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여인노선술(女人路線術) 처첩출면패(妻妾出面牌) 사마충편외

중은우시 2015. 10. 11. 22:55

 

황위쟁탈전때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이용한다. 처첩도 이용대상이다.

 

서진(西晋)의 개국황제 사마염(司馬炎)은 사마의로부터의 수대에 걸친 공훈과 자신의 총명함으로 결국 황위를 선양받는다. 그런데, 하늘이 그에게 점지해준 적장자 사마충(司馬衷)은 거의 백치에 가까운 바보였다. 하루종일 궁안에서 사람들을 시켜서 장사를 하게 하였을 뿐아니라, 그 자신은 칼을 들고 고기를 팔았다. 그가 칼로 고기를 자르면 무게가 정확할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신들에게 “흉년이 들어서 5년간 곡물을 수확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백성들은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 고기죽만 먹으면 굶어죽지 않을텐데….”라고 말할 정도로 황당했다.

 

그러나, 사마충은 바보이지만 나름대로 큰 복을 타고 났다. 사마염의 장남으로 태어나 태자에 올랐을 뿐아니라, 그의 부인인 태자비 가남풍(賈南風)이 보통여자가 아니어서 태자자리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부친인 진무제 사마염도 아들이 어떤지 모를 리가 없어,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대신 화교(和嶠)등에게 그런 생각을 말하였다. 사마염은 고민 끝에 사마충을 시험하기로 하고, 동궁의 속관을 모조리 불러서 연회에 참가하도록 하여 사마충이 동궁속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한 후에, 사마충에게 문제를 내주고 답안을 써오도록 한다. 가남풍은 문제를 보자 바로 사마충이 답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신속히 조치를 취한다. 동궁속관은 모조리 연회에 참석하였으므로 외부에서 사람을 구해 답안을 대신 쓰게 한다. 그 답안에는 경전에서 인용한 문구들이 많았다. 급사 장홍(張泓)에게 답안을 읽어보게 하였는데, 장홍은 답안을 본 후 가남풍에게 말한다: “태자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답안에는 경전을 너무 많이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 대신 답안을 써주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차라리 뜻만 얘기해주고 태자에게 직접 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남풍은 그의 말에 따라, 장홍으로 하여금 답안을 말로 설명해주도록 하고, 사마충으로 하여금 자신의 글로 쓰게 하였다. 사마염은 사마충의 답안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사마충이 학문에 진보가 있다고 믿고, 완전한 바보는아니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사마충이 결국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혜제(晋惠帝)이다.

 

그러나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司馬遹)의 운명은 그의 부친처럼 좋지 못했다. 진혜제 사마충이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사마휼이 똑똑하여 조부인 사마염의 총애를 받았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 그러나, 사마휼은 악독한 가남풍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원래 가남풍의 모친 곽괴(郭槐)는 가남풍이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그녀에게 태자 사마휼을 아껴주라고 권했고, 죽을 때까지도 가남풍에게 태자를 잘 아껴주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조충화(趙充華), 여동생 가오(賈午)와 함께 태자를 해친다. 원강9년(299년), 가남풍은 거짓으로 임신했다고 하면서, 매부인 한수(韓壽)의 아들 한위조(韓慰祖)를 친아들이라고 하고, 사마휼을 태자에서 폐위시킨 후, 한위조를 태자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마휼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황제와 황후를 죽이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게 한 다음, 그 글을 사마충과 종실에 보내어, 사마휼이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한다. 태자 사마휼은 스스로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했으나 효과가 없자, 마지막으로 직접 자신의 결백함을 밝히는 글을 써서 부친에게 올린다. 그런데, 그의 장인이며 상서령인 왕연(王衍)은 가후의 위세가 두려워 가후에게 알린 후 그 서신을 진혜제에게 올리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딸을 집에 감금하고, 딸과 사마휼을 이혼시켜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결국 사마휼은 가남풍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연의 이런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하여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청담(淸談)의 화(禍)는 하안(何晏)에서 시작된다….왕연이라는 자는 하안만도 못했다.”

 

수양제 양광이 진왕(晋王)으로 있을 때, 자신이 어질고 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처인 소씨(蕭氏)를 앞장세우는 것이었다. 형인 태자 양용(楊勇)이 첩을 많이 두는 바람에 적모인 독고황후의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광과 소씨 부부는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부부의 모습을 연출한다. 소씨로 하여금 자주 수문제와 독고황후의 근처에서 효도를 다하게하는 한편, 누군가 양광의 집을 방문하면, 양광과 소씨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손님이 올 때면 같이 마중하고, 손님과 같이 마주앉아 차를 따르고, 손님이 떠날 때는 같이 배웅했다. 하루는 수문제와 독고황후가 양광의 집으로 온다는 소식을 그의 심복 한 명이 전해주었다. 집안에서 미녀들과 놀고 있던 양광은 깜짝 놀라서 급히 좌우의 미녀와 시녀들은 모조리 별실에 숨어 있으며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나이들거나 용모가 추한 여인들만 남겨서 수문제와 독고황후에게 차를 따르게 했다. 동시에 양광과 소씨는 화려한 옷을 벗고, 시녀들과 별 차이가 없는 수수한 옷을 입는다. 또한, 화려한 병풍과 장막을 모두 걷고, 색깔없는 병풍과 장막으로 바꾸어 두었다. 그뿐 아니라, 병풍 앞에는 현이 끊어진 금(琴)을 낡은 탁자위에 놓아두면서 탁자에는 먼지가 한 겹을 쌓이도록 해놓았다. 이렇게 하여 여색과 성색을 멀리하고 근검절약을 강조했던 수문제와 독고황후로부터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당태종 이세민의 황후 장손씨(長孫氏)는 역대이래로 현명한 황후로 알려져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녀는 이세민의 황위쟁탈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녀는 이세민의 경성에 있는 본부이자 기지로서 이세민을 위하여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여 역량을 모았다. 또한, 황궁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이세민이 전선에서 획득한 금은보화를 이세민의 서모이자 자신의 시어머니가 되는 비빈들에게 갖다 바쳤다. <구당서.후비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후(장손씨)는 “효성을 다하여 고조를 섬기고, 비빈들을 공손히 따랐으며, 힘을 다하여 미봉(彌縫)하여, 내조를 했다.” 장손황후가 도처를 돌아다니며 남편을 도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 무덕9년 유월 사일 새벽 현무문사변때 쌍방의 투쟁이 치열하여 승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녀는 “장사들을 불러 갑옷을 내리면서, 후(장손씨)가 직접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니, 좌우가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돋구어주고, 다른 한편으로 목숨을 걸고 돌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보면 그녀는 군사와 모략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