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각목염자(楊康穆念慈)
어떤 사람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인구, 자원, 공업생산능력에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미국에 전쟁을 건 것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짓이라고 본다. 그런, 그런 생각은 일면적이고, '사후제갈량'이다.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물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방면이다. 만일 전쟁이 항상 '물량'의 방면에서 우세한 측, 즉 사람이 많고, 총이 많고, 돈이 많은 쪽에서 승리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주 간단해질 것이다. 고금중외의 전쟁역사에서, 이소승다(以少勝多), 이약승강(以弱勝强)의 사례는 아주 많다. 이들 전투의 성공은 모두 '사람'의 우세로 '물양'의 부족을 보완한 것이다.
적벽대전때, 손권은 5만의 병력으로 조조의 71만대군에 도전한다. 이것이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짓인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때, 청나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는데, 일본의 국력은 중국과 러시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봉은 '사람'의 우세를 가지고 이약승강의 승리를 이루어낸다. 2차대전때 일본의 국력은 확실히 미국에 비하여 부족했다. 그러나 절대 일본이 미국을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미국이 일본을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이 미국을 기습한 것은 기실 중국의 소위 '초한전(超限戰)' 사강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이기려면, 강자들이 제정한 '전쟁규범'을 지켜서는 안된다.
2차대전의 양대진영인 "영국프랑스미국"과 "독일이탈리아일본"이었다. 인구, 자원, 공업생산력등 '물'적인 분야를 보면, 자연히 '영국프랑스미국'의 동맹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전쟁은 도박이다. '물'적인 방면의 열세자는 주머니안에 돈이 얼마 남지 않은 도박꾼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도박에서 이겨서 일거에 부호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그들은 '고주일척(孤注一擲)'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크게 이기지 않으면 크기 지는 것이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고주일척으로 '영국프랑스미국'에 도전했다. 이런 대박심리를 안고서. 당연히, '독일이탈리아일본'은 확실히 '영국프랑스미국'에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장군들이 착오를 좀 더 적게 범하고, "영국프랑스미국'의 장군들이 조금 더 잘못을 많이 범했더라면, 2차대전의 승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측일 수도 있었다.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한 것은 기실 '겨우 승리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영국프랑스미국'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진영이 긴장되게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느 진영이 승리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장개석은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하는데 걸어서 항일전쟁을 견지했고, 왕정위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이기는데 걸어서, 대일강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승자왕후패자적"이라는 역사관으로 왕정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당시 왕정위가 대일강화한 행동은 무슨 매국행위라고 할 수가 없다. 만일 2차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진영이 승리했다면, 중국이 만일 '영국프랑스미국'의 진영에만 줄을 섰다면, 불가피하게 전패국으로서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처참한 제재를 당했을 것이다. 그때 중국은 아마도 일본의 한개 지방으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천년의 중화눔화는 이로서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다. 만일 일찌감치 일본과 강화했다면 중국은 전패국이 되어 영토흘 할양하고 배상금을 무는 가혹한 제재는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중화문화를 구차하게나마 연명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왕정위일파의 대일강화의 생각과 목적이었다.
