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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화국봉)

화국봉과 你辦事我放心(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

by 중은우시 2008. 6. 23.

 

 

 

글: 섭영렬(葉英烈)

 

화국봉(화궈펑, 華國鋒)이 모택동이 손으로 쓴 글인 "니판사아방심(你辦事我放心,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이라는 쪽지를 내놓은 이후, 신문과 간행물에는 대대적으로 이 "최고지시"를 선전했다. 모택동이 메모로 남긴 여섯글자는 거의 모택동의 '유언'처럼 받들어졌고, 화국봉을 국가최고지도자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모택동이 이 여섯 글자를 화국봉에게 줄 때, 촬영기자가 자리에 없어서 아무런 사진도 남기지 못한 점이다.

 

사진이 없으니, 오히려 화가들에게는 상상력을 발휘할 좋은 소재가 되었다.

 

저명한 화가이 ㄴ유문서와 진천건, 담북신, 황내원이 합작하여 1977년 1월 유화 <<你辦事我放心>>을 창작한다. 저명한 화가 이연성도 중국화 <<你辦事我放心>>를 창작하는데, 이 그�은 1977년에 수천만장 인쇄되어 북경의 거의 모든 집에 붙여졌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2002년 6월, 상해문회출판사가 장함지의 <<두터운 대홍문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오면서, "니판사아방심"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장함지는 교관화의 부인이다. 교관화는 중국의 저명한 외교가로 1974년 11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을 지냈다. 장함지 본인은 1970년대에 역시 중국의 외교관을 지낸다. 그녀는 일찌기 중미수교협상에도 참가했고, 닉슨방중, 상해커뮤니케의 협상에도 참여한 바 있다.

 

교관화는 모택동이 화국봉에게 써준 "니판사아방심"의 경위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장함지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그녀가 알고 있는 "니판사아방심"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76년 1월 8일 총리(주은래)가 서거했다. 모든 당은 장춘교가 총리직을 물려받을까봐 우려했다. 당중앙에서 화국봉이 대리총리로 임명되었다고 선포하자, 나는 지금도 교관화와 황진이 회의에서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와서 흥분하면서 술을 꺼내와서 축하하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화국봉에게 기대를 걸었다. 이어지는 일들은 지금도 왜그런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무형의 큰 그물이 펼쳐지고, 관화와 내가 그 거대한 함정으로 점점 빠져들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2월에는 이미 평민이 된 닉슨이 두번째 방중을 했는데, 강청은 돌연 아주 적극적이었다. 관화, 나, 예빈사장 주전현 및 황진대사를 그녀의 10호루에 불러서 계속 각종 분부를 했을 뿐아니라, 함께 연극을 보고, 꽃과 음식을 보내왔다. 이 기간동안, 강청은 모주석이 그녀에게 말했다고 하면서 그것이 모주석의 뜻이라고 했다. 비서는 우리의 자료를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일부 노간부는 우리와 협의하였는데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이 짧은 3월부터 5월 사이에 강청이 자주 찾은 것이 교관화와 나에게는 비극이 되었다. 아무도 이것이 모주석의 지시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이것이 많은 동지들이 협의한 내용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교관화가 나서서 '등소평비평'운동때 노간부들을 보호해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아무도 6월부터는 강청이 앞장서서 교관화를 비난하고 질책하면서 갈아치워야 한다고 말한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모주석이 살아있을 때였고, 우리는 묵묵히 여러가지 굴욕과 불공평을 참아내야 했다.

 

교관화는 마침내 쓰러졌다. 그는 먼저 심근경색 이어서 폐암에 걸렸다. 아마도 교관화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이유는 딱 한가지가 있었던 것같다. 1976년 4월 30일, 모주석이 뉴질랜드총리 멀든을 접견했고, 화국봉이 배석했다. 그날, 교관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회견전에 화국봉이 그에게 인민대회당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모주석의 건강상황이 이미 좋지 않아서, 말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어떤 때에는 글로 써야만 했다. 그 이전에 이런 상황은 이미 한동안 지속되었다. 모주석 곁에 있는 사람들은 쪽지를 주워서 수장했다. 나도 교관화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나도 몇장을 기념으로 가지고 싶다고. 당시 교관화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절대 그 쪽지를 가질 생각을 하지 말라. 이들 쪽지는 모두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다. 만일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누군가가 단장취의(斷章取義, 글의 중간을 떼어내서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를 하는데 그 쪽지를 활용한다면, 그리고 그 쪽지가 마침 네 손안에 있다면 넌 어떡할거냐?" 그날 교관화는 이렇게 말했다: "주석은 오늘 또 세 장의 쪽지를 썼다. 외빈이 물러간 후에 단독으로 화총리와 국내문제를 협의하며 쓴 것이다. 화총리가 가져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총리는 외빈을 만난 후에, 복건청으로 와서, 아주 기쁘게 관화에게 세 장의 주식이 친필로 쓴 쪽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과거방침판(照過去方針辦, 과거의 방침에 따라 처리하라)", "만만래, 불요초급(慢慢來, 不要招急,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니판사아방심"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관화는 왜그랬는지 모르지만 화국봉에게 이 '니판사아방심'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보았다. 당시 화국봉은 이렇게 말했다: '사천, 귀주의 등소평비판운동이 깊이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조반파가 내전에 열중하고 있으니, 양파를 북경으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등소평비판'에 집중하도록하자는 내용을 보고했더니, 모주석이 피곤하다고 하면서, 이 쪽지를 써주면서, 나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정치국회의때 모주석이 외빈을 회견할 때의 담화내용과 다른 지시를 전달하였다. 관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 있었다. 화총리가 오후에 분명히 나에게 쪽지 3개를 보여주었는데, 정치국회의에서는 그가 사람들에게 2장만 보여주었고, '니판사아방심'이라는 쪽지는 꺼내놓지 않았다" 나는 말나오는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너는 예전에 이런 앞뒤가 없는 쪽지는 쉽게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교관화는 그러나, 화국봉 동지는 충후한 사람이니, 내 생각으로 그는 겸허한 사람이어서 내놓지 않은 것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5개월후인 10월 6일, '사인방'을 분쇄할 때, 교관하는 마침 유엔회의 에 참석한 후, 이탈리아, 프랑스 양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소식을 하나 듣는다. 그가 증도 대사와 술잔을 들어 마실 때, 그가 어찌 알았으랴. 화국봉은 이미 외교부의 고위간부들에게 "교관화는 아마 도망치려는 것같다. 우리는 비행기로 그의 처를 보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세장의 쪽지를 전국에 보냈다. 특히 '니판사아방심'은 모주석이 그를 후계자로 지정한 근거라고 얘기했다. 민감한 서방기자는 분위기를 느끼고, 파리에서 교관화에게 묻는다: "듣기로 당신이 귀국하면 골치아픈 일이 생긴다던데.." 교관화는 그저 웃으면서, 그는 전국의 인민과 마찬가리로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며, 그것은 근거없는 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이때 화국봉은 이미 외교부의 당조직에 "교관화는 가장 먼저 '니판사아방심'의 쪽지를 본 사람이다. 그는 주석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주석의 지시를 막으려 했고, 외교부당조직에 이 소식을 막았다"

