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화국봉의 원래 성은 소(蘇)씨이다. 이름은 외자로 주(鑄)이다. 1938년 유격대에 참가할 때, 소주는 "중화민족항일구국선봉"에서 세 글자를 따서 '화국봉'이라고 가명을 지었다. 나중에 그는 '화국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그의 본명이 '소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게 되었다. 지금도 화국봉의 자녀들은 여전히 소씨성을 쓰고 있고, 화씨로 불리지 않는다.
화국봉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태어났다. 즉 1921년생이다. 그러므로 그는 중국공산당과 나이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모택동의 장남인 모안영(毛岸英)은 1922년에 태어났으니, 화국봉보다 1살이 어리다. 1921년에 28세인 모택동은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전당대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 화국봉은 막 태어난 영아였다. 그리하여, 화국봉과 모택동은 세대가 다르다.
화국봉은 1921년 산서성 교성현(交城縣) 남관가(南關街)에서 태어나는데, 교성현은 산서성 중부로 태원시의 서남쪽이고, 문욕하의 상류이며 여량산지구에 속한다. 산이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이다. 고향말을 바꾸기가 어려워, 화국봉은 아주 심한 산서말을 사용했다.
1928년 7살의 화국봉은 교성현 남관소학에 입학한다.
1934년 13살의 화국봉은 남관소학을 졸업한다.
1935년 14세의 화국봉은 교성현 "상업직업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까지 공부한다. 그리하여, 화국봉은 나중에 이력표의 '학력'난에 항상 '중학학력정도'라고 적었다.
교성현은 진수변구(晋綏邊區, 진은 산서성, 수는 당시 수원성)에 속해 있었고, 일찌감치 공산당의 활동이 있던 곳이다. 화국봉이 중학에 다닐 때,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중국공산당 지하당원이 있었다. 화국봉은 그 곳에서 진보적인 책들을 보고 사상은 혁명적으로 기울어졌다.
1938년초, 17세의 화국봉은 집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서, 교성현 희생동맹항일유격대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이름을 '화국봉'으로 바꾼다. 화국봉으로 개명한 이후, 화국봉은 홍색의 길을 걷는다. 1938년 10월, 화국봉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1939년, 18세의 화국봉은 항일근거지 진수변구 제8전구 분양현 희맹회 특파원이 된다. 분양의 욕도하, 개원장, 오포 일대에서 항일유격활동을 전개한다.
1940년초, 19세의 화국봉은 산서성 교성현에서 공,농,청,부,무 각계항일구국연합회 주임이 된다. 이후 중공 교성현위서기 겸 무장대대 정치위원이 된다.
1945년, 24세된 화국봉은 중공 양곡현위서기가 되고, 현무장대대 정치위원이 된다. 이때부터 화국봉은 "화정위(華政委)"로 불린다.
필자는 화국봉의 상사였던 무광(武光)을 취재했다. 1996년초,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무광의 집으로 찾아갔다. 84세였던 그는 런닝셔츠 하나를 입고 있었다. 당시 그는 북경시인민대표대회 상무부주임이었는데 여전히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
무광은 1912년생이고, 하북 심택현 사람이다. 1930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는 918사변후에 북평(북평은 지금의 북경)단위서기를 맡았다. 당시 호교목(胡喬木)은 북평단위 선전부장이었다. 항일전쟁시기에 무광은 중공북평시위서기를 맡았었다.
무광에 따르면, 화국봉을 알게 되었을 때, 화국봉은 아직도 어렸다. 그때 무광은 중공 진중구당위부서기를 맡고 있었다. 소위 "진중구"는 산서 태원주위의 수십개현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화국봉은 1945년부터 산서 양곡현위서기 겸 현무장대대 정치위원을 맡아서, 중공 진중구당위의 지휘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화국봉은 무광의 부하가 된 것이다. 주소주(周小舟)는 중공 진중구당위 선전부장이었다. 화국봉은 이때 주소주를 알게 된다. 나중에 1953년 10월, 주소주는 중공호남성위 제1서기가 되어, 화국봉의 직계상사가 된다.