왕정위는 1905년 동맹회를 발기하고 설립한 원로이다. 그는 가장 먼저 손중산을 따른 신도중 한 명이다. 왕정위는 국민당내의 지위와 위신이 아주 높았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주석을 맡았다. 비록 군권을 장악한 후기지수 장개석에게 실권을 빼앗겼지만, 왕정위의 당내 정치적 지위는 장개석보다 항상 위였다. 왕정위는 처음부터 대일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1931년 "9.18사번"후 장개석의 비저항정책과 비교하면, 왕정위는 저항을 주장하는 주전파였다. 당시의 애국학생은 왕정위를 애국지도자로 생각했다. 1931년 12월 5일, 전국애국학생은 남경으로 가서 청원할 때, 당시 하야해 있던 왕정위가 정치무대로 되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내걸은 표어는: "호당구국의 왕선생을 환영한다", "민주정치실현을 주장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 "비저항주의에 반대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 "동북실지의 즉시회복을 주장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12월 6일, 왕정위는 전국대학생대표를 접견할 때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국면에 대응하는 방법을 본인은 8글자로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일면저항(一面抵抗), 일면교섭(一面交涉)." 왕정위는 장학량의 비저항퇴각을 비판할 때 이렇게 말한다: "유관(楡關)을 하루만에 잃고, 열하(熱河)를 7일만에 함락당하다니 실로 말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먼저 저항한 후 교섭해야 한다. 이후 비저항은 외교에 영향을 반드시 미칠 것이다. 오늘이후 저항이 더욱 힘을 얻으면, 교섭에 더욱 희망이 있을 것이다." 1938년 11월 3일, 일본정부는 제2차대중국성명을 발표한다. 이전에 국민정부를 교섭상대방으로 보던 방침을 바꾸어, 장개석의 하야를 제기하고,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건하에서, 일본은 국민정부와 정전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왕정위는 일본정부의 제2차대중국성명이후, 장개석의 사직을 요구하고, 일본과 정전을 실현하고자 한다. 왕정위는 말했다: "우리는 신속히 함께 사임하여 천하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말한다 "우리가 만일 사직하면, 도대체 누가 정치적 책임을 진단 말인가?"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언쟁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헤어진다. 장개석을 설득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왕정위는 장개석과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단독으로 '화평구국'을 하기도 한다. 왕정위는 장개석이 섬서로 가서 군사회의에 참석하느라 중경에 없는 틈을 타서, 12월 18일 밖에 강연하러 간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고 중경을 떠나 곤명으로 가고, 다시 당시 프랑스식민지이던 월남의 하노이로 간다.
왕정위가 떠날 때, 장개석에게 장문의 결별서신을 남긴다. 거기서 그는 장개석과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목적은 모두 구국이라고 말한다. 왕정위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그대는 쉬운 길을 가고 나는 어려운 길을 간다(君爲其易, 我任其難)". 당시의 애국분위기하에서, 항전을 소리높여 외치는 길은 과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일본과 강화하는 길은 비교적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왕정위는 장개석에게 말한다: 너는 쉬운 항전을 이끌어라. 나는 어려운 화평업무를 맡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왕정위가 일본에 의탁한 것은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정반대이다. 왕정위는 원래 장개석과 함께 안전한 대후방 중경으로 도망가 있었다. 만일 왕정위가 장개석과 함께 항전을 소리높여 외쳤다면, 절대로 아무런 생명위협이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정위가 중경을 떠나 일본인과 합작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것이다. 왕정위가 하노이로 도망친 후, 장개석이 보낸 특무가 그의 비서를 죽인다. 만일 왕정위의 비서가 왕정위와 방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왕정위는 하노이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정위의 '화평공작'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도박이었지, 절대로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정위는 일본인의 지지하에 유신정부를 성립한다. 중국은 국제적으로 아주 절묘한 위치에 처해지게 된다. 절반의 중국인은 영국프랑스미국의 진영에 가담하고, 또 다른 절반의 중국인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진영에 가담한 것이다. 만일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하면, 장개석을 대표로 한 중국이 전승국이 되고, 왕정위의 정권을 접수할 것이며; 만일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승리하면, 왕정위를 대표로 한 중국이 전승국이 되어, 장개석의 정권을 접수할 것이다. 중국은 2차대전에서 유일하게 어떻게 되더라도 패전하지 않는 '이중보험'을 든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만의 하나 전쟁ㅇ서 패배하더라도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거나 분할되어 망국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중국인만이 아마도 이처럼 절정총명한 생존의 도리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서양인들도 탄복해마지 않을 것이다.