 

그리하여 교관화는 "모주석의 임종지시를 전파하는데 방해하고, 화주석이 후계자가 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사인방에 협조하여 당권을 찬탈하려 했다"는 죄명을 받는다. 교관화는 일개서생으로 이것은 모두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화국봉등에게 잘 설명하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일개 외교부장, 중앙위원인 그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을 줄은. 누구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십팔층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중앙의 지도자중에서 그와 얘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일은 돌아보기 괴롭다. 31년전에 내가 외교부의 문을 들어설 때, 나는 정치투쟁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다. 명리에 대하여 바라는 것이 없는 상아탑이 사람이었다. 1970년대에 격동적이었던 외교나 교관화와의 사랑은 나에게 황금색 꿈을 주었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은 이 꿈을 단지 순간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꿈은 금방 산산히 부서졌다. 1983년 9월 관화는 마침내 나를 떠났다. 이 꿈은 찢어져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다만 나는 시종 이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장함지는 또한 이런 글을 썼다. 1978년 1월 22일, 교관화가 조사를 받는 기간동안, <<유감(有感)>>이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장함지에게 보내왔다고, 시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장야만만불긍면(長夜漫漫不肯眠)

지연비분새심전(只緣悲憤塞心田)

하시득세침원진(何時得洗寃盡)

유암화명우일천(柳暗花明又一天)

 

기나긴 밤에 잠을 못이루는 것은

슬픔과 분함이 마음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언제나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벗으리오

버드나무는 깊고 꽃은 피는데 또 하루가 지난다.

 

장함지가 회고록을 쓴 것은 아마도 교관화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언급해야 할 점은 장함지가 말한 내용중에서 '니판사아방심'에 대한 경위는 믿을만하다고 본다. 그러나, 장함지는 교관화가 만년에 조사를 받은 것이 완전히 '쪽지사건'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확실히 편파적인 점이 있다.

 

모택동의 기요비서인 장옥봉(張玉鳳)의 회고에 의하면, 화국봉이 모택동의 쪽지를 공포하려고 준비할 때, 화국봉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왕동흥(汪東興)이 당시에 이 쪽지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쪽지의 진실성을 증명해달라고 했다.

 

1976년, 모택동의 담화기록자는 주로 장옥봉, 왕동흥과 모원신(毛遠新)의 세 사람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록자는 모택동의 기요비서인 장옥봉이었다.

 

왕동흥은 장옥봉에게 이것은 정치적인 큰 문제라고 말하면서 정치적인 입장에 대한 시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옥봉은 당시에 이렇게 말한다: "이 쪽지에 대하여, 나는 듣지도 못했고, 기억도 없다"

 

그러나, 장옥봉의 기억에 의하면, 1976년 초부터, 모택동의 병세가 위중해져서, 사람들과 얘기할 때 자주 쪽지를 써서 중요한 점을 남기곤 했으며,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쪽지를 모으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모택동과 화국봉의 담화때 장옥봉은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장옥봉은 "이 쪽지에 대하여 나는 듣지도 못했고, 기억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쪽지의 필체로 보아서는 확실히 모주석의 글씨였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점은 강청이 재판을 받을 때, 일찌기 모택동의 이 쪽지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1980년 12월 3일 오전이었다.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의 제1법정이 개정하여 강청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이번 재판의 주요한 내용은 강청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유소기를 박해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강청은 질문에 답하면서, 주제를 벗어나서 돌연 이 쪽지에 관하여 얘기하기 시작한다: "주석은 그날 저녁에 화국봉에게 '니판사아방심'이라는 쪽지를 써주었는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뒤쪽에 최소한 6글자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유문제, 조강청(有問題 江靑, 문제가 있으면 강청을 찾아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강청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