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吳)나라에서 처음으로 왕(王)을 칭한 수몽(壽夢)은 25년간 오나라를 통치한 후 기원전561년 세상을 떠난다. 임종시에 후계자를 골라야 하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4명 있었다. 첫째가 제번(諸樊), 둘째가 여제(餘祭), 셋째가 여매(餘昧), 넷째가 계찰(季札)이었다. 그중 계찰이 가장 현명하여 수몽을 계찰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계찰은 총명했고, 세 형이 모두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쉽게 왕위를 양보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고사한다. 그러자, 수몽은 할 수 없이 제번을 불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나라를 계찰에게 넘기고 싶었다. 너는 내 뜻을 잊지 말라.”...
“주나라의 대왕이 서백이 성인인 것을 알고, 나이많은 아들이 아닌 나이어린 아들을 세워서 왕도가 흥했습니다. 이제 저도 나라를 계찰에게 넘기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습니다.”
“주나라는 천하에 덕을 행했지만, 오나라는 자그마한 나라이니 같은 반열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냥 나라를 동생들에게 차례로 넘겨주어(授國以次) 계찰이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하라.”
공경불여종명(恭敬不如從命)의 명분하에 제번은 국왕에 오른다. 그래도 제번은 효자였다. 죽을 때가 되어 그는 계찰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하나, 계찰이 다시 사양한다. 그리하여 왕위를 동생 여제에게 넘긴다. 그리고 계찰에게는 연릉(延陵)을 봉지로 주어 계찰은 연릉자(延陵子)라고도 불린다. 계찰 본인은 여러 번에 걸친 사양으로 현양(賢讓)의 미명을 얻었다. 이는 계찰에 있어서 현명하다는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형들로부터 왕위를 빼앗지 않음으로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덤으로 현명하다는 명성까지 얻을 수 있었다.
동한말기 조식(曹植)은 부친이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자,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형인 조비(曹丕)와 위왕세자의 자리를 다툴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수단을 써보지만 결국 조비에게 패배하고, 솥안에 넣은 콩처럼 언제든지 삶기고 처치될 지경에 처하게 된다.
원래 조식의 비극은 조조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게다가 부친과 형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문사들의 훈도를 받아 10살이 되어서는 이미 시경, 논어 및 선현의 사부(辭賦) 십여만언(十餘萬言)을 읽고 시부(詩賦)를 쓸 줄 알았을 뿐아니라 문장력도 대단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실력에 조조는 이를 반신반의했다. 그리하여 한번은 조식에게 “너는 혹시 누가 대필해주는 것 아니냐?”라고 묻는다. 이 말에 조식은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해 하며, 무릎을 꿇고 답한다:
“저는 입으로 말하면 글이 되고, 붓으로 쓰면 문장이 됩니다. 직접 시험해 주십시오. 부친께서는 왜 제가 대필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조조가 이 일을 더 이상 따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동작대(銅雀臺)를 완공한 후, 여러 아들을 불러 각각 부(賦)를 한 편씩 짓도록 명한다. 다른 아들들이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조식은 벌써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이것이 유명한 <등대부(登臺賦)>이다. 조조는 조식이 쓴 <등대부>를 여러 번 읽었고, 읽을수록 마음에 들어서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부는 수준이 높다.” 부가 수준이 높다면, 그 부를 쓴 사람도 수준이 높은 것이다. 이때부터 조조는 조식을 치국경방(治國經邦)의 인재로 배양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조식도 여러가지 수완을 써서 조조에게 잘보여 최종목적 즉, 세자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할 점은 만일 조충(曹沖)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왕위는 아마도 조비와 조식간의 이파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조충까지 합친 삼파전이 되었을 것이다. 조충은 조조의 환부인 소생으로 자는 창서(蒼舒)이고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친다. 5,6살 때 벌써 지적능력은 어른 수준이었고, 일찌감치 “조충칭상(曹沖稱象)”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원래 손권은 유비의 공격을 받자, 조조와의 우호관계를 위하여, 북방에는 없는 커다란 코끼리를 한 마리 선물한다. 조조는 이 선물을 받자 코끼리의 중량을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주변의 모사들중 누구도 이에 답을 하는 자가 없었고, 조조 자신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조충이 나서서 부친에게 말한다: “코끼리를 배에 태워서 물이 배의 어디까지 차는지 표시한 다음, 코끼리를 내리고, 대신 다른 물건을 실어서 같은 위치까지 물이 차게 한 다음, 그 물건의 무게를 재면 됩니다.”
조충이 죽자 조조는 매우 슬퍼하며, 조충을 위하여 이미 죽은 견씨의 딸을 그와 합장시켜 귀처(鬼妻)로 삼게 해주고, 완후(宛侯) 조거(曹據)의 아들 조종(曹琮)을 조충의 양자로 삼아서 후대를 잇게 해준다. 그리고, 슬퍼하는 조조에게 조비가 위로하자,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너희들에게는 행운이구나!” 나중에 위문제가 된 후 조비도 이렇게 말한다: “만일 창서(조충)이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若蒼舒亦在, 我亦無天下).” 이러한 점을 보면, 조충이 얼마나 총명했고, 조조의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조식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부친의 총애를 받아 형인 조비와 거의 대등하게 세자자리를 놓고 다툴 수 있었고, 조충은 스스로에게 뜻이 없었을지 몰라도 부친인 조조는 그의 뛰어난 재주를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재능은 황자로서 황위를 노리는데 중요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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