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후의 임조칭제(臨朝稱制)는 신황제의 나이가 어린 것을 기화로 이루어지며, 신황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임조칭제를 하고 싶어하는 황태후(혹은 신황제즉위후 황태후가 될 황후)나 딴 마음을 품고 있는 대신들은 새 황제를 옹립할 때 자신의 이익 즉, 권력유지나 강화를 고려하여 후계자를 고르는 경우가 있다.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태자 유영(劉盈)이 16살의 나이로 황위를 물려받으니 그가 곧 한혜제(漢惠帝)이다. 그러나 한혜제는 유약하여 그의 모친 여후(呂后, 한혜제 즉위후에는 여태후)가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혜제본기>를 두지 않고, <여태후본기>를 두었다. 이는 사실상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한혜제가 아닌 여태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권력을 장악한 후, 정적인 척부인(戚夫人)을 인체(人彘)로 만들어 죽이고, 척부인 소생인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도 죽여버린다. 이에 충격을 받은 한혜제는 황제에 오른지 7년만에 2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원래 여후는 “친상가친(親上加親)”하기 위하여, 나이 겨우 11살의 외손녀 장언(張嫣)을 한혜제의 황후로 삼는다. 장언은 원래 여후의 딸이자 한혜제의 누나인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딸이니, 여후에게는 손녀가 되고, 한혜제에게는 조카딸이 된다. 여후의 입장에서는 장언이 외손녀이자 며느리가 된 셈이다. 여후는 장언이 아들을 낳아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나이가 너우 어렸다. 온갖 방법을 썼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여후는 한가지 계책을 세운다. 한편으로 장황후에게 배가 부른 것처럼 가장하도록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씨혈맥을 임신한 후 궁으로 들어간 주미인(周美人)이 낳은 아들인 유공(劉恭)을 장황후의 아들로 삼고, 유공을 낳은 주미인은 죽여버린다. 이렇게 하여 겉은 유씨천하이지만 속은 여씨천하로 되어버린 것이다. 여후가 이를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고 머리를 썼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후는 한혜제가 죽은 후 유공을 황제에 올리니 그가 바로 한소제(漢少帝)이다.
원래 한소제 유공이 황제에 오르면, 유공의 형식상의 모친인 장언이 태후가 되어야 하지만, 여후는 장언으로 하여금 태후가 아니라 여전히 효혜황후로 칭하게 하면서, 여후가 여전히 황태후로 임조칭제한다.
그리고 여후는 여씨의 권력강화를 위하여 여러가지 수법을 쓴다. 우선, 유방이 “유씨가 아니면서 왕에 오르는 자는 천하가 주살할 것이다”라는 유명을 내렸지만, 여후는 이미 죽은 자신의 오빠 여후(呂侯)를 도무왕(悼武王), 여석(呂釋)을 조소왕(趙昭王)에 추존한다. 이는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시작이었다. 그 후 기원전187년, 조카 여대(呂臺)를 여왕(呂王), 여산(呂鏟)을 양왕(梁王), 여록(呂祿)을 조왕(趙王)에 봉하고, 질손(侄孫)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에 봉한다. 부친 여문(呂文)은 여선왕(呂宣王)에 추존한다. 그 외에 딸인 노원공주의 아들 장언(張偃)은 노왕(魯王)으로 삼는다. 조정내에서 이에 반대하는 대신은 혹은 죽이거나 혹은 유배를 보내버린다. 그리하여, 중앙조정은 여후를 따르는 신하들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후는 한혜제 후궁의 아들인 유강(劉强)을 회양왕으로, 유불의(劉不疑)를 항산왕으로, 유산(劉山)를 양성후로, 유태(劉太)를 창평후로, 유조(劉朝)를 지후(軹侯)로, 유무(劉武)를 관후로 삼았다. 한소제와 함께 소위 한혜제 후궁미인의 아들 7명에 대하여 당시의 대신들은 한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았다. <한서>의 주해에서는 <외척은택후표>를 근거로 하여 이들 7명은 모두 여씨의 혈맥이라고 단언했다. 조포계(調包計)로 조정은 황제까지 여씨 일색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혜제 후궁미녀의 아들이라고 하는 7명은 모두 여씨의 처첩중 임신을 한 여인을 한혜제의 후궁으로 넣어서 낳은 것이라고 한다. 즉 새가 둥지를 빌어 알을 낳은 것일 뿐이다(借巢下蛋).
4년이 지난 후, 나이가 점점 들어가자 한소제도 자신의 신세내력을 약간씩 알아가게 된다. 그러자, 수시로 자신의 생모를 잔혹하게 죽인 여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황태후는 어찌 나의 생모를 죽이고 나를 황후의 아들이라 하였는가? 내가 아직 어리지만, 내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복수하겠다.” 여후가 그 사실을 알고는 한소제를 영항(永巷)에 연금시킨 후, 조서를 내려 한소제는 병이 들었으니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선포한다. 얼마후 여후는 유공을 폐출시키고 그를 죽여버린다. 같은 해 오월 십일일, 여후는 한혜제의 또 다른 아들인 항산왕 유의(劉義)를 황제로 삼으며(원래의 양성후 유산인데, 항산왕 유불의가 죽은 후 항산왕이 되며 이름을 유의로 개명했다)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개명시킨다. 그는 제2의 한소제가 된다. 역시 여씨혈맥이다. 역사에서는 유공을 전소제(前少帝), 유홍을 후소제(後少帝)로 부른다. 그가 즉위한 이후에도 여전히 여후가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는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원래 다음 해부터 연호를 새로 제정하여 원년으로 삼는 법인데, 여후가 계속하여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후소제가 즉위한 후에도 연호는 바꾸지 않았다는데서도 알 수 있다.
기원전180년 구월 여후가 사망하고, 주발, 진평등의 노력으로, 여씨일족은 모조리 제거된다. 그들은 한소제 유홍이 한혜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형제 4명과 함께 퇴출되고 죽임을 당한다. 여후의 여씨천하의 꿈은 완전히 무산된다. 그러나, 그녀는 한혜제, 전소제, 후소제의 3명의 황제시기에 실질적인 중국의 최고통치자였고, 전소제, 후소제는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직접 선택한 어린 황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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