필자가 무광에게 당시 화국봉에 대한 인상을 묻자, 무광은 사실대로 답변했다: "화국봉은 성실한 사람이고 좋은 동지이다. 그 때 화국봉이 내게 준 인상은 정파이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1948년 겨울, 중공중앙은 화북에서 5만명의 간부를 뽑아서 군대를 따라 남하시키기로 결정한다. 남방의 도시와 시골을 접수하려는 것이다.
무광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화북의 간부들은 절반이 떠나고 절반이 남았다. 무광과 화국봉은 둘 다 남하한 쪽에 속했다. 당시 중공 진중구위는 둘로 나누어서, 무광은 명을 받아 남하하는 간부를 6조로 나누었고, 매조에는 당(黨), 정(政), 무(武), 공(工), 청(靑), 부(婦)의 6방면의 간부를 포함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남하할 때 쉽게 지역을 접수해서 6개 지방위원회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남하할 때, 가부들은 거의 모두 한 단계씩 승진했다. 1949년 1월, 28세된 화국봉은 중공진중제1지구위원회 선전부장이 된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현위(縣委)급 간부에서 지위(地委)급 간부로 승진한 것이다. 이때 화국봉은 한지준(韓芝俊)과 결혼한다.
화국봉의 최초경력으로 보면 그는 확실히 "근정묘홍(根正苗紅, 뿌리가 바르고 싹이 붉은)"의 간부였다. 그는 여량산에서 유격전을 벌여서, 먼저 일본군대와 싸우고, 다시 국민당군대와 싸웠다. 수십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경험한 것이다.
그 때, 젊은 화국봉은 전쟁의 봉화가운데 성장했고, 착실하고 성실하며, 힘든 것을 견디는 괜찮은 중국공산당의 하급간부였다. 그러나, 화국봉이 "영명한 영수"가 된 이후에 '화국봉 선전'의 열기속에서 고의로 화국봉을 이때 이미 모주석의 저작을 학습하는 모범을 보인 것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여러 보도, 회고문장에 따르면, 화국봉을 이렇게 선전했다:
1940년초, 그는 교성현 공농청부무 각계항일구국연합회 주임을 맡았는데, 군중의 항일인민전쟁을 발동시키기 위하여, 화국봉은 낡은 양가죽웃도리를 걸치고,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책을 들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항일구국의 십대강령을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선전했다. 그리고 아주 간명하고 통속적으로 지구전의 세 단계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또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 모택동이 전쟁의 포화중에서도 모택동의 저작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적고 있다:
교성현은 여량산지역에 있다. 진수변구 팔분구의 전초기지이다. 투쟁은 아주 첨예하고 복잡했으며, 환경은 열악했다. 당시, 혁명전쟁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화국봉동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주석의 저작을 열심히 학습했다. 그의 짐 속에는 항상 모주석의 빛나는 저작인 <<중국사회각계단의 분석>>, <<지구전을 논함>>, <<조직하라>>, <<시월혁명25주년을 축하하며>>을 가지고 다녔다...그리고 중공중앙 진수분국의 전서북을 조직건설하는 시정강령등의 소책자도 지녔다. 어디를 가든 학습했다. 한번은, 화국봉 동지가 과두촌에서 출발하여 왕문촌에 업무검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한 산을 올랐는데 모두 피곤하다고 생각하여 그늘진 곳을 찾아 휴식하고 있었다. 화국봉동지는 피로를 모른체, 틈만 있으면 바늘을 찌르듯이 모주석의 저작을 열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등을 켤 기름이 없었다. 그는 교성산지역의 특산인 송유시(松油柴)로 불을 밝혀 깊은 밤까지 공부했다. 어떤 때에는 송유연기로 얼굴이 검게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한동안 그는 병이 들었는데, 동지들이 몸을 돌보라고 하는데도, 그는 전쟁시대에 모주석의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고, 모주석의 저작을 잘 배워야 능력이 생기며, 적에게 이길 수 있고, 국면을 열어제낄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보도는 이처럼 화국봉이 20여세때부터 이미 모택동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빛나는 모범이었다고 하였다. 사실 화국봉을 일관되게 모주석에 충성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모택동의 충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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