왕정위의 유신정부는 중국이 패전하지 않도록 만드는 '이중보험'의 역할을 하는 외에, 측면에서 장개석과 공산당을 구해주었다. 왕정위를 대표로 하는 중국과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요구하는 정전조건은 만족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장개석에게 계속 진격하지 않게 된다. 만일 왕정위를 대표로 하는 중국과 일본이 화평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일본군은 체면이 상하지 않는 정전이유를 만들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계속 공격하여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소멸시키려 했을 것이다. 일본은 1939년 더 이상 중경으로 물러가 있는 장개석정부에 대규모공격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왕정위가 이미 중국을 대표하여 일본과 강화를 맺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1939년이후 일본이 대규모 대중국군사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전선이 너무 길어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제에 맞지 않는다. 나중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 수백만 병력이 전체 전선에서 출격하고 대거 동남아로 진공한다. 그러나 1937년에서 1938년에 중국침략전쟁에서 투입한 병력은 최대 7,8십만이었다. 일본이 다시 200만군대를 투입했다면, 중경, 연안을 함락시키는 것은 아마도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정위가 중국을 대표하여 일본과 '평화우호'관계를 건립했기 때문에, 일본은 중경으로 계속 진격하지 않은 것이다. 장개석과 공산당이 8년항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 공산당 양당의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왕정위의 '매국' 해위(解圍)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외에 왕정위정부는 '이중보험구국'에서의 의미이외에, '구민(救民)'의 분야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전후 국민정부는 적군점령지구의 백성들이 '억고사첨(憶苦思甛)'하도록 호소하고 왕정위정부가 호가호위하고 인민을 박해한 죄행을 고발하도록 하였지만, 실제로 드러낼만한 것은 찾지를 못했다. 반대로 적군점령지구의 인민은 왕정위정권하에서 살만했고, 기본적인 물품공급이 안정되었고, 시장물가도 평온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장개석이 '환도'한 이후, 오히려 통화팽창과 물가폭등이 일어난다. 백성들의 생할은 왕정위시대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공산당이 문혁때, '억고사첨'의 소고대회(訴苦大會)를 열었을 때도, 왕정위정부시대의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왕정위가 통치한 북경, 남경, 상해등 대도시에서 백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었따. 양표, 포표를 발행하여 먹고 입는 것을 제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식청년' 시민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가정을 해체시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당정부의 정치적업적보다도 나았다. 왕정위정부가 일본인과 물자를 놓고 다투어 얻어내서, 적군점령지구의 인민들은 먹고 입는것이 보장되었다. 적군점령지구의 인민들이 어찌 8년의 기나긴 세월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만일 당시에 왕정위등이 일본인과 합작하지 않았떠라면, 일본군인은 점령지구의 물자를 모조리 빼앗아가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점령지구의 백성들은 일본군인의 총탄은 피한다고 하더라도, 굶어죽고 얼어죽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왕정위정부와 일본인들과 물자를 다투어 얻어내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수천만의 인민들의 목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나서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도 스스로 다른 민족의 괴뢰나 주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구든 노예가 되고 괴뢰와 주구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부득이한 것이다. 만일 왕정위가 스스로 원해서 적극적으로 기꺼이 일본인의 괴뢰와 주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왕정위가 매국노로 된 것은 그가 잘못된 곳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이다. 만일 2차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승리했더라면, 왕정위는 장개석을 미국의 주구 매국노로 심판대에 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아마도 <왕주석문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역사에 가설은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역사인물을 비판해야 한다. 반드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성패를 가지고 영웅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不以成敗論英雄)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왕정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정위의 논리와 운명 (0) | 2016.05.19 |
---|---|
왕정위 다섯 자녀들의 인생결말 (0) | 2014.05.30 |
왕정위 섭정왕암살사건의 진면목 (0) | 2011.01.18 |
왕정위(汪精衛): 용모, 재주와 인품 (0) | 2010.05.19 |
왕정위묘가 폭파된 내막은? (0) | 2009.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