 폭약을 묻고, 다리 위의 동정을 살핀다; 다리 위에는 섭정왕이라는 고관대작이 가마를 타고서 이 다리를 지나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폭약은 터지지 않고 왕정위는 체포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정위는 죽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짧은 시를 남긴다.

 

그러나, 실제의 장면에는 왕정위가 없었다. 당시 혁명당은 매년 폭동을 일으켰으나 계속하여 실패했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왕정위는 고관을 죽임으로써, 백성들의 의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리하여 동경에서 폭약을 샀다. 그러나, 그는 시종 막후에 잠복하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나는 사람은 유배륜(喩培倫)과 황복생(黃復生)이다.

 

1910 3 31, 유배륜과 황복생은 다리 아래에 깊은 구덩이를 판다. 그러나 사방의 개들이 짖는 바람에 부득이 도주하게 된다. 4 1, 유배륜과 황복생은 45근의 폭약을 묻는다. 그러나 도화선이 너무 짧았다. 4 2, 도화선에 선을 잇는 작업이 성공했다. 그러나 백성이 제보하는 바람에 경찰이 폭약을 가져가 버린다. 그후 유배륜은 다시 폭약을 사기 위하여 동경으로 떠나서, 화면에서 사라진다. 황복생이 다시 4 3일에 다리로 가서 정탐하는데, 섭정왕의 경위에게 발각된다. 경위는 그를 뒤쫓아가서 수진 사진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다. 4 16, 황복생은 수진사진관에서 체포되고, 왕정위는 전문 동북원에서 체포된다. , 전체 과정에서, 왕정위는 다리에 가본 적도 없고, 친히 폭약을 매설한 적도 없다.

 

이외에 이 장면의 장소도 은정교가 아니다. 처음에 왕정위는 경친왕 혁광을 암살하려 했다. 장소는 정부가였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하여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후 화면은 전문 기차역으로 옮겨간다. 서양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재순, 재도를 암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밤에 너무 어둡고 사람이 많아서, 암살할 수 없었다. 화면은 다시 한번 옮겨진다. 왕정위는 섭정왕 재풍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부의 황제의 부친이다. 그를 죽여버린다면 국내외를 진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화면은 후해의 북안에 있는 소감수교(小甘水橋)로 옮겨진다. 이곳은 섭정왕이 집을 드나들 때 반드시 지나는 다리이다. 유배륜과 황복생이 폭약을 묻은 곳도 바로 이 곳이다. 그러나, 소감수교는 철거되었다. 다리가 있던 곳은 흙으로 모두 메워졌다. 후인들이 그 장소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장소를 아예 그곳에서 동남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은정교로 옮긴 것이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 곳에 서서 상상한다 최후에는 변절해버린 영준한 소년이 다리 아래에 숨어서 폭약을 묻고 있는 장면을.

 

이 이야기는 이어지는 화폭이 두 개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서 전해지면서 묻혀져 버린다.

 

첫째, 왕정위가 황제의 부친을 암살하려했는데 왜 처결되지도 않고, 시도 남길 수 있었을까? 아주 간단하다. 당시는 청나라말기에 법치개혁을 시작한지 8년째 되는 해였다. 정치개혁은 서태후가 죽었다고 중단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이 느려졌을 뿐이다. 왕정위 황복생사건에 대하여, 감찰어서 호사경(胡思敬)은 극형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청나라의 대학자였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숙친왕 선기, 황실금위군 훈련대신 양필, 북경내성 순경청장 장종상은 죽이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역사서에서는 모두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혁명당인은 왕정위와 황복생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 하나 죽이다보면 서로 원한만 쌓이게 된다. 게다가 조정은 헌정을 추진하고 있는 때였다. 결국, 섭정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두 젊은이들은 정부가 점진적으로 정치개혁을 하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조급하여 불손한 짓을 저질렀으며, 나중에 잘못을 깨달을 것이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왕정위와 황복생은 무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다음해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서, 청나라는 왕정위, 황복생을 석방한다. 두 사람은 혁명영웅이 된 것이다.

 

둘째, 왕정위는 체포된 후 구금되어 있으면서 담담하지 않았다. 27살된 이 광동소년은 필사의 신념을 가지고 시를 많이 썼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인도성일쾌, 불부소년두(引刀成一快, 不負少年頭)” 그러나, 종용(從容)이라는 것은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지, 행동상태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왕정위는 우물을 발견하고는 뛰어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바깥 구멍은 넒지만, 안은 좁았다. 뛰어들어야 죽을 수 없다고 느껴져서 그만둔다. 그리고 담장에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박고 죽으려 한다. 그러나 못이 너무 높이 박혀 있어서 제대로 부딛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살펴보면, 심리상태는 영웅적이지만,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감옥안에서 담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용이라는 것은 그저 혁명가들에 대하여 관용적으로 붙이는 문학적인 수법일 뿐인 것이다.

 

역사를 꿰뚫어보려면, 한 두개의 고립된 화면만 봐가지고는 오히려 잘못 알 수 있다. 역사는 흘러가는 영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는 다큐멘터리의 소재이지, 이